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성월에 배론성지에 서서

2024-09-09     조욱종

순교자 성월에 배론성지에 서서
- 나를 그리스도인이라 불러 다오

원주교구의 배론성지는 한국 교회의 종합판이다.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체적으로 세운 교회인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서 배론성지는 그 뿌리인 평신도로부터 시작하여 사제와 수도자를 다 품고 있으니 신앙의 종합판이라고 불러야겠다.

배론에는 평신도, 사제, 수도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다. 배론은 최초의 신학교 자리였으며 최양업 신부의 묘지가 있고, 원주교구의 성직자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가 하면, 초기 교회의 평신도 선구자 중 한 분인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 현장인데다, 아울러 평신도 묘역을 야외 봉안당으로 조성하여 평신도의 자리매김을 강조하여 준다. 그들 모두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쇄수도원’이 경내에 있다. 이렇듯 사제와 평신도와 수도자가 묘한 방식으로 어우러져 함께 모여 있는 셈이다.

배론성지에는 배씨 4형제 신부들의 노고도 깊이 스며 있다. 큰형인 배은하 신부가 18년 동안이나 배론성지의 관장을 맡아 작은 골짜기를 놀라운 모양새로 변화시켰고, 둘째인 배달하 신부가 배론성지 내 기도학교 건설과 운영을 맡아 일하다가 얼마 전에 하느님 품으로 들어갔다. 굳이 이 형제 신부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들이 순교를 무릅쓰고 몇 대째 신앙을 지켜온 집안의 후예들이기에 그러하니, 그들을 사제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신앙의 종합판인 배론성지에서 “나를 그리스도인이라 불러 다오”라는 명제를 떠올린다. 우리는 사제이거나 수도자이거나 평신도이기 이전에 모두 그리스도인이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사제의 직무를 받았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수도자의 삶을 살고자 하였다. 하느님을 평등과 자유를 통하여 인식하고 체험하면서 그 감동으로 드디어 세례를 받고 나아가 순교의 길을 걸어가신 우리 신앙 선조들, 그들은 선교사들을 받아들여 계급적 지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에 자발적인 존경심을 품고 함께 교회를 건설하여 갔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본분이 퇴색하면서 계급적인 의식이 만연하니까, 그 해결을 위한 노력으로 문제의 근원을 사제중심주의에서 찾기도 하지만, 이 모두 예수님의 권위를 권력으로 오해하고 잘못 사용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러니 이런 교회의 세속화라는 원인 제공에서는 사제나 수도자나 평신도 모두가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공동의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남자 수도회에서는 곧 모든 수사가 공동체의 원장 직책을 맡을 수 있도록 한단다. 그 말은 수사 신부만이 아니라 평신도 수사도 공동체 원장을 맡을 수 있다는 뜻이다. 늦어도 한참 늦은 결정이지만 환영한다. 수도회는 남자 수도회든 여자 수도회든 그 이전부터 서로를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불렀다. 평신도라는 호칭은 계급적이다. 평등 안에서 새 생명을 받게 된 그리스도인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수도회는 늦고 느리지만 조금씩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교구들에서의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순교자 성월에서 배론성지에 서면 나의 친구 배달하 신부를 찾으러 성직자 묘역으로 올라가지만, 동시에 나는 교회의 미래를 찾아 고민하며 토론하던 시절의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싶다. 어떤 이는 묘지에 묻혀 있고 어떤 이들은 은퇴하여 뒷방으로 옮겨갔지만, 그래도 고민과 토론은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미래는 젊은이들에게 맡겨야 할까 보다. 사제나 수도자나 평신도로서가 아닌 하나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나는 공존과 협력의 길, 하느님나라로 나아가는 길을 향해 더 성장하는 길을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견하면 참 좋겠다.

ⓒ조욱종

순교자 성월에 통영 거리에서

통영에서 중앙시장과 서호시장을 지나 통영대교를 건너거나 해저터널을 지나서 통영중학교와 통영고등학교 위로 봉수골 용화사 가는 길을 만난다. 올라가는 길에는 음식점도 많고 찻집도 많은데 그중의 국수집에 들어가면 제목도 없는 이런 시가 벽에 적혀 있다.

꽃잎이 날려서
바람이려니 했더니
그게 세월이더라.

꽃보다
꺾어온 아이가
더 예쁘고
바쁜 주인 대신에
빈그릇 치우고 탁자 닦아주는
할머니 손님이 더 예쁘다.

마음의 연결들은 복제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그러나 복제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통영이니까 윤이상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가 고민하고 행동한 그들의 진정성과 예술 세계를 생각하면 어찌 그냥 읽어 젖히고 지나칠 수 있겠는가. 평범한 시민들이 이렇게 마음을 닮아 있음을 목도하면 말이다. 진정 복제해야 할 것들이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늘 우리를 괴롭힌 실체는 돈의 복제였다. 인간성의 복제여야 함에도 인간 세상은 시대를 넘어 언제나 돈의 복제가 지배하였다. 돈 때문에 배신을 하고 변절도 하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곤 했다. 돈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며 변신하고 있는 세상에서, 신앙으로 하느님 때문에, 이웃 형제들 때문에 순교한 조상들을 생각하는 이 순교자 성월에 낙엽처럼 날리는 세월을 보며 마음의 복제를 떠올린다. 유한하지 않는 영원성을 일깨워 주는 이 순교자 성월에.

조욱종 신부(사도요한)

부산교구 은퇴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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