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순례길에서 2
산티아고 순례를 처음 시작하는 이들은 대부분 프랑스 길을 택해서 걷는다. 800킬로미터에 조금 못 미치는 거리를 오로지 두 발로만 걷고 싶어 한 번 시작점에서 출발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북쪽 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도보만으로 이동하는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 대부분 프랑스 길을 먼저 걸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순례를 완주해야 하는 과제로 여기지 않고, 날마다 마주하는 자연을 즐기면서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들과의 만남을 우선시한다. 북쪽 길은 어쩔 수 없이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경우도 있다. 1일 차 산세바스티안 가는 길 파사이아에서 한 번, 10일 차 또는 11일 차 라레도에서 산토냐 가는 길에서 두 번, 11일 차 또는 12일 차 산탄데르 가는 길 소모에서 세 번, 배를 탄다. 도로 따라 걷는 길이 너무 지루하고, 비가 내려 내리막길이 위험하거나 주변 환경이 공장지대여서 신속하게 통과하고 싶을 때 기차를 타기도 한다. 필자도 빌바오 들어가는 내리막길에서 비를 만나 지친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기 싫어서 사무디아에서 빌바오까지 한 번, 산탄데르를 출발해서 해안 길 따라 걷다가 아다르소에서 바레다까지 두 번, 히혼에서 베리냐까지 세 번,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북쪽 길을 빌바오까지만 마치고 나서 친구와 함께 프리미티보 길을 먼저 걷고 다시 북쪽 길을 이어 가기 위해 산탄데르로 왔다. 빌바오에서 산탄데르까지는 100킬로미터가 넘지만, 대신 레온에서 오비에도까지 살바도르 길 120킬로미터를 걸어서 북쪽 길 거리는 얼추 비슷하게 걸었다고 생각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도착 이후 피스테라 묵시아 순례길을 추가로 걷기 위해 일정을 줄였다. 첫날은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인근에 있는 고대 마을 산티야나 델 마르, 다음 날은 가우디의 초기 건축물 카프리초가 있는 꼬미야스까지 걸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산티야나보다는 조용히 마을을 돌아보며 가우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꼬미야스가 더 좋았다. 건축물 뒤 건물을 바라보며 고즈넉이 앉아 있는 가우디 조형물이 마음에 와닿았다. 이후 칸타브리아와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아름다운 해안가와 높지 않은 산들을 5일 정도 더, 프리미티보 길과 북쪽 길이 갈라지는 비야비시오사까지 걸으며 한국 순례자 두 분과 동행하게 되었다. 친구와 같이 프리미티보 길을 걸은 후 혼자 외롭게 걷다가 같이 장도 보고 신선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어서 순례길 걷는 내내 큰 힘이 되었다.
스페인 음식은 유럽에서도 맛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2주 이상 외국 음식을 먹다 보면 질려서 기력이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부족하지만 여러 향신료로 맛을 내서 소, 돼지, 닭고기와 해산물로 돌아가며 주 요리를 하고 올리브, 야채와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면 일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단이 된다. 혼자 해먹으려면 귀찮아져서 포기하고 사 먹게 되는데, 셋이 힘을 함쳐 음식 준비하니 비용도 절감되고 수고롭지 않다. 같이 걷던 두 분은 프리미티보 길로 가고 북쪽 길 후반부를 혼자 2주가량 걸으면서 음식 때문에 고생했다. 스위스에서 온 50대 여성 순례자 2명, 벨기에 경찰관 남성 순례자 1명과 숙소에서 만나면 같이 식사도 하고 짧은 외국어로 소통해 보았지만 외로움을 달래기엔 부족했다. 북쪽 길과 프리미티보 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된다. 헤어졌던 한국 순례자 두 분과 다시 만나 일주일 정도, 순례길 마무리를 같이 하려고 되돌아 걸을 정도로 외로움과 음식이 필자에게는 두 달 순례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비야비시오사를 지나 북쪽 길의 마지막 큰 도시 히혼을 거쳐 아빌레스, 루아르카를 지나 리바데오까지는 일주일 동안 해안 길을 따라 걸었다. 북쪽 길 5월은 반 이상이 비가 왔는데 6월이 되니 여간해선 비가 오지 않았다. 5월엔 시꺼먼 구름이 몰려오면 여지없이 퍼부었지만, 6월엔 꾸물꾸물해도 부슬부슬 내리기만 하다가 그쳤다. (돌아와서 다른 분들의 순례 일기를 읽다 보니 다만 그 시기에 일주일 정도 비가 적게 온 듯하다.) 해안 길이라 해서 노란 화살표를 따라갔더니 해변이 나타날 때마다 내리막, 오르막을 심하게 반복해서 조금 돌아가도 해안 도로를 따라 걷는 게 더 수월했다. 도로를 따라 걸으며 마주치는 얼굴마다 네 심정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 정겨웠다.
리바데오를 지나면 해안 길에서 내륙으로 들어서기 때문에 일부러 순례길을 벗어나 순천만 습지 같은 바닷가 널빤지 길도 밟아 보았다. 리바데오에 다다를 즈음 바다를 가로지르는 무시무시한 다리가 나타났다. 바닥을 보면 저 멀리 바다가 보여 앞만 보고 걸어서 간신히 넘었다. 해산물이 맛있기로 유명한 갈리시아 지방에 온 기념으로 새우와 문어로 푸짐한 식사를 했다.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내륙에 있기 때문에 5일 동안 평범한 도로와 크게 힘들지 않는 산길을 번갈아 걸어서, 북쪽 길 후반부 유서 깊은 수도원 알베르게가 있는 소브라도 몬세스에 도착했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시구처럼 “아무렇지도 않고 별로 예쁠 것도 없는” 순례길 풍경이 이어졌다.
저녁을 먹고 일찍 잠이 들면 한밤중에 깨어나길 며칠 반복했다. 잠 못 들고 뒤척거리다 우연히 펼쳐 든 유튜브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 "흰"에 대한 대담을 보았다. "흰"은 작가가 고통스럽게 "소년이 온다" 집필을 마치고 우연히 바르샤바로 가서, 나치에 저항하다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재건된 사실과 유태인 게토에서 한 남성이 여섯 살에 죽은 친형의 혼과 함께 살고 있다는 실화를 접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숨을 거둔 언니와 자신의 시점으로 세상의 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용이 궁금해 바로 이북으로 사서 열어 보니 도입부가 순례길과 닿아 있었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흰", 문학동네, 2018)
기대했던 소브라도 몬세스 수도원은 유서 깊은 건물 안에 있는 커다란 알베르게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실망했다. 프랑스 길과 다시 만나는 아르수아까지는 지루한 아스팔트 길을 걸어야 해서 많이 힘들었다. 북쪽 길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아쉬워서 지나치는 풀 한 포기, 색색으로 피어난 들꽃들을 새롭게 바라보다 마침내 도착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하늘이 예뻐서 사진으로 남겼는데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도쿄의 청소부 히라야마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신만의 기쁨으로 기록하는 ‘코모레비’를 닮았다. 일상을 벗어나서 새로운 경험을 얻으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오히려 반복되는 순례길 일상을 지루해 하다가 작은 일탈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경험으로 순례길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떠나 있는 동안 집에 남아 있던 이들의 이야기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순례길에서 경험한 것을 이들과 나눔으로써 다시 가정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조은기(아우구스티노)
80년대 가톨릭학생회와 야학에서 20대를 보내고, 33년 동안 대기업, 중견기업, 소기업에서 사원, 대리, 과장, 부장을 거쳐 팀장, 임원, 대표이사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은퇴하여 국내외 다양한 순례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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