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부르는 희망 노래

2024-11-11     박정은

갑자기 오지도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우리 곁을 오는 듯하더니, 벌써 초겨울 문턱이다. 이럴 때 내가 부리는 사치는 긴 늦은 오후의 산책이다. 늑대의 시간, 빛과 어둠이 만나는 이 시간이 주는, 이 익숙하고 또 생소한 느낌은 삶과 죽음의 간극이 흐려지는 십일월에 만나는 귀한 정취다. 시애틀에 살 때, 십일월 어느 오후, 내 방의 창밖을 보면, 온통 세상이 인디고 빛으로 물들곤 했는데, 그 신비한 시간이 지나면 바로 먹먹한 어둠이 내리곤 했었다. 십일월, 내 삶의 내일을 알 도리 없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삶의 모든 신비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싶어지고, 영원을 사모하게 되는 이런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인 여성 영성 수업을 하다가, 내 삶에 과연 나는 몇 번이나 더 이 귀하고 행복한 시간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줌 화면을 보니, 열심히 사고하는 여성들의 얼굴이 귀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래서 내가 만나는 사람이나 할 일들을 마지막처럼 열심히 해야지 하는 결연한 마음이 든다.

며칠 전,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인류세(anthorpocene)를 사는 인류가 맞닥뜨린 단어가, 그동안 부인해 온 죽음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인류세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문명이 홀로세를 지나, 새로운 문명에 들어섰음을 지칭하는 단어로, 저 깊은 땅아래를 파 보아도 이제는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이 발견된다는 다소 당혹스러운 현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래서 이 주제로 책들을 검색해 보니, 여러 권이 눈에 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환경 문제나, 전쟁, 가난, 혹은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이제 우리는 어떻게 죽을 건지를 생각해야 할 시간이며, 이런 생각이 철학적 인간이 되는 시작점이라고 이야기한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간, 생과 죽음이 나란히 걷는 시간, 11월에는 그래서 희망을 노래할 거야.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나는 희망을. ⓒ박정은

그러다 죽음을 늘 친구처럼 가까이 두고 생각하라고 가르쳐 온 교회의 전통은 이제 사라진 건가 하는 의문이 든다. 11월에 교회는 특별히 우리 삶의 유한성 속에서 영원을 감지하고, 깊은 삶 속으로 들어가도록 초대한다. '참회하는 죄녀, 마리아 막달레나'. 물론, 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죄녀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의 첫 증인이다라는 제목이 붙은 서양의 회화들을 보면, 한결같이 마리아 막달레나는 삶의 무한함, 죽음을 생각하면서 해골을 만지고 있다. 죽음, 그리고 삶의 무상함을 생각하는 것이 영원,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을 살펴보는 시선의 첫자리인 것이다.

최소한 그렇게 죽음을 가까이 내 곁에 두고 보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 조금만 삶에 대해 다른 각도를 취한다면, 죽음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에 함께 있는 거라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도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작품을 보면, 그림 한가운데 아래 부분에 알 수 없는 물체가 놓여 있다. 사실 인물에 대한 정교한 묘사나 그 시대의 정황,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을 상징하는 많은 사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상징들에 집중하다 보면, 아래 놓인 약간 괴이한 물체를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른쪽 아래에 시선을 두고 이 물체를 약간 올려다보면, 이것이 해골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깜짝 놀란다. 아니 이런 건강하고 자신감 넘쳐 보이는 사람들 앞에 그저 슬쩍 아무렇게 놓인 이 이상한 물체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을 상징하고, 그렇게 이 그림은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임을 살짝 보여 주는지도 모른다.

낙엽이 차곡차곡 쌓여 가고, 또 돌아오는 계절 속에 자취 없이 사라지겠지만, 그 자리에 새로 나올 잎새를 기억하며, 나무도 나뭇잎도 침묵하는 계절. 나의 실망쯤이야, 다가올 희망에 비하면야 사소하겠지. ⓒ박정은

하늘이 유난히 흐리고 잿빛인 오늘 아침에는 묘지에 가고 싶다. 아주 화려한 꽃을 놓아 주고, 아직도 여전히 그리운 크리스 수녀님께 잘 지내시느냐고 인사하고 싶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멈추고, 온라인으로 하는 회의를 하러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요 며칠, 미국은 선거 후, 많은 사람이 우울하다고, 슬프다고, 혹은 무기력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이 모임에서도, 우리는 침묵 속에서 우리의 감정들을 서로 안아 주기로 했다. 확실히 이 무거운 느낌은 내 마음에 들지 않은 대통령이 뽑혔을 때의 좌절감, 그 이상의 감정임에는 틀림이 없다. 새벽에 내게 메시지를 남긴 한 미국 친구는, "나는 충격에 휩싸였어, 더 이상 우리 국민들이 누군지 모르겠어. 희망이 없는 거 같다"라고 적었다. 

좋아하지 않는 대통령이 뽑히는 데는 이력이 난 나도, 실망을 너머 오싹한 느낌이 들 정도다. 나치 시대에 히틀러를 선택한 다수 사람처럼,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이 이런 선택을 했고, 투표 결과는 냉정하게 우리 앞에 펼쳐졌다.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과 무정부주의도 요즘 세상을 진단하는 언어라고도 하는데, 나도 그런 건가 싶다.

신앙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우리의 믿음도 가짜가 되는 시간, 어떨 땐, 물에 비친 교회의 그림자가 더 구원적으로 보일 때가 있어.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가 본 조그만 성당에는 우리를 부르는 고요한 기다림이. ⓒ박정은

그래서 이 절망과 분노의 시간을 앞에 놓고, 죽음을 생각하기로 한다. 신앙인의 관점에서의 죽음, 즉 생명과 맞닿아 있는 종말적 죽음을 생각하고 받아들일 때, 희망이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둠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움직여 가야 한다. 종국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우리는 조금씩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하느님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잘난 체하지 말고, 아주 사소한 것이 될지라도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기 위하여.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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