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중국에 다시 서다 4
“이날, 해 뜨기 15분쯤 전이었다. 나는 하늘에서 본 적이 없는 현상을 보았다. 프랑스에서는 들어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동양, 특히 시암(Siam)과 중국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이 두 나라에서 나는 스무 번도 넘게 그 현상을 지켜보았다. 아침 혹은 저녁에, 바다일 때도 있었고 육지일 때도 있었다. 심지어 북경에서도 본 적이 있다.”
- 부베의 “여행일지”(Journal des Voyages à Canton), 1693년 7월 25일의 서술. (printed in: Jean-Baptiste Du Halde, “Description de l'empire de la Chine... Ⅰ”, Paris, 1735, p.98)
부베, 신기한 빛을 보다
1693년 여름이었다. 7월 25일, 정원현(定遠縣)을 출발해 점부역(店埠驛)까지 가는 일정이었다. 오늘날 안후이성(安徽省) 허페이시(合肥市) 근처다. 이날 부베(Joachim Bouvet, 白晋, 1656-1730) 일행은 3개의 역참을 통과했다. 15리우(lieue), 대략 6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였다. 적당한 일정이었다. 그들은 매일 그 정도 거리를 이동하고 있었다. 북경에서 광동(廣東)까지 가는 길이었으니 족히 두 달은 걸릴 것이었다. 딱히 어려울 것도 애써 서두를 일도 없었다. 호위대가 일행을 옹위하고 있었고, 운하와 역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목적지는 프랑스 파리였다. 광동은 그저 거쳐 가는 곳이었다. 배를 타야 했고 항구가 거기 있었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나는 땅 모두가 황제의 영토였고, 부베는 황제의 특사였으니까. 그래도 유럽인 선교사에겐 제국의 모든 길이 생경했을 터. 부베는 광주로 가는 여정을 틈틈이 기록했다. 경로와 이동 거리, 특기할 만한 일을 적었다. 날짜별로 쓴 일지였다. 때론 간단했고 때론 꼼꼼했다. 7월 25일에도 어김없이 기록이 있다. 일행이 그날 지난 곳, 안후이성 허페이 인근은 광주로 가는 여정의 딱 절반이었다. 그리고 그 아침, 부베는 하늘에서 신기한 빛을 보았다. 해 뜨기 15분쯤 전이었다.
(동영상 출처 = 유튜브 채널 Night Lights Films - Adrien Mauduit)
신기한 헤일로
1882년 11월, 과학 잡지 <네이처>(Nature)에 기사 하나가 실렸다. ‘신기한 헤일로’(A Curious Halo)라는 제목이다. 서가회 천문대(徐家匯天文臺) <월보>(Monthly Bulletin)에 이미 실렸던 글이었다. 5년 전인 1877년 8월호였으니, <네이처>의 기사는 그걸 요약해 다시 게재한 것이었다. 글쓴이는 마르크 드슈브랭(Marc Dechevrens, 能恩斯, 1845-1923)이다. 예수회 신부이자 상해 서가회 천문대(l’Observatoire de Zi-Ka-Wei) 초대 책임자였다. 그는 상해에서 관찰한 현상을 소개했다. 9월 초 동트기 직전, 지평선 위로 뻗어 나오던 거대한 띠 모양의 빛줄기였다.
황도광(黃道光, zodiacal light)이었을 것이다. 황도(黃道, ecliptic)는 태양이 지구 하늘 위에서 1년 동안 이동하는 경로다. 그 길을 따라 나타나는 빛의 띠를 황도광이라 한다. 어두운 하늘에서 거대한 원뿔 빛기둥 모양으로 나타난다. 태양 빛이 자잘한 우주 먼지에 부딪쳐 산란하는 현상이 원인이다. 해 뜨기 직전, 혹은 해가 진 직후에 지평선 위에서 나타난다. 드슈브랭은 그즈음 황도광 관찰에 열을 올렸던 것 같다. 그의 보고는 새롭지 않으나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중요한 연결 고리 하나가 담겨 있는 까닭이다. 예수회 옛 선교사의 흔적과 그네들이 관찰했던 중국의 하늘이다.
드슈브랭은 글에서 200여 년 전 부베의 관찰을 길게 인용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경험을 그 위에 포갰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옛 예수회 천문학자가 설명한 현상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서가회에서 수백 번 목격한 것과 동일합니다.” 1693년 여름, 부베가 안후이성에서 보았던 바로 그 현상이었다. 옛 선교사의 관찰을 19세기 예수회 천문학자가 다시 불러낸 것이다. 서가회 천문대장의 이름으로 말이다.
