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끄럽게 하는 논문 한 편

해고 간호사가 쓴 가톨릭 병원의 시장화와 반 노동

2024-09-06     양운기

지난달 홍명옥 간호사가 ‘의료시장화에 따른 가톨릭 의료기관의 영리주의 경영과 반(反) 노동에 관한 연구; 한국천주교 A교구와 가톨릭 대학교 N성모병원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긴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냈다. 그는 지금의 인천성모병원의 전신인 성모자애병원 시절부터 가톨릭대학 병원의 간호사로 일해 왔던 ‘인천가톨릭병원’의 역사 자체다. 특히 의료 노동자로서 한국 가톨릭병원 노동조합의 역사에서 그의 위치는 명백하다.

논문 초록엔 "이 연구는 1980년대 말 이후 한국 가톨릭 의료기관이 영리주의 경영과 반(反) 노동 실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한국 가톨릭 의료사업의 종교적 가치와 궁극적 목적에 대하여 비판적 문제를 제기한다"고 적고 있다. 특별히 2005년 10월부터 2019년 10월까지는 A교구가 수녀회로부터 병원을 봉헌 받아 N성모병원 경영을 시작한 이후 12년 만에 성직자의 경영 비위 문제로 경영진이 전면 교체(2017.12)되면서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홍명옥 간호사는 이 시기 N성모병원 노동조합 지부장이었고, A교구와 N병원을 상대로 민주노조 사수, 병원경영 정상화 투쟁을 하다 2016년 1월 해고되었다. 2019년 10월 노사 합의서 작성으로 투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모든 사건의 당사자 지위에 있었으므로 사건 전모를 인지하고 자료 수집을 통해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병원 경영자의 비위를 고발하다가 해고된 노동자의 시선이 담긴 논문은 내부 통제 기능이 부재한 배타적 권위주의의 병원 경영에 대해 교회와 시민사회의 공론화가 필요한 함의를 보여 주고 있다.

그를 알게 된 지는 30여 년이 되었다. ‘노동 사목’ 사도직을 담당하던 당시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그의 고충을 듣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저 가슴 아픈 사연만 듣는 것이 고작이었고 가톨릭 사업장에서 일하는 그를 돕는 데 한계가 있었다. 교회의 완고함과 병원 경영자의 ‘무지’가 낳는 반노동 상황은 그를 몹시 고통스럽게 했고,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건의 진상’을 교회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문서를 전달해 주는 일과 교회 지도자들과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함께 만나는 일이었다.

이른바 ‘인천성모병원 사태’가 세상에 공개되고 행정부원장 B 신부가 면직되는 시기에 홍명옥 간호사는 동분서주, 재판받고, 집회하고 온몸과 마음이 멍들어 있었다. 백척간두, 교회의 거대한 벽을 마주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면서 책임을 완수했고, 그 과정을 성찰하고 결과를 논문으로 보고하는 값진 열매를 세상에 내놓았다. 가톨릭 병원, 특히 CMC 경영과 노동조합이 겪고 있는 실제 상황, 그리고 선행 연구자들과 그의 표현대로 ‘권력’으로써 교회가 어떤 태도로 경영에 임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한 논문은 아마 가톨릭교회 병원 경영과 노사관계 관련 논문으론 처음일 것이다. 특히 그의 연구는 당사자여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논문은 고유한 가치가 있으며, 그가 노동자로서 살았던 지난 시절 눈물과 노력, 논문 기록 연구자로서 시의적절한 역할이 감사할 뿐이다.

2017년 8월 7일, 홍명옥 전 보건의료노조 인천성모병원 지부장(왼쪽 둘째)이 인천성모병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손해배상 소송 기각에 대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나는 ‘노동 사목’ 사도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수많은 노사 문제(?)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홍명옥 간호사를 알면서 가톨릭병원의 경영 실태도 상당 부분 깊숙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회가 운영하는 ‘성 안드레아 신경정신병원’에서 2000-08년까지 경영을 책임지는 병원장 임무를 맡았던지라 논문 내용을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다. 논문을 읽으면서 때론 가톨릭병원 경영자의 무지와 아집으로 의료 현장에서 많은 환우가 피해를 보던 상황이 스쳐 갔다. 드물게는 노동자의 미숙함으로 환우들이 피해를 보던 때가 있었지만 경영자의 무지에서 발생하는 피해에 비하면 의미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가톨릭 의료 경영과 노동의 관계에서 때론 교회가 권력화되었다는 부분’을 읽어 나가는 중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나의 굵직한 기억과 만나면서 더 이상 읽어 나갈 수 없었다.

