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그저 두 쌍의 부모가 생겼을 뿐
이 글은 <가톨릭평론> 45호(2024년 가을, 우리신학연구소)에 실린 글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과 성가정입양원
20세기 말인 30여 년 전, 정릉에 살던 나는 출퇴근길로 아리랑고개에서 북악스카이웨이를 통해 삼청동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이용했다. 차도 안 막히고 호젓한 길이라 그 길을 애용했고, 여름밤에는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시원한 도심 속의 숲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 길로 출근하다 보면 북악골프연습장 못 미처 왼쪽에 성가정입양원이 있다. 성가정입양원은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세계성체대회 기념 사업의 하나로 ‘우리 아이 우리 손으로’라는 신념 아래 친권이 포기된 아동들이 새로운 가정에서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89년에 설립하신 국내 입양 전문기관이다.
당시 국내에는 홀트아동복지회, 동방사회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한국사회봉사회 등 큰 입양기관이 있음에도 김수환 추기경님은 왜 입양기관을 세우셨을까? 성가정입양원의 캐치프레이즈인 ‘우리 아이 우리 손으로’에서 찾을 수 있다. 성가정입양원이 설립되기 한 해 전인 1988년에 당시까지 단군 이래 최대 행사인 ‘88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이때 많은 나라가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할 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했음에도 세계 최대의 ‘아동 수출국’이라고 비난하면서 정부도 난감해졌다. 입양기관들의 비리와 부정이 연일 폭로되었고, 정부는 부랴부랴 해외 입양 축소 계획을 세우고 국내 입양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추기경은 국내 입양을 늘리기 위해 성가정입양원을 설립하셨고, 지난 35년 동안 아이 3000여 명에게 국내 부모를 만들어 주었다.
해외 입양과 ‘입양 사업’
해외 입양은 비극적인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미국GI베이비(혼혈아)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순수 단일민족 신화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한 혼혈 아동을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은 부정한 여인들로 손가락질받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부계혈통주의를 명분으로 아버지가 책임져야 한다는 가부장적 논리를 내세워 혼혈 아동을 한국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해외 입양이 시작되었다.1)
우리나라 정부는 1961년 고아입양특례법을 제정했다. 보호대상아동(부모에게서 분리되어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동)을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시설 보호의 대안으로 ‘해외 입양 활성화’를 택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우리나라가 복지에 쓸 비용이 없으니 선진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아이들도 부모 밑에서 굶주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더 나아가 정부는 1967년 법 개정을 통해 정부 허가를 받은 입양 기관이 외국 기관과 협력해 업무를 진행하며, 입양에 드는 비용을 양부모에게 청구하게 했다. 또한 해외 입양을 대행하는 기관들은 보육원을 운영하고 전문 사회복지사와 의사, 간호사를 고용하며, 입양하기 전까지 장기간 또는 단기간 위탁 보호 및 국내 입양을 제공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해외 입양은 입양 산업으로 전환되었다. 핵심은 ‘입양에 드는 비용을 양부모에게 청구하게 한 것’이다. 이 비용은 대체로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해외 입양 한 건으로 직원 한 명의 연봉에 해당한다. 공식적인 비용 이외에도 기부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해외 입양은 부모 없는 아동에게 최선의 복지라는 미명 아래 외화벌이 수단이 되었다. 또한 입양기관이 보육원을 운영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아동들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어 해외 입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해외 입양이 ‘입양 산업’이 된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정부의 정책과 산업화에 따른 사회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한국 사회의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급속한 산업 화 속에서 대가족 중심의 친족 관계 및 연대와 전통 사회가 해체되었다. 산업화 속에서 도시로 몰려든 여성 노동자들이 미혼으로 낳은 아이들(이 책임을 모두 여성 노동자의 성적 타락으로만 몰아갈 수 없다. 책임지지 않은 남성들도 문제이고 이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 사회도 책임을 져야 한다)과 경제적 이 유로 버려져 발견된 아이들은 해외 입양의 새로운 공급처가 되었다.2)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61-70년까지 7460명이, 1970-80년까지 4만 8247명이 해외로 입양되었다. 같은 시기 국내 입양은 4206명에 서 1만 5304명으로 그 수는 늘었지만, 입양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6.6퍼센트에서 24.1퍼센트로 줄었다. 대한민국은 보호가 필요한 아동의 문제를 손쉬운 해외 입양으로 해결했고 입양 산업의 그늘은 더욱 짙어졌다. 입양 산업의 절정기는 1980년대로 1981-90년까지 6만 5321명이 해외로 입양되었고 1985년 883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현재까지 약 20만 명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불법적인 일은 ‘아동의 신분 세탁’이다. 입양이 의뢰되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첫째, 친생부모와 그 가족들이 입양기관에 의뢰하는 경우로 입양기관은 친생부모와 상담하고 그 기록을 남겼다. 둘째, 다른 기관(소위 보육원)에서 입양기관이 아동을 인수하는 경우다. 두 경우 모두 해외 입양이 결정되면 새로이 ‘고아 호적’을 작성했다. 그래서 해외 입양 시장에 한국 아동은 인신매매되지 않은 가장 확실하고 깨끗한 아동으로 취급되었다. 해외 입양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뿌리찾기 노력을 할 때 가장 분노하는 것이 이 점이다. 자기의 정보가 이중으로 되어 있고 그마저 제대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두 번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을 느끼고 만다.
