“우리는 승리하리라”, 마틴 루터 킹이 꿈꿨던 세상

2025-01-20     김지환

마틴 루터 킹의 날

올해 1월 20일은 ‘마틴 루터 킹의 날’이다.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1월 15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일에 가까운 1월 셋째 월요일은 그를 기리는 미국 공휴일이다. 1983년 11월 2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 공휴일 제정 법안에 서명하고, 1986년 1월 20일부터 공휴일이 공식 시작되었다. 이로써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 시민으로서 유일하게 국가 공휴일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 되었다.(‘조지 워싱턴의 날’이 있지만, 공식 이름은 ‘대통령들의 날’이다.) 올해 ‘마틴 루터 킹의 날’은 첫 공휴일과 같은 날이다. 보수적인 반공 투사 레이건이 ‘마틴 루터 킹의 날’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운데, 이는 순전히 정치적 계산으로 흑인 유권자의 표를 의식해서라고 한다. 물론 제시 헬름스 같은 우파 정치인은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한 부도덕한 성직자인 킹을 위한 기념일을 제정하는 일은 부당하다”며 공휴일 지정을 반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킹 목사의 성적 문란은 많이 이야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꿈꾸던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긍심을 갖고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반영한 이날의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는다.

196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 (사진 출처 = 노벨재단)

고단한 흑인의 삶과 킹 목사의 꿈

아주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는 '뿌리'(Roots, 1977)라는 미국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으며 방영되었다. 이 드라마는 노예선으로 실려와 미국에 정착한 흑인들의 애환과 끈질긴 생명력을 다루었는데, 미국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한국전쟁에도 참여했던 알렉스 헤일리는 “맬컴 엑스 자서전”(1965)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뿌리'의 주인공 이름인 '쿤타킨테'는 얼굴이 조금 까무스름한 사람에게 붙이는 별명으로 종종 쓰였다. 이 드라마는 최초로 한국 사람들에게 노예로서 비참한 삶을 살았던 흑인의 모습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미국 드라마 '뿌리' 한 장면. 아기 쿤타킨테. 1979년 국내에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2016년에 4부작으로 다시 제작되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홈초이스 채널 영상 갈무리)
미국 드라마 '뿌리' 한 장면. 잔혹한 노예선. (이미지 출처 = 유튜브 홈초이스 채널 영상 갈무리)

흑인들의 삶은 노예 해방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대놓고 인종차별이 관행적으로 펼쳐졌고, 미국의 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이를 비판해 왔다. 흑인 가사 도우미의 이야기를 그린 '헬프'(The Help, 데이트 테일러, 2011), 천재 흑인 여성의 나사에서 활약상을 그린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테오도어 멜피, 2017), 유명 흑인 피아니스트와 이탈리아계 백인 운전기사와의 우정을 그린 '그린북'(Green Book. 피터 패럴리, 2018)을 보면 미국의 흑인 분리 인종차별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특히 버스와 식당은 물론 화장실까지도 함께 쓰지 못하게 했는데, 급해도 바로 눈 앞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고 멀리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 흑인의 일상 속 고충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활동상은 이런 영화에서 보여 주는 흑인의 현실 속에서 전개된다.

(왼쪽부터)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영화 '헬프', '히든 피겨스', '그린북'. (포스터 출처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20세기 폭스 코리아, CGV 아트하우스)

인권운동에 대한 공로로 196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킹 목사가 미국의 전국구 스타로 떠오르게 된 사건은 1955년 말부터 전개된 ‘버스 보이콧 운동’이었다. 그해 12월 1일 버스 안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인종 분리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선다. 그가 법정에 서는 12월 5일 단 하루 실시하고자 했던 ‘버스 보이콧 운동’은 11개월이나 지속된다. 이때 몽고메리시 덱스터 교회에서 사역하던 킹 목사가 이 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1956년 11월 대법원이 지방 버스 노선의 인종 차별을 불법으로 선언함으로써 흑인 시민의 승리로 끝난다. 이 한 지역의 승리는 불의한 제도와 법을 거부할 권리가 인정받았으며, 억압받던 흑인들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안겨 준 기쁜 소식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킹 목사는 흑인 민권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로자 파크스 여사. (이미지 출처 = '흑인 민권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차이나는 클라스' 168회 유튜브 채널 영상 갈무리)