병원경영 책임의 임무를 시작하고 얼마 후 한 직원이 근무 태만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보고를 들었다.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지경이라는 최종 공식 보고였다. 해당 부서장이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는 문제로 받아들이고 얼마간 시간을 두고 지켜봤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 그가 노동조합 위원장이었고 또 노동조합을 해체했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다. 이는 경험상 매우 드문 경우로 분명히 좋은 사례는 아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는 추문이다. 천천히 좀 더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뭉칫돈이 빠져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그 조건으로 노동조합을 해체한 것이다. 아! 사측의 노동자 매수였다.

사측이 노동자를 매수해도 노동조합을 해체하지 않고 이른바 ‘어용노조’ 노릇을 하면서 사측의 이득에 복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노동조합 해체’까지 결정했다면 두둑한 배짱을 넘어서 사측과는 또 다른 비밀스런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이라면 지역 사회 노동계, 상위 노총 본부도 알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동안 이 사실을 소문으로 알고 있는 직원들은 병원 측을 신뢰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을 들 수 없었고, 고통받는 환우를 ‘치유’한다는 병원 슬로건을 비웃는 주변 모습이 크게 의식되었다. 노동과 경영이 모두 신뢰받지 못하는 현장이라면 그들에게 미치는 가치관 문제와 그에 따른 사도직은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가? 특히 환우들에게 어떤 정신적 치유를 제공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땐 참으로 난감했다.

이대로 병원을 경영할 수 있을까? 경영자가 직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는 지경에서 어떤 업무를 할 수 있을까? 기운이 빠지고 자존감 떨어지고 무기력해졌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지만 여의찮았다. 그의 근무 태만 등의 사실을 근거로 인사위원회를 열었지만, 징계를 시도하면 “병원 측이 노동조합 해체를 조건으로 직원을 매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병원도 중대한 처벌을 받고 파문이 클 것이다”는 조언도 들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있는 직원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징계를 추진했다. 막중한 법적 책임도 인정할 각오였다. 병원은 노동자 매수로 인해 비록 경영자지만 어떤 결정도 해서는 안 되는 ‘귀책 사유’가 있으며 노동자 매수로 인해 우린 껍데기뿐이었다. 내 역할을 다하고 법과 직원들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해고를 결정한 완강한 입장이 전달됐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스스로 병원을 떠났다. 가장 유리한 방법을 선택했을 테지만 그는 일터를 잃었고, 나는 만감이 교차하며 허무했다. 과연 병원장으로서 나의 결정은 옳은 것이었을까.

후유증은 여러 입장과 비난이 오가며 오래 지속되었다. 병원에 대한 불신도 남았다. 그러나 직원들의 마음을 모두 움직인다는 것은 장기 과제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경영자의 태도는 조직 전체에 뿌리 깊은 불신으로 작용하여 사도직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사도직 활동자들의 존재 의미까지 흔들어 버리게 된다. 직원 중 가톨릭 교우들은 병원 측(특히 지도자급, 경영 책임자급)이 저지른 (윤리적, 도덕적, 실정법적)과오를 지켜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더욱이 그들이 수도자와 성직자라면? 가족을 책임지고 생계 수단으로서 직장 생활하는 직원들의 부서진 자존감은 어떻게 회복하고 보상해야 할 것인가? 쉬운 일이 아니다.

병원 경영자 측과 노동자의 관계(노사관계)를 신뢰의 단계로 자리매김하기까진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했다. ‘노동조합 위원장을 승용차로 매수한 사건’은 그가 병원을 떠나면서 정리되고 점차 시간이 흘러 병원은 외견상 유지되지만, 우린 더 이상의 책임은 없는가? 우린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를 매수하지 않았다면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을 것이다. 그를 떠나보낸 우린 세상에,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하느님 앞에 뭐라고 할 것인가? 우린 하느님 앞에 이래야 하는가? 아니 세상에, 사람들에게 이래야만 하는가? 의료 사도직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왜 이리 부끄러움만 계속 쌓이는가?

홍명옥 간호사의 논문은 이런 의미에서 한 여성 노동자의 절규이며 채찍이다. 그것은 치욕과 수치를 고발하는 시대적 목소리이기도 하다. 교회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여러 가지 구설에 오르내리는 교회가 과연 이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을 여유는 있을까? 허겁지겁 하루를 살아내기도 어려운 지경의 교회가 아닌가? 특히 ‘인천 성모병원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 교회 지도자들의 처신에서 이미 바벨탑은 무너졌잖은가? 이제 무너질 바벨탑은 있기나 한가? 불확실과 어둠과 의심 속에서도 살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 이 논문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부끄러움이란 짐승에겐 없는 감정이란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양운기  수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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