둘째, 정부의 직무 유기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당시 많은 아동은 유기되거나 부모를 잃어버렸다. 이런 아동들에게 부모를 찾아줘서 원가정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그 의무를 저버림으로써 많은 고아를 양산해 그중 상당수 아동을 해외로 보냈고, 그 과정에서 입양기관은 이익을 취했다. 정부는 지금도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바로 베이비박스 문제다. 베이비박스에 지난 10년 동안 2000여 명이 버려졌다. 아동을 버리는 것, 즉 아동유기는 범죄다. 하지만 정부는 베이비박스는 아동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지는 곳이라는 암묵적 이유로 적극 수사를 하지 않아서 베이비박스를 공식적인 아동유 기 장소가 되도록 방임했다.
우리들은 아주 쉽게 이렇게 말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으니 구만리 같은 너의 인생을 생각해 봐. 인생 망치지 말고 입양 보내고 새 출발해”, “아빠도 없이 애를 어떻게 키워? 너도 고생이고 애도 고생이니 입양 보내는 게 나아.” 이런 말 속에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어른들의 이기심이 가득 차 있다. 자신을 위해 아동을 버리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아동의 입장은 없다. 나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잘 키워 줄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밖에 없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모든 아동이 원가정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아동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더라도 사회적 편견 없이 성장해야 하며, 국가는 모든 가정이 아동을 키우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부모 없이 시설에서 커서 고아라고 손가락질받는 것보다 해외 가서 새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아? 잘 먹고 제대로 공부도 할 수 있고.” 정말로 그럴까? 해외 입양 인들과 이야기해 보면 대도시에서 성장한 경우보다는 소도시나 농촌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았고, 자기 지역에서 거의 유일한 유색인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생김새 때문에 일찍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2023년 유럽과 미국으로 입양된 해외 입양인 658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를 보면, 33.5퍼센트가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받았고, 13.5퍼센트는 성적 학대까지 받았다고 밝혔다. 또한 그들에게 ‘입양’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물어보면 학대, 방임 등을 많이 이야기했고 가장 많은 대답은 ‘입양의 상업화’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라면서 입양 부모에게 돈을 주고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회·경제적으로 불행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응답자의 70퍼센트는 대학을 졸업했으며 90퍼센트는 스스로 중산층으로 산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3)
?=오필승=범이
우리 부부는 겉으로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나 하자고 했지만, 속으로는 각자의 원함(이때는 이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을 풀어가기 위해 입양에 관한 이야기를 드문드문하다가 2002년 말, 입양보다는 입양을 가기 전 아이를 돌보는 일을 생각하며 가까운 성가정입양원에 상담하러 갔다. 우리 부부는 상담 과정에서 무엇에 홀렸는지 덜컥 입양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아마 원장 수녀님의 “아빠와 똑 닮은 아이가 있다”는 말에 홀렸던 것 같다. 집에 와서 당시 11살이었던 큰아이와 입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큰아이는 남동생이라는 조건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입양을 결정하고 성가정입양원에서 나와 똑 닮은 그 아이와 처음 만났다. 아이는 새 옷을 입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불편한 듯 조금 보챘고, “우리는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원장 수녀님은 아이가 6월생이라고 하시는 말에 우리 부부는 깜짝 놀랐다. 그해 초 우연히 인터넷으로 본 토정비결에 ‘6월에 식구가 는다’는 점괘를 보고 둘이 웃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아이와 만남을 운명으로 생각했다. 아이의 태명을 뭐라고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가정입양원에서는 ‘오필승’으로 불렸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엄마와 떨어져 성가정에 오면서 복지사 선생님들이 지어 준 이름이었다. 엄마의 성이 오 씨였고 ‘오~~~ 필승 코리아’ 가사의 노래가 대한민국을 뒤덮은 월드컵 열기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필승은 우리 집 둘째 아들 범이가 되었고, 출생신고(이때는 친생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입양을 보냈던 시절이다)가 늦어서 벌금을 물고 친생자로 호적에 올렸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입양 가족이 되어 버렸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가 아닌 ‘엄마 배 속에서 나온 아이’
우리 부부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입양했지만,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말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공개 입양이었다. 공개 입양은 주변에 입양한 사실을 알리고 우리 아이는 입양인이니 편견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공개 입양은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말하고(이것을 ‘입양 말하기’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입양을 받아들이게 해 입양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입양 말하기 전 단계로 매월 성가정입양원에서 열리는 자조모임에 참석해 범이가 ‘나만 입양인인가?’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했다. 그리고 범이의 8번째 생일이 지난 다음에 ‘입양 말하기’를 했다. 대략 ‘범이를 낳아준 엄마는 따로 있는데 사정상 범이를 키울 수 없어서 좋은 부모를 만나 잘 크기를 바라서 성가정입양원 에 맡겼고, 그래서 지금의 엄마 아빠를 만나서 가족이 되었다’라는 내용이다.
