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대나무 외교’

2024-10-18     백장현

미·중 패권 경쟁과 러·우 전쟁 등으로 강대국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국제 환경에서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나라들이 있다. 대표적인 국가가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국제 환경이 어려워진 2015년 이후에도 7퍼센트 수준의 고도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데, 국제통화기금(IMF)은 2012-22년 기간 평균 경제성장률이 6.1퍼센트로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베트남 경제는 농업 부문이 전체 성장을 견인하고 있지만 첨단 기술 제품의 비중도 크다. 한국 기업들의 진출도 활발한데,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의 40퍼센트를 베트남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엘지 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현대미포조선의 생산량도 많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미중 무역전쟁 여파로 중국에 거점을 두었던 서구 기업들의 탈중국 공장 이전으로 베트남이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애플은 2020년부터 중국에서 생산하던 에어팟을 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해 물량 절반 가까이를 생산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 탈동조화(decoupling) 전략이 베트남에게 실속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다. 2023년 베트남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타이보다 국내총생산(GDP) 점유율 대비 2배가 넘는 외국인 직접 투자를 유치했다.

베트남 도시 모습. (이미지 출처 = Pixabay)

‘대나무 외교’

베트남의 번영은 오랜 전쟁에서 승리하고 얻은 국민적 자신감, 1억 명에 달하는 근면한 인구와 젊은 인구 구성 등 여러 요인에 힘입었지만, 지혜로운 균형 외교 때문이기도 하다. 2023년 베트남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9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12월)을 모두 국빈으로 맞은 세계 유일한 국가였다. 올해 6월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방문했다.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경쟁 속에서 미국, 중국, 러시아가 베트남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베트남이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함께 아세안(ASEAN)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CNN> 방송은 “현재 세계에서 미국, 중국, 러시아 지도자들을 동시다발로 맞이할 수 있는 나라는 베트남이 거의 유일하다”고 평가했다.

베트남 외교를 <뉴욕타임스>는 “단단한 뿌리가 지탱하는 대나무의 유연한 가지”로 비유했다. 2016년 응우엔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베트남은 호치민 주석이 좋아했던 대나무처럼 굳건하고 유연한 외교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언급한 이후 ‘대나무 외교’는 베트남의 상징이 됐다. 쫑 서기장은 “베트남의 외교 정책은 강한 뿌리, 튼튼한 줄기, 유연한 가지를 가진 대나무와 같아야 한다”며 “더 많은 친구, 더 적은 적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외교 전략을 제시했다. ‘대나무 외교’는 대외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4NO’를 핵심으로 하는 유연한 외교 전략인데, ‘4NO’란 군사동맹 배제, 타국에 대항한 특정 국가 편들지 않기, 외국 군사기지 불허, 무력 불사용 등이다. 이는 1986년 ‘도이모이’(쇄신) 이후 친소련 고립 정책과 작별한 후 베트남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강대국 관계

1995년 베트남은 미국과 대사를 상호 교환함으로써 오랜 전쟁을 치렀던 숙적과 관계 정상화에 성공했다. 미국과 관계정상화로 인한 경제제재 해제는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뿐 아니라, 국제금융기관의 지원과 서구 국가들의 베트남 투자를 촉진시켜 베트남의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2023년 9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미국 관계는 중국, 러시아, 한국과 같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 미국은 비동맹 정책을 고수해 온 베트남을 미국 주도의 안보 네트워크에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 상무부는 베트남의 무역 지위를 ‘비시장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상향시켜 베트남 상품에 대한 관세를 낮추었으며, 반도체 칩 생산에서도 협력하고 있다.

베트남은 국민 감정이 껄끄러운 중국과도 실용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은 중국과 경제 협력을 추진해 2016년 이후 아세안 국가들 중 중국의 최대 교역 파트너가 되었으며, 2023년 중국은 베트남에 82억 달러를 투자해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 되었다. 이처럼 베트남은 중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지만,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관련해서는 중국이 꺼려하는 미국, 일본과의 안보 협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중국 입장에서는 베트남이 미국의 중국 봉쇄 전략에 가담하지 못하게 하는 게 중요한 외교 과제다. 베트남은 미국과 가까워질 때마다 외교적 지혜를 발휘해 중국에게 베트남-중국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올해 새로 부임한 또럼 공산당 서기장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도 중국이었다. 베트남 공산당 차원에서는 중국 공산당과 정당 간 유대에 공을 들이고 있다.

러시아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러-우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켜 서구의 러시아 제재에 불참하였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 시기 소련의 지원을 받는 등 소련과 군사 교류가 활발했다. 소련이 해체된 뒤에는 잠시 주춤했지만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거치면서 러시아와 군사 협력이 다시 강화됐다. 2018년에 러시아에게서 10억 달러 규모의 무기 공급 계약, 2019년에는 3억 5000만 달러 이상의 전투 훈련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러시아와 합동 군사훈련까지 실시할 정도다.

베트남은 천년에 가까운 중국 지배, 6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1885-1945), 5년의 일본 점령(1940-45년), 8년의 프랑스 전쟁(1946-54년), 20년의 미국 전쟁(1955-75), 중국 전쟁(1979) 등 숱한 고난을 겪었다. ‘대나무 외교’로 상징되는 균형 외교는 이 같은 고난 속에서 베트남인들이 몸으로 터득한 역사적 지혜일 것이다. 한자문화권으로서 유교적 가치관과 대승 불교의 발전,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식민지와 분단 역사 등 베트남과 한국은 공통점이 많다. 미·일에 편향된 외교와 남북관계 악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처지에서 베트남의 균형 외교를 바라보는 게 착잡하기만 하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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