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첫 번째 일은 기도입니다': 관상 수도회의 삶
미국에서 새로 등장하는 공동체 2
(댄 스톡먼, <NCR> GSR 담당 기자)
추운 겨울날 가르멜의 여왕이라는 이름의 산비탈에 우뚝 솟은 낙엽송과 소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약 120센티미터나 눈이 내렸지만 대부분은 지난주에 녹아 가르멜수녀회까지 이어지는 가파르고 바위투성이인 길을 오를 수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에는 은둔처와 공동체 건물이 모여 있고, 중앙에 성당이 있는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동상이 바위와 나무, 그리고 그 사이로 나 있는 산책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공동체 건물 안에서는 장작을 때는 작은 화목 난로가 있습니다. 레슬리 런드 수녀는 인디애나폴리스 가르멜수녀회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쁜 수도원의 삶은 가르멜수녀회의 소명, 즉 은둔의 삶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습니다.
이전 공동체는 빠르게 쇠락했습니다. 수도원을 지탱할 만큼의 성소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후반 런드 수녀는 함께 수도생활을 하던 동료들이 모두 수도생활을 포기하는 바람에 로드 아일랜드 배링턴에 있는 가르멜수녀원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런드는 낸시 카살레 수녀를 만나 은둔 생활에 대한 꿈을 키워 가기 시작했습니다.
카살레 수녀도 수도원 담벼락 안에 갇혀 사는 방식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성녀 데레사의 생각을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수도자들이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가난하게 사는 대신 수도원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습니다.
결국 둘은 정착할 곳을 찾아 전국을 차로 떠돌게 되었습니다. 런드 수녀는 워싱턴주 스포캔에서 자랐고, 카살레 수녀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두 지역 중간 어딘가에서 사명을 실현할 만한 장소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1990년 스포캔에 영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스포캔교구 교구장 윌리엄 스킬스타드 주교가 그들을 교구에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미사를 드리러 갔던 본당(성당)에는 가르멜회 창립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그린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포캔에 도착한 지 2주 만에 북쪽으로 약 45분 거리에 있는 산속의 80에이커(32만 제곱미터)부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은둔 생활에 필요한 고독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기부금으로 땅도 살 수 있었습니다.
카살레 수녀는 자신이 직전까지 살던 공동체를 떠났던 일을 죽음에 직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수도회를 떠나는 것이 제가 너무 바랐던 일이라서 괴로웠어요." 하지만 런드 수녀의 말에 따르면 카살레 수녀는 자신이 살던 공동체와는 여전히 가까이 지내고 있고, 그녀와 같이 살던 자매 가운데 절반도 그녀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1993년에 스킬스타드 주교는 ‘마리아의 가르멜 자매회’를 공식 인가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CARA에서 발행한 2017년 신생 공동체 목록에 포함된 159개 공동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수녀들이 수도승으로서뿐 아니라 은둔자도 되길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 우리는 정말로 가르멜산의 본래 삶과 같기를 바랐습니다. 우리의 꿈은 은둔하며 살기를 바라는 이들이 이 수도원을 가득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왔지만 대부분은 몇 달 또는 몇 년만 머물다 떠났습니다. 지금은 70대인 룬드와 카살레 두 수녀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룬드와 카살레는 이곳에서 보낸 30년을 돌이켜보며 후회는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런드 수녀는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한 치유자로 산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고독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여 그들이 인생에서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지 식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전환과 치유 - 이것이 하느님이 이곳을 만드신 이유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리라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전 발레 무용수였던 카살레는 이제 전기톱을 손에 쥐고 사는 산림 관리인이 다 되었습니다. 룬드는 작가이자 성녀 데레사와 기도 주제에 정통한 명망 있는 강사입니다. 룬드 수녀는 도로를 정비하고 쓰러진 나무를 싣고 험난한 지형에서 다른 작업을 완료하기 위해 트랙터를 운전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카살레 수녀는 이곳에 그들이 터를 잡기 전에도 여러 번 벌목이 있었기 때문에 나무를 그저 보호하는 데 그쳐선 안 되고 관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노력은 결실이 있었습니다. 2003년에 이곳은 ‘올해의 주(state) 야생동물 서식처’로 지정되었습니다.
기부는 필요할 때 꼭 들어오는 듯합니다. 자매들이 은둔처를 지을 때 진 빚을 탕감해 준 가톨릭 신자 목수들, 콜럼버스 기사단이 ‘스윗 캐리엇(트럭 이름)’을 수리해 준 일이 그 예입니다. 두 수녀가 이 땅에 정착하고 처음 2년 동안은 전기와 온수를 쓸 수 없었습니다. 화목 난로, 석유 등잔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고독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의 가르멜 자매회’는 이것이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찾는 데 필수적이라 말합니다.