몽고메리시의 버스 보이콧 운동이 승리한 이 시기에 중요한 사건이 또 하나 발생한다. 이른바 '리틀록 사건'으로, 1957년 아칸소주의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흑인 학생들의 백인 학교 등교를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이다. 1954년 미 연방대법원은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347 U.S. 483) 재판에서 피부색 때문에 학생들의 교육을 분리하거나 차별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에 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는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 아칸소주의 주도인 리틀록의 학교에 흑인 학생이 다니게 하고자 했고, 리틀록에서는 성적이 우수한 흑인 학생 9명을 받기로 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흑인 학생 입학을 허가해야 한다고 선고했지만, 1957년 9월 4일 아칸소주 주지사가 이를 거부하며 주방위군을 학교에 투입해 흑인 학생의 등교를 방해했다. 미국에서는 섣불리 연방정부가 주정부에 간섭하지 않지만, 사태 심각성 때문에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대통령 권한으로 연방군을 투입하면서 아칸소의 주방위군 통수권을 주지사로부터 회수했다. 연방군 101사단이 투입된 지 이틀 만에 아칸소 주지사 오벌 포버스는 굴복하고 흑인 학생의 등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연방군 101사단과 주방위군은 흑인 학생의 등교를 방해하던 시위대를 해산함으로써 사태를 진정시켰다. 리틀록 사건은 미국의 민낯을 보여 주었지만, 동시에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킹 목사는 이러한 격동기에 미국 곳곳을 순회하며 백인과 흑인이 공존하는 새로운 미국을 꿈꾸었다.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등교하는 흑인 학생들. (이미지 출처 = 'How the Airborne Protected the Little Rock Nine', 유튜브 Battle Order 채널 영상 갈무리)

미국 백인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준 마틴 루터 킹, 하지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브루스 베레스포드, 1990)는 흑인 운전사와 유대인 여성과의 우정을 다룬 영화로, 잔잔한 감동이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쇼생크 탈출'(프랭크 다라본트, 1994)에서 열연한 모건 프리먼이 운전사 호크 역을 맡는다. 성격이 깐깐한 데이지 여사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졌지만, 새로 고용한 운전사 호크와 우정을 나누면서 점점 변해 간다. 전직 교사 출신인 데이지는 글을 몰랐던 호크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데이지는 흑인 인권운동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결국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들으러 간다. 이때 사업을 하던 아들은 사업 파트너의 눈치를 보며 데이지를 살짝 만류하기도 한다. 연설장으로 가면서 데이지 여사는 호크에게 킹 목사로 상징되는 변화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지만, 호크는 말한다. “변화를 말씀하시지만 바뀐 건 별로 없습니다.” 영화 속 킹 목사의 연설에서 지금 우리가 잘 아는 명 구절이 나온다. “이 사회적 변혁기에 역사가 기억할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이들의 독설과 폭력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침묵과 무관심입니다. 우리 세대가 뉘우쳐야 할 것은 어둠의 자식들이 행한 말과 행동이 아니라, 빛의 자식들이 지녔던 두려움과 무관심입니다.”

확실히 킹 목사는 많은 백인에게 지지를 받은 것 같은데, 한국에서 흔히 킹 목사를 이해하는 지점은 1963년 8월 워싱틴 D. C. 링컨 기념관에서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을 통해 그려지는 민권 운동가의 모습이다. 미국 백인이 받아들이고 싶은 킹의 모습은 거기까지였는지 모르겠다. 킹 목사가 그들이 정해 놓은 선을 넘고 더 급진화할 때, 지지는 계속해서 이어진 것 같지 않다.

킹은 말년에 비폭력 저항의 민권 운동가에서 혁명가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는 1965년 이후 가난한 사람과 경제 불평등, 특히 북부 지역의 빈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0여 년간 흑인 민권운동에 헌신했던 그는 흑인의 고통이 단지 피부색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각성했다. 1966년부터 ‘시카고 자유운동’에 참여하면서, 노동 조합과 손잡고 차별과 빈곤 타파를 위해 싸웠다. 게다가 1967년 2월 베트남전을 비판하는 연설을 통해 인종차별과 빈곤 그리고 전쟁의 상호 관련성을 강조했다.

