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원하는 자에게, '안중근은 살아 있다' 3
만주 평화 순례 -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흐르는 강변에서 마주한 이야기
이번 순례는 강에서 시작해 강에서 끝맺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둘째 날 아침 일찍부터 압록강으로 갔다. 안개가 자욱했다. 유람선을 지나는 길 따라 우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땅이고, 좌측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땅이었다. 중국과 조선의 합의로 타국의 땅에 들어서지만 않으면 강을 자유롭게 다니며 어업도 할 수 있다. 북녘은 헤엄쳐 갈 수 있을 듯 가까웠다. 소리쳐 서로를 부를 수 있을 거리였다. 부러움과 분노 이어서 올라오는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앞을 가린 안개가 야속했다. 최근 닥친 수해로 압록강 물은 흙빛이었다. 순례단만이 탑승한 배는 말없이 강을 갈랐다. 간간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초소가 보였다. 일하는 것은 힘들지 않을지, 초소에 선풍기는 있을지, 근무하는 친구는 어릴까? 군 복무 기간이 길다고 하던데.... 많은 걱정과 궁금증이 일었다.
거대한 수풍댐을 마주하고도 어떤 감탄사도 뱉지 못했다. 다만 안개 속 교각을 나는 새들이 부러웠다. 너희는 날아갈 테니 내 인사를 대신 전해 달라며 스스로도 우스운 말을 자꾸 건넸다. 배가 머리를 돌리고 날이 밝아지면서 안개도 걷혔다. 거짓말처럼 조선 동포들이 눈에 보였다. 자전거를 타고 트럭을 타고 사람들이 지나갔다. 소박한 마을과 정성 들인 개간지가 보였다. 물고기를 잡으러 나온 주민들도 늘어났다. 손을 뻗어 인사했다. 거기 정말 있냐고, 우리가 보이냐고, 내가 그대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보이냐고 답 없는 문제를 풀 듯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손을 흔들어 준 어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마웠다.
단동시 압록강에는 끊어져 건널 수 없는 다리, 압록강 단교와 청성교 단교가 있다. 전자는 미국이, 후자는 일제가 세웠다. 두 다리는 6.25전쟁 중 폭파됐다. 미국이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세웠던 다리를 직접 파괴했다. 중공군이 한반도로 넘어오는 경로와 물자 수송을 차단하기 위한 명분을 들었으나 또다시 자신들의 마음대로 결정한 처사였다. 1950년 11월 폭격기 100기가 날아와 압록강철교를 폭파했다. 다음 해 3월 청성교는 6차례에 걸쳐 전투기의 폭격을 받았고 잔인하게 잘려 나갔다. 그 다리는 그냥 다리가 아니었다. 중국과 우리 조국의 평범한 일상이었고 꿈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은 마라톤 선수가 되기 전 이 다리를 건너며 단동에 있는 일터에 다녔다. 달리는 것을 좋아했던 소년은 압록강을 건너며 자랐다. 많은 독립운동가도 다리를 건넜다. 이회영의 일가가 전 재산을 처분해 조국을 떠날 때를 이 다리는 기억한다. 다리를 폭격하면서도 미국은 잔머리를 썼다. 중국의 눈치를 살피며 조선 쪽 다리를 부순 것이다. 어찌 됐든 이곳은 관광 명소가 됐고 중국은 이득을 보고 있다. 우습게도 슬픔도 소비된다.
단교를 바라보며 압록강을 유람했다. 이번에도 한쪽에는 중국이, 반대쪽에는 조선이 보였다. 중국의 단동시는 고층 빌딩으로 자본주의의 위용을 보여 주었다. 낮은 지붕에 몇 안 되는 조선의 집들이 듬성듬성 있었고 흡사 폐허처럼 보였다. ‘널린 옷가지가 보인다, 사람들이 보인다, 아무도 안 산다’ 등등. 모든 것이 추측이고 상상이었다. 아는 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문에서 두만강 건너편 조선을 바라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을 떠난 남편의 부고를 듣고 통곡하던 여인이 다음 날 두만강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실화를 담은 ‘눈물 젖은 두만강’의 사연을 들었다. 더 가까이 가고 싶었으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지당했다. 그 잘난 돈이 있어도 불가능했다. 들어갈 수 없었다.
압록강 단교 위에서 들었던 행인의 말이 떠올랐다. “구경 잘-했다” ‘구경이라고? 여기가 동물원이야? 그들이 짐승이야 뭐야?’ 지나간 이를 험담하면서 담아 둔 화를 쏟아냈다. 그러다 문득 ‘아.. 나도 지금 구경 중인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대도 유람하며 자신들을 향한 시선을 느낀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을지 모른다.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구경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왜 만날 수 없으며 그저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왜 서로를 모르고 살아야 하는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가?’