"고독과 외로움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독은 매우 충만합니다. 고독은 제 인식을 고양시키고, 제가 듣고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반면 외로움은 고통입니다. 공허함입니다. 그것도 무서운 공허함입니다."
카살레 수녀는 사람들이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는 데 필요한 고독을 누리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저는 이것이 제 영적 여정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고독이 춤과 같았습니다. 발레 바를 잡고 발가락 끝으로 서는 것은 정말 힘들지만, 그것을 터득하면 끝내 자유가 찾아옵니다. 제겐 고독보다 더 신나는 일이 없습니다. 고독이 없었다면 저는 고독의 풍요로움, 즉 고독이 제게 열어 주는 깊이를 결코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런드 수녀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섬세하신 분이니까요.”
"하느님은 주로 침묵과 고독의 상태에서만 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침묵과 고독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뵐 수 있습니다. 가르멜회 수사들은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지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개인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나는 선물이다'
‘생명의 자매회’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수도회 복음화 담당 마리 베리타스 수녀가 말합니다.
"저는 사람을 선물로 여기는 것이 정말 혁명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먼저 자신의 존엄함과 '나는 선물이고, 그게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안다면, 다른 사람을 선물로 여길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각자의 삶을 선물로 여길 때 인생은 더 이상 일회용이 아닙니다.
마리 베리타스 수녀는 사람들이 종종 수녀들의 삶과 사도직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공동체에 찾아왔다가 놀라 돌아갔다고 말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1991년 설립 이후 빠르게 성장해 현재는 종신서원자가 116명, 입문 양성기에 있는 수녀가 49명이나 됩니다.
"우리 공동체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아름다움과 존엄성입니다. 우리는 관상적 활동가이므로 첫 번째 임무는 기도입니다. 우린 매일 4시간 30분을 기도로 보냅니다."
그녀는 우리 회 회원들이 일 년에 몇 차례 낙태시술 병원 밖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이것이 수도회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주 사도직은 임신 중이거나 위기에 처한 여성을 돕고, 낙태를 한 여성들에게 희망과 치유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치유 사도직입니다."
맨해튼에서 북서쪽으로 약 1시간 떨어진 뉴욕주 서펀에 있는 이 공동체는 ‘Holy Respite Mission’이라는 공동체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임신한 여성들이 임신 중일 때, 출산 후 수녀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마련했습니다.
이 수녀원은 또한 매년 700명 이상의 임산부에게 전화 상담을 하고 있고 국제 피정 센터, 도서관도 운영합니다. 낙태를 경험한 여성을 자비의 여정에 동행하고, 생명 문화를 전파하며, 뉴욕대교구 가정사목부와 생명위원회에도 수녀를 파견합니다.
마리 베리타스 수녀는 공동체가 기도에 중심을 두는 이유는 수도회 창설자 존 오코너 추기경이 1975년에 이 사회의 깊은 신앙 위기는 마르코 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것처럼 "기도와 금식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으신 데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
'여러분은 우리보다 더 베네딕토회 회원답습니다’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회원 13명으로 구성된 성 베네딕토-피터샴 수도회는 1975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이 수도회의 뿌리는 1940년대 하버드대학교 가톨릭 학생회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원장 메리 엘리자베스 클로스 수녀는 이 모임이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했는데, 그때 몇몇 졸업생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작은 베네딕토회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1979년에 그들은 영국의 스탠브룩 수도원에서 베네딕토회와 교류하다 1984년에 수도회를 창립했습니다. 1년 후 보스턴에서 목가적 환경을 가진 매사추세츠 중부 피터샴으로 이사했고 200에이커(약 81만 제곱미터) 숲이 우거진 이곳에 작은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수도원 주변에는 주에서 관리하는 숲을 포함해 1만 에이커의 보호 구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숲을 남자 베네딕토회 공동체인 세인트 메리 수도원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두 수도회는 따로 매일 같은 시간에 미사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바칩니다.
이 수도회는 처음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다 중간에 작은 빵집도 운영했는데 둘 다 기도 생활에 많은 장애가 되었습니다. 베네딕토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7시간 성무일도를 바쳐야 하는데 이 기도 대부분이 그레고리안입니다.
이제 13명 회원은 치즈를 만드는 공장을 열고 싶어 하지만 그러려면 자매 한두 명이 더 필요합니다. 치즈는 유통기한이 길어 빵처럼 매일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클로스 수녀는 "이곳 수녀들은 환상적일 만큼 치즈를 잘 만든다"고 말합니다.
1985년 입회한 클로스 수녀는 창립자가 자신들이 베네딕토회 회원이 될 수 있을런지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베네딕토 규칙서는 우리 공동체와 매우 친숙했습니다. 우리 회 회원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성무일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베네딕토회 수사와 수도원장들이 우리를 보러 오곤 하는데 그들은 '여러분은 우리보다 더 베네딕토회 회원답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박문수
가톨릭 신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