천문, 기상, 그리고 옛 선교사들
중국 근대 기상학에서 예수회의 역할은 기억할 만하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다. 대개 옛 시대의 예수회 천문학자만을 떠올린다. 황제 곁에 있던 선교사들 말이다. 아담 샬과 그의 제자 페르비스트는 걸출했다. 그들은 흠천감(欽天監)에서 일했다. 천문과 역법을 맡아 보는 관청이었다. 두 사람은 그곳 수장을 이어서 맡았다.
제국에서 별의 운행을 관측하는 건 더없이 중요했다. 황제는 천자(天子)였고, 세계는 그를 통해 구현되었다. 천체의 움직임은 곧 하늘의 뜻이었다. 천자만이 그 뜻을 해석할 수 있었다.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으로 시간과 절기를 정했고, 일의 순서와 형태를 만들었다. 천자만의 권한이었다. 흠천감의 일이기도 했다. 제국의 천문대에서 샬과 페르비스트는 으뜸자리였다.
두 사람의 명성을 이은 이들이 있다. ‘국왕의 수학자들’(Mathématiciens du Roi)이다. 루이 14세가 보낸 프랑스 예수회 사제들이었다. 1688년 북경에 당도하자마자, 그들은 관측기구부터 꺼냈다. 그들에게 과학은 신학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하느님의 세계를 이해하는 무수한 단서였다. 그들은 다양하고도 광범위한 관측 기록을 남겼다. 특히 기상 관측은 그들의 일기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張誠, 1654-1707)이 러시아 국경에서 쓴 122일 간의 일기(1688)에도, 강희 30년(1691) 북경 하늘을 관측한 부베의 일기에도, 그날그날의 기상 상황이 있다.
고빌(Antoine Gaubil, 宋君榮, 1689-1759)의 기록은 오늘날의 ‘기상학’으로 부를 만하다. 그는 건륭 8년(1743)부터 북경의 기상을 세밀히 관측했다. 풍속과 풍향, 온도와 기압, 대기와 구름의 상태 등이었다. 고빌의 뒤를 이은 이가 19세기 상해에도 있었다. 첫 주자는 클로드 고틀랑Claude Gotteland, 南格祿, 1803-56)이었다. 예수회 해체(1773) 이후 중국에 첫발을 디딘 예수회원이다.
‘국왕의 수학자들’처럼 고틀랑 역시 물리학자였다. 그도 옛 선배들처럼 학자의 선교를 꿈꾸며 상해에 왔다. 과학 활동으로 선교하는 꿈 말이다. 그의 계획에는 처음부터 천문대가 있었다. 현실은 크게 달랐다. 사목활동만으로도 몸이 부서질 지경이었다. 천문대는 그 후 30년이 지나서야 들어서게 된다. 서가회 천문대다. 상해 최초의 근대식 천문-기상 관측소였다.
서가회 천문대의 시작
1872년 8월, 서가회 예수회는 일련의 과학 연구 프로그램을 수립했다. 강남대목구장 랑기야(Adrian Languillat, 郎懷仁, 1808-78) 주교, 강남선교회 장상 델라 코르트(A. Della Corte, 谷振聲, 1819-96) 등이 결정한 사안이다. 4개 분과로 구성된 과학위원회를 설치하고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때 천문-기상 관측소 건립도 함께 논의되었다. 앙리 르 렉(Henri Le Lec, 劉德耀, 1832-82)과 콜롬벨(Auguste Colombel, 高龍鞶, 1833-1905) 신부가 그 일을 맡았다. 향후 연구될 모든 천문 기상 자료는 ‘월보’로 만들어 출판하기로 했다.
이듬해 2월, 서가회 서쪽 편에 관측소 건물을 지었다. 서광계(徐光啓) 묘소 부근이었다. 아담한 규모였다. 9월에 완공되자 관측 활동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기초적인 관측만 했으나 곧 입소문을 탔다. 기상 정보를 매일 공개했기 때문이다. 상해 최초의 기상 정보 서비스였다. 1877년 1월에는 애초 계획대로 <월보>를 발간했다. <서가회 자기 기상 관측소 월보>(Bulletin mensuel de l’observatoire magnétique et météorologique de Zi-Ka-Wei)였다. 드슈브랭이 초대 책임자를 맡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관측소 활동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는 시점이다.
지구 자기학자 드슈브랭
서가회 관측소(l’Observatoire de Zi-Ka-Wei)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쓰는 사람마다 한자 표기가 달랐다. 관상대(觀象臺), 천문대(天文臺), 혹은 기상대(氣象臺)라 하기도 했다. 이름이 많은 건 그만큼 하는 일이 많았다는 뜻이다. 천문과 기상뿐만 아니라 지구 물리학 연구도 활발했다. 지구 자기, 지진, 중력 등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연구였다. 1887년부터는 서가회의 관측 자료가 <프랑스 기상학회 연감>(l’Annuaire de la Société Météorologique de France)에 실렸다. 이후 10년 동안, 서가회가 내놓은 지구 물리학 논문은 21개에 달했다.