입양 부모는 ‘내가 너를 낳지 않았어’라고 말하기가 매우 힘들다. 특히 난임 가정은 더욱 더하다. 그래서 20여 년 전 국내 공개 입양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가슴으로 낳았다’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가슴으로 낳았기에 입양한 아이는 내가 낳은 자식이고 내가 유일한 부모라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가슴에서 나온 아이는 없다. 모두 엄마 배 속에서 나왔다. 입양인들도 엄마 배 속에서 나왔다. 단지 입양 엄마의 배 속에서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입양인들은 자신에게 생물학적 부모와 키워 준 두 쌍의 부모가 있다는 사실 받아들이고, 그것이 입양인의 정체성을 갖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또한 입양 부모는 마음속에 있는 자신만의 목소리와 마주하면서 애도와 치유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범이는 ‘입양 말하기’ 이후 때로는 매우 거칠게, 때로는 감상적으로, 때로는 이성적으로 자신의 입양 감정을 표현했다. 범이의 널뛰는 시간을 우리 부부는 어찌어찌 견뎌 냈고 범이는 중고등학교 약 4년을 매주 성가정입양원에 가서 아이 돌봄 자원봉사를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나에게 입양은 두 쌍의 부모가 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입양을 정리했다. 범이는 입양 관련 토크쇼에도 출연했고 나와 방송에도 나가며 입양을 숨기지 않았다.4)
그동안에 범이 엄마는 상담심리학을 공부했고, 입양인의 심리뿐만 아니라 입양 부모의 심리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도 귀동냥하게 되었는데 내 안에 내가 받았던 상처와 그로 인해 나의 원함이 생겼고, 그것이 아이들 양육 태도에 투영된다는 점을 배웠다. 우리 부부는 이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결국 내 마음 안에 자리 잡았던 나의 억울함과 마주하며 애도하는 과정이었다. 우리 가족의 입양은 이처럼 나를 만들어 가고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20여 년간 입양 가족들과 지내면서 확실하게 느낀 것은 2012년 이후 입양한 가족은 이 과정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친생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고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서 호적 정정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입양과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입양 관련 교육도 많이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범이가 태어날 때부터 입양되기 전까지 9개월 동안의 모습은 필승이를 예뻐해 주셨던 수녀님과 보육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공백이 채워졌다. 이제 범이에게 남은 과제는 낳아 준 엄마를 만나는 일이다. 낳아 준 엄마를 만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나 포기할 일도 아니 다. 범이가 낳아 준 엄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낳아 준 엄마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마을에 가서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기대도 해 본다. 범이를 낳아 준 엄마가 범이를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1) 1954년 외국에서 보낸 초기 기금과 보사부의 관할 감독 아래 혼혈아를 미국 및 서양 참전국으로 해외 입양을 보내기 위해 ‘아동양호회’가 설립되었다.
2) 신필식, '한국 해외 입양과 친생모 모성, 1966~1992',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20.
3) '‘입양인 3명 중 1명이 학대 경험’연구가 말도 안 된다고요?', <프레시안>, 2023.4.22.
4) '입양, 국가는 없었다', <KBS> 시사기획 창, 2021.5.16.
반철진
역사를전공하고30여년을학생들을가르쳐왔다.2003년부터성가정입양원입양부모자조 모임인 참사모에서 활동해왔다. 2021년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입양의 공공성 강화와 진실규명을 위 한 연대회의’를 만들어 원가족 보호와 모두에게 안전한 입양, 해외 입양인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노 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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