세례자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예수는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물러갔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그 강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의로움을 함께 이루고 싶었던 동지를 잃은 예수에게도 바람이 일었다. 로마의 끄나풀이 된 왕이 요한의 목을 베었다. 어린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도 이 잔혹함에 손을 담갔다. 하늘 아버지에게 예수는 어떤 질문을 했을까? 예수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분노와 슬픔이 어렸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며 눈물지은 예수. 암탉이 새끼들을 모으듯 그토록 자신의 품에 모아들이려 했건만 모든 게 무너졌다. 성전이 탐욕과 환락의 공간이 됐을 때 채찍을 휘두르던 예수의 강렬한 눈빛이 자꾸만 강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다리를 세우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반면 다리를 끊기 위한 결정은 빨랐고 폭파 시간도 짧았다. 그렇게 잘린 다리가 70년 동안 끊어진 채 있다. 훼손되고 상처 입은 자리를 다시 잇고 고치는 것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역사는 흘렀고 끊어진 다리의 사연을 아파하는 이들도 기억하는 이들도 줄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중국과 조선의 현실도 구경거리가 되었다. 흐르는 강물만이 이 모든 추악함과 아픔을 끌어안으며 흐르고 있다. 강물만은 아무런 제약 없이 흐른다. 이 강물이 흐르는 곳에도 생명은 살아나겠지.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치며 북녘땅으로 마음을 실어 보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돌아와 평화 앞에 선 오늘
2024 만주평화순례 5박6일 여정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정리되지 못한 생각과 감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 날 찾은 조중러 3국의 변경 지역이 자꾸 떠올랐다. 이곳은 조선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는 곳으로 그들의 우호 관계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숨겨진 야욕과 긴장과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조중러의 국기가 나란히 그려진 기념물을 보며 씁쓸했다. 끊어질 듯 이어진 오묘한 관계지만 어찌 됐든 삼국은 교류하고 만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너무 쉽게 조선과 맞잡은 손을 놓아버렸다.
용정에서 방문했던 일본총영사관 유적지가 떠올랐다. 영사관의 목적을 상실하고 항일운동가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세운 곳이었다. 역사관은 어린아이의 사진으로 시작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압도되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펑펑 울어버렸다. 생체실험과 세균전으로 인간됨을 포기한 731부대의 악행까지 겹겹이 떠올랐다. 어린아이까지 울게 만드는 것이 분열이며 폭력과 압제, 전쟁이다. 인간을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고 서로를 경쟁자요 적으로 만든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치욕적인 생각을 세뇌한다. 그러나 아이는 울고 있지만 또렷하고 힘 있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렵고 떨리지만 그것을 떨치고 일어나는 것은 순수한 갈망이 아닐까. ‘안중근은 무죄’라 외친 그 아이처럼.
안중근은 살아 있다
“내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자살을 하려고 마지막 총알을 남겨 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안중근은 위와 같이 답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 유지였다. 그랬기에 이토를 죽이고도 그는 도망가지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도 않았다. 아직 그의 길은 남아 있었다. 이토를 죽인 것은 한 생명에 대한 원한이 아니며 자국만을 위한 이기도 아니었다. 대의, 바로 평화를 위한 의로운 선택이었다. 안중근이 꿈꾸었던 평화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목숨 바쳐 되찾으려 했던 이 땅이 훗날 반으로 갈라지고 70년 이상을 떨어져 서로 반목하며 살아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들어 왔다. 그래서 통일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고 통일을 생각할 때 막연하고 한편으로는 피로했다. 만주를 순례하면서 내내 아프고 서글펐고 또 답답했다. 돌아온 지금 그 이유를 조금 알겠다.
동포들과 만나고 싶다. 아니, 만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만 한다. 이것저것 제쳐 두고 우선 만나야만 한다. 얼굴을 맞대고 손을 맞잡고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혼과 숨을 나누며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이번 순례를 통해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통일을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과 조선이 통일의 길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것이 평화의 길을 여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최근 조선과 러시아의 정상이 만난 이후 국내 일부 보수 진영은 핵무장론을 다시 꺼내며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핵에 핵으로 맞서며 힘의 논리로 맞서며 대화하지도 만나지도 않는 평화란 있을 수 없다. 평화는 쉽게 오지 않는다. 파괴된 다리를 다시 잇기 힘든 것처럼 무너진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은 어렵다. 실리도 명분도 부족한 이 싸움을 멈추고 평화를 유지하고 건설하는 길로 들어서야 한다.
예수는 식민지 사람이었다. 열두 지파는 나누어지고 한민족이었던 유다와 사마리아는 왕래조차 하지 않는 관계가 된다. 그는 조국의 고통을 목도했고 사마리아를 가로지르는 길을 선택한다. 우물가에 있는 여인에게 관행을 깨뜨리며 다가가 도움을 청했고 마음을 열고 대화했고 자신을 밝히 드러냈다. 그리고 여인의 초대에 응하여 함께 머문다. 이후에도 예수는 파격적 행보를 이어 갔고 조국의 심장 한가운데서 죽어가면서도 용서를, 함께 누리는 천국을 말했다. 평화를 향한 선택이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이 평화를 위한 논의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며 구체적인 구상을 밝힌다. 그리고 공론화 장소로 뤼순을 지정한다. 뤼순은 어떤 곳인가? 전쟁의 참상과 일제의 핍박으로 고통받은 역사적 장소다. 안중근은 이 상처와 반목의 땅에서 동북아 평화가 시작되길 바랐다. 예수를 그대로 빼닮은 안중근은 신앙인으로서 조국의 한 일원으로서 숨이 다할 때까지 평화를 원했고 또 그 길을 몸소 걸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평화를 지향한다. 하지만 진정 평화를 찾는 이들은 평온할 수 없다. “평안하냐?”라는 예수의 인사에 “평온하지 않습니다”고 답할 때 오히려 ‘예수의 평화’가 선물처럼 다가온다. 순례를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현수막을 펼쳤다. 참가자 18명이 한소리로 외쳤다. “안중근은 살아 있다! 안중근은 살아 있다!! 안중근은 살아 있다!!!” 지금 여기 뜨거운 우리 안에서 다시 안중근은 살아난다. 하얼빈 역, 9시 30분 역사적인 6발의 총성이 또다시 울리는 듯하다. 우리 순례는 그렇게 다시 시작이다!
“안중근은 살아 있다-안중근과 독립운동가들의 혼과 숨결을 따르는 평화의 여정”
강소진
제주를 사랑하는 제주 사람이다.
역사와 철학,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사회를 꿈꾼다.
예수살이공동체 회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