이처럼 킹 목사가 미국 사회의 본질적 문제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그를 향한 비난이 거세졌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민권 운동과 베트남전쟁을 혼동한다고 비판했고, 기득권층은 킹을 더욱더 경계했다. 게다가 비폭력 흑인 민권운동에 지지를 보낸 세력도 그를 ‘배신자’로 규정했다. 이런 킹 목사의 변화를 보며, 그를 수행한 한 기자는 그의 생각이 점점 맬컴 엑스와 닮아 갔다고 했다. 사실 맬컴 엑스는 킹 목사를 "백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20세기의 샘 아저씨"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말년의 킹 목사는 그의 사생활과 관련한 폭로 위협에 시달리고, 또 생명을 위협받았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지난해 12월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또다시 한국 시민을 깊게 각성시켰다. 여의도, 남태령, 광화문, 한남동 곳곳에서 ‘반쿠데타 내란 진압 빛의 민주 혁명’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놀란 것은 시위 현장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상'을 비롯한 케이팝이 흥겹게 흘러나온 점인데, 심심찮게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기존 민중 가요도 흘러나왔다. 동시에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El pueblo unido jamas será vencido)와 '우리는 승리하리라'(Venceremos)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 가요도 들을 수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온 '벤세레모스'는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인민연합에서 선거 캠페인 송으로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같은 제목의 다른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는 내 세대에게 무척 익숙하다. 가톨릭 성가 '주께 나아가리다'도 같은 곡이다. 이 곡은 복음성가 작곡가로도 유명한 미국 흑인 감리교 목사 찰스 틴들리가 'I’ll Overcome Someday'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그런데 앞부분 멜로디가 가톨릭 성가 'O sanctissima'와 매우 비슷한 점으로 보아 이 노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포크 가수 피터 시거가 부르는 'We Shall Overcome' 듣기

잉그리드 버그만이 수녀 역으로, 빙 크로스비가 사제 역으로 깊은 감동을 준 추억의 영화 '성 메리 성당의 종'에 나오는 노래 듣기

미국에서 찬송가로 불렀다가 포크 가수 피터 시거가 포크송으로 편곡한 이 노래는 미국의 인권운동가로 널리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민기 선생이 1972년 서울대 신입생 환영회 공연에서 번안해 불러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다. '우리 승리하리라'는 인권운동의 찬가로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장례식에도 불리게 될 만큼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였다. 킹 목사는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에 '우리 승리하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듣기

그들도 우리처럼, 우리도 그들처럼, 킹 목사가 꿈꾸던 세상은 모든 지구 시민의 싸움과 이어진다

킹 목사는 결국 1968년 4월 4일 인종차별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에게 저격당하고, 맬컴 엑스와 같은 39살에 세상을 떠난다. 혹자는 케네디 대통령처럼 킹 목사 암살 배후에 국가 고위 관계자들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 뒤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방화, 건물과 차량 파괴, 약탈을 동반한 폭력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킹 목사의 뜻이 아니라는 흑인 지도자의 자제 요청과 군경 투입으로 시위대는 해산했다. 킹 목사는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깊게 남았는데, 미국 성공회와 루터교에서 성인으로 추대했다.

킹 목사는 인종 문제와 계급 문제를 아우른 더 높고 깊은 전망에서 흑인과 백인의 공존을 꿈꾸었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가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되었을 때 잠시 기쁨을 만끽하며 어떤 변화를 기대했지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코크가 말했듯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미국에서 흑인은 여전히 2등 시민일 뿐이며, 온갖 차별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쌓인 분노는 종종 아시아계 사람에게 향하기도 하는데, 이는 백인 기득권층이 아주 좋아할 만한 일이다.

킹 목사가 꿈꾸던 세상은 비단 그가 활동했던 미국을 넘어 전 세계 비탄 가득한 현장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 준다.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처럼, 곳곳에서 행해지는 아파르트헤이트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에, 또 구조적 빈곤과 싸우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에, 억압적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투쟁들에 깊은 영감을 일깨운다. 이는 반쿠데타 내란 제압 ‘빛의 혁명’을 진행하는 우리의 현실과도 이어진다. 지금 이 싸움은 윤석열 정권의 종식을 넘어 더욱더 깊은 사회 변혁으로 진행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집회 현장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목소리는 물론, 소수자의 목소리도 발신되고 있다. 예전 촛불혁명과 차원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킹 목사의 삶과 목소리는 인간 존엄성을 위해 투신하는 모든 이와 깊게 통한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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