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 활동가들, 혐오와 배제로 얼룩진 여순항쟁지 순례
광주대교구에서 연수 열어 교구별 다양한 시도 나눔
올해 정의평화위원회(이하 정평위) 활동가 연수가 17-19일 광주대교구청 대건연수관에서 열렸다. 광주, 대전, 마산, 부산, 서울, 안동, 의정부, 인천, 전주 등 9개 교구에서 40여 명이 참여했다.
활동가 연수는 노동, 인권, 정의, 평화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1년에 한 차례 모여 어려움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다. 2011년부터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주관해 왔다.
이번 연수는 10.19 여순항쟁 주요 지역을 순례하는 탐방과 교구별 정의평화 활동에 대해 나누었다.
빨갱이 적색 공포증의 기원이 된 여순항쟁
여순항쟁 76주년을 하루 앞둔 10월 18일, 참가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여순항쟁을 비롯해 국가 폭력과 저항 운동, 반공 문화를 주로 연구하는 주철희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그 뒤 14연대 주둔지와 여수 중앙동 인민대회 장소, 마래2터널,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방문했다.
제주 4.3항쟁과 직접 연결된 여순항쟁은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라는 출병 명령에 제14연대 병사위원회가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1948년 10월 19일 밤이었다.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서는 그들이 왜 거역하고 궐기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료다.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반란’이라 했고, ‘빨갱이’란 멍에는 70여 년간 순응과 침묵을 강요했다. 주철희 선생은 “박정훈 대령 사건에서 보듯이 정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반란이요 항명이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을 반란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제주 4.3항쟁에 이어 여순항쟁은 이승만 정부에게 큰 충격이었다. 정부는 1948년 10월 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토벌 작전을 전개하면서, 1955년 4월 1일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마무리하기까지 6년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주 선생은 여순항쟁 전체 희생자가 1만 5000-2만 5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여순항쟁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공 국가로 가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국가보안법과 임시우편물단속법 제정이 대표적이다. 안보라는 미명하에 이분법적 반공 문화를 만들어 갔고, 끊임없이 여순항쟁을 왜곡, 조작하면서 ‘반란’, ‘빨갱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재생산해 왔다.
여순항쟁 관련 특별법은 2021년 6월 29일 국회를 통과하고, 7월 20일 법률 제18303호로 제정되었다. 이는 제주 4.3 특별법이 2000년 1월에 제정된 것과 비교하면 20년이나 늦은 것이다.
주철희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금지곡으로, 당대 유명 가수였던 남인수 씨가 불러 화제가 된 '여수야화'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가사에 "무너진 여수항에 우는 물새야 /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 / 우리집 태운사람 얼골좀 보자'"와 같은 여순 관련 내용을 담은 곡이다.
순례 마지막 순서였던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비는 지난 2009년에 세워졌다. 하지만 위령비 뒷면에는 아무 말도 적지 못할 만큼 여순항쟁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복잡하다.
사회교리를 어찌할까!
마지막 날 진행한 나눔에서는 각 교구 정평위가 진행하는 다양한 사업과 연대 활동을 공유했다.
활동가들이 공통으로 겪는 대표적 어려움은, 정평위의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는 사회교리 보급과 확산이다. 사회교리 강좌가 정규, 비정기 운영되는 것과 상관없이 이들의 고민은 ‘사회교리를 들어야 할 사람들은 듣지 않고, 듣지 않아도 될 신자들을 중심으로 강좌가 운영되고 있다. 그마저도 신자들의 고령화로 젊은이들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대전교구 정평위원장 김용태 신부는 기존 사회교리 학교가 특정 장소로 신자들을 불러 모아 진행한 데에서, 본당(성당)을 섭외해 신자가 많이 참여하는 오전 미사에 앞서 사회교리 강좌를 진행하는 형식으로 바꿔 시도한 사례를 소개했다. 신자들이 사회교리의 가르침을 특별 활동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불식하기 위해 반강제적인 면이 있지만, 큰 효과를 보고 있다는 점에서 활동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안동교구 정평위는 사회교리 학교를 개설하기 어려운 고령화된 농촌 교구 현실을 감안해, 본당 예비자 교리에 접목하는 방식으로 사회교리 학교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랜 기간 정평위에서 활동해 온 오일창 위원은 “위원 10명이 사회교리 담당자 양성 교육 과정으로 모임 하면서 교재를 만들고 있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그는 "본당 예비자 교리를 할 경우에 가톨릭 교리서의 ‘그리스도인의 삶’ 편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평위에서 강사를 파견해 진행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하면서, 하반기에 한 본당, 내년에 또 한 본당에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일방적으로 강의하기보다는 정평위에서 양성된 담당자와 교리반이 한 팀이 돼서 참여자들을 주체로 세우는 워크숍 방식으로 진행한다. 진행 방식은 오 위원의 소논문 '사회교리의 이해와 실천_천주교 안동교구의 실행적 사례연구'(<종교교육학연구> 제55권)를 참고할 수 있다.
인천교구 정평위는 강좌 형식의 사회교리 학교 대신 청년 대상으로 하는 탐방 프로그램을 여러 해째 운영하고 있다.
정정민 사무국장은 "청년 여행 지원 프로그램을 하다가 거기서 착안해 한국 현대사 중에서 교회가 많은 역할을 했던 5.18 역사 정도는 청년들에게 알릴 기회인 듯해, 청년 사회교리 프로그램으로 시행하고 있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그는 “보통 10팀을 지원하고, 2월에 공고해서 3월 말쯤에 전체 모임으로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다음, 4-6월 중에 팀별로 여행을 다녀온 뒤, 6월 말에 전체가 모여 결과 보고회를 갖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3명 이상이면 무조건 신청할 수 있고, 선정되면 50만 원을 지원받는다.
이어 “강좌 형식보다는 참여가 높은 편이지만 매번 10개 팀이 다 모이지는 않고, 여행 이후 모임을 지속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어 후속 과정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서울대교구는 사제 대상으로 하는 일주일간 '사회교리 강독 피정' 연례 프로그램을 몇 년째 운영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주교회의 정평위 총무 하성용 신부(서울대교구 정평위원장)는 둘째 날 여순항쟁 순례지에서 행한 미사 강론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루카 복음을 묵상하면서 정말 일꾼이 적은가를 물었다.
그는 “할 생각이 없는 인간이 많아서 그렇지 일꾼이 적은 것은 아니다. 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을 많게 만드는 역할을 활동가들이 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나도 해야겠다 하고 조금씩 넓혀 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 신부는 “일꾼을 더 보내 달라 청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는 일꾼의 역할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는 활동가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 가까이 왔다’는 말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살아가자”고 당부했다.
2025년 정평위 활동가 연수는 대전교구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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