그 중심에 드슈브랭 신부가 있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한 이다. 지구 자기학이 그의 전공이었다. 자기 관측소를 설립이 그가 서가회에 파견된 이유였다. 당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자기 관측소가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했는데 그마저 운영이 불안정했다. 동아시아 관측소가 꼭 필요했다. 두 사람의 조언과 추천이 있었다. 스승이었던 로마의 세치(Secchi) 신부, 영국 스토니허스트(Stonyhurst)의 페리(Perry) 신부였다.
1873년 11월 29일, 서가회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관측소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1877년부터 10년 동안 초대 관측소장을 맡았다. 1880년에 내놓은 연구서 “서가회에서의 지자기”(Le magnétisme terrestre à Zi-ka-wei)가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1889년에 그는 건강이 나빠져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의 자리를 슈발리에(Stanislas Chevalier, 蔡尚質, 1852-1930) 신부가 이었다. 그는 지리와 기후에 관심이 많았다. 긴 답사 여행 후에 일련의 양쯔강 상류 지리 연구서(1879-99)를 출판했다. 또한 폭풍과 몬순, 기압 변화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썼다. 그는 관측소의 연구 영역을 천문학으로 확장했다. 1901년에 이중 망원경(double télescope)이 도입되고, 상해 남서쪽인 사산(佘山) 정상에 별도의 천문대가 세워졌다. 기존 서가회 관측소 건물도 새로 건축했다. 명실공히 서가회 ‘천문대’가 된 것이다.
태풍, 그리고 기상 정보 서비스
서가회 천문대가 알려지기 시작한 건 의외의 사건 때문이었다. 1879년 7월 31일, 강력한 태풍이 상해를 강타했다. 당시 피해는 매우 컸다. 이를 계기로 24시간 태풍 감시단이 만들어졌다. 프랑스 조계국과 상해시 정부의 결정이었다. 서가회 천문대가 그 일을 맡았다. 1882년부터 태풍 관측 업무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천문대는 상해와 인근의 모든 신문에 통지문을 보냈다. 그날의 모든 기상 데이터와 이튿날의 예보까지 제공했다. 표준 시간도 아울러 공지했다.
반응은 놀라웠다. 소식은 로버트 하트(Robert Hart, 1835-1911)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중국 해관(海關) 책임자였다. 개항장에 둔 세관이었다. 그는 중국의 모든 해관 사무소에 지시했다. 관측소를 설치하고 모든 데이터를 서가회에 보내라 했다. 이로써 중국 연안 개항장의 기상 자료가 모두 서가회에 집중되었다. 천문대는 신속히 자료를 분석하여 주요 기관과 신문에 제공했다. 매일 두 차례씩 이어진 일기예보였다. 1914년부터는 무선 전신 서비스도 가능해졌다. 이로써 기상 정보는 선박에도 전해졌다. 하루 두 차례, 중국 연안을 지나는 모든 선박이 서가회의 발표를 주시하게 되었다.
서가회 천문대는 국제적인 기상 네트워크의 일부였다. 북으로는 시베리아, 남으로는 마닐라와 인도차이나, 동으로는 태평양 사모아섬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서가회에서 하루에 받는 기상 전보만도 수백 통이었다. 발신하는 양도 그에 못지않았다. 무료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각국 전보 회사가 기상 전보는 무료로 취급했단다. 공익 서비스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모두를 위한 연구
서가회의 광범위한 기상 정보는 곧 성과로 이어졌다. 1895년에 서가회는 중국 최초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기상 지도를 작성했다. 또한 총 620개의 태풍 경로를 연구했다. 1893년부터 1920년까지 아시아의 바다를 통과한 태풍이었다. 이 연구는 아시아 태풍 연구의 한 획을 그었다. 천문학과 지구 물리학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연구 성과가 있었다.
서가회 천문대의 사제들은 모두 전문 과학자였다. 드슈브랭, 르제(Pierre Lejay, 雁月飛, 1898-1958), 게르지(Ernest Gherzi, 龍相齊, 1886-1973) 등은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와 연계되거나 교황청 과학원의 회원이었다. 그들은 서가회 천문대장이기도 했다. 그 옛적 흠천감과 ‘국왕의 수학자들’처럼 말이다.
황도광을 관측한 글에서, 드슈브랭이 부베를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다. 자신들의 연원에 관한 희망과 고백이었으리라. 19세기 서가회가 그 옛적에 닿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해 뜨기 15분 전에, 부베가 하늘에서 마주한 빛기둥처럼 말이다. 오늘날, 그 빛은 희미하나 때로 명징하다. 19세기 중국의 예수회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빛도 그렇다. 희미하지만 때론 아주 명징하다.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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