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달리타스는 간절함과 실천에 있다
[인터뷰] 전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이 글은 <가톨릭평론> 44호(2024년 여름, 우리신학연구소)에 실린 글입니다.
전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는 현재 전주 인보성체수녀회 본원의 상주 성사 담당 주교로 활동하고 있다. 이병호 주교와 인터뷰에서는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에 대한 고견을 들을 수 있었는데, 주교시노드에 세 차례 참여했던 이 주교는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은 결국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함께 버팀목이 되어 찾아가는 길임을 명확히 했다. 이 인터뷰는 박문수 우리신학연구소 소장이 진행하고 정리했다.
시노달리타스는 참여 경험에서 출발한다
저는 시노달리타스를 체험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곳은 교구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추진 주체는 교구인데, 하다 보니 이것으론 너무 짧다고 생각해 1년을 더 연장했잖아요. 제 생각에는 그 늘어난 1년을 교구 단계에 할애했어야 해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시노드 사무국의 지침대로 실제로 해 보면 용어고 뭐고 상관없어요. 실제로 하면서 시노달리타스가 뭔지 체험하게 돼 있으니까요. 시노달리타스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에요. 한번 해 보면 이게 뭔지 알게 돼요.
저는 과거부터 해 왔던 형식의 주교시노드에 두 번 참석했어요. 한 번은 성서 주제, 다른 한 번은 복음화를 주제로 하는 주교시노드였죠. 아시아 시노드(1998)도 로마에서 있었지요. 이것까지 포함하면 세 번이에요. 주교시노드를 연속해 두 번 참석한 주교는 거의 없어요. 추기경 가운데 어떤 분은 거의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니 예외지만, 보통 주교는 그러기가 힘들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겨 나는 두 번이나 참석했어요.
그런데 이번 시노드는 내가 참여했던 시노드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사진만 봐도 그래요. 요즘에 얼마나 뉴스가 빨라요? 인터넷으로 즉각 즉각.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계속 봐 왔어요. 이번에 보니 과거와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져 하늘과 땅 차이예요. 옛날에 시노드를 어떻게 했는지 사진 보셨죠? 주교들이 시노드 홀에 모여 정면을 바라보고 앉고 정면에는 사회자, 교황님, 그리고 옆에 추기경들이 앉아 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시노드 홀이 아니라 바오로 6세 홀에서 하더라고요. 30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 굉장히 컸습니다. 그 홀에다 둥근 탁자들을 배치했어요. 대부분 12명으로 조를 나 눠 그 탁자에 둥글게 앉았어요. 옛날에 교황님은 총회에만 나타나고 대부분은 소그룹으로 진행했거든요. 소그룹이라 해도 22-23명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총회는 그중 극히 일부였지요. 소그룹 모임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각자 준비해 온 발표를 하는 시간(인터벤션)은 시노드 홀에서 하니 교황님이 임석하셨어요. 누가 발언하면 그 사람만 집중적으로 비춰 주었지요. 이번엔 교황님이 뭐 따로 왔다 갔다 하실 필요가 없었어요. 교황님도 그중에 한 명으로 참여하셨으니까요. 평신도, 주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고루고루 섞여 앉았어요. 이 장면 자체가 시노달리타스예요.
이걸 처음 해 본 사람은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이 자체가 시노달리타스구나 하며 그냥 체험으로 아는 겁니다. 무슨 전문가가 따로 있지도 않습니다. 누구든 할 말 다 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 1년을 교구에 줬으면 적어도 한 1년, 1년 반 아니면 1년 3개월 정도 됐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각 교구에서 이런 모임을 수없이 했겠지요? 그랬으면 정말 탄탄한 기반이 만들어졌을 거예요. 바위에 짓는 튼튼한 집이 됐을 거예요. 그다음에는 서류로만 왔다 갔다 해도 충분했겠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몇몇 교구만 빼고 대부분 교구에서 언제 했는지도 몰라요. 본래라면 신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여해야 하는 것이었지요. 성당에 안 오는 사람도 어떻게든 데려다 같이 그 자리에서 함께해야 하는 것이었어요. 근데 잘 다니는 사람도 뭐가 지나가는지 모르고, 대부분의 경우 몇 사람만 참여했지요. 그 기간도 그냥 보내는 것을 보고 처음부터 이번은 틀렸다 백 번 해도 이렇게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 평신도에게서 발견한 희망
그렇게 실망했는데 우연히 프랑스에서 나오는 신학 잡지 <연구>(Études)를 보게 되었어요. 거기 시노드 관련 기사 하나를 읽고 ‘이야! 우리나라는 이랬는데 세계로 시야를 넓혀 보니 이런 교회도 있었네. 아! 이렇다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글은 실제로 진행된 일을 기록한 일종의 르포였어요. 그 과정에 아주 깊이 참여했던 사람이 보고서 형식으로 쓴 거예요. 제목이 무척 의미심장한데, ‘시노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노드’였어요. 얼핏 보면 다시 무슨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부제는 ‘얼마나 기다려 온 시노드인가’였는데, 이 말이 훨씬 호소력이 있지요. 이런 기다림이 없었으면 세상없는 것을 갖다 주어도 그게 뭔지 몰라요. 이게 훨씬 더 중요한 단계입니다. 그냥 ‘기다렸다’가 아니라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렸던가?’ 한국 교회는 이처럼 기다렸던 적이 없었어요. 뭔지 알아야 기다리지. 한국 교회는 목마름이 없었어요. 그걸 갖다 줘도 뭔지 몰라요. 이게 제일 바탕에 깔린 문제입니다.
이 시노드에 관해 얼마나 기다려 온 시노드인지를 성서에 빗대 말해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공동번역 신명 8,3) 그렇잖아요? 먹는다는 말이 거기에 없어요.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빵은 먹는 거니까 말씀을 먹는다는 말도 넣어야 의미가 살아나는 번역이 되는 거예요.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일찍이 고생시키고 굶주리게 하다 주니까 더 감사한 거예요. 배부를 때 줘 봐야 뭘 줬는지 뭘 먹었는지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거의 죽을 지경에 빵과 물 한 잔을 주면 겨우 살아나고, 그때야 죽다 살았구나 하는 감격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대비가 있어야 해요. 그것이 없으면 다 덤덤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우리나라가 딱 그랬어요.
진짜로 서양에서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뭔가 이대로는 안 된다. 교회가 정말 뒤집어져야 한다. 정말 목마르게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교황님이 이것을 갑자기 턱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몇 년 쯤에 이런 것이 있을 것이라는 예고 문건으로 2018년 8월 20일 '하느 님 백성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하셨잖아요. 그 편지를 받고 사람들이 우리가 기다리던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죠. 그 편지를 받고 나서 그 많은 프랑스 교회의 신심 단체, 사도직 단체, 평신도 단체 등이 ‘일단 모든 것을 멈추자. 그리고 이제부터 이것에만 집중하자’고 그랬어요. 또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그중에는 가톨릭 구호단체인 세쿠르 가톨릭Secours Catholique(프랑스 카리타스)도 있었어요. 이 단체는 거의 100년 역사를 가졌고, 60-70년 된 단체도 많았어요.
이 단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지금부터는 여기에만 집중하기로 했어요. 그 방침이 떨어지고 나서 시작되었는데, 각자 자신이 몸담았던 그 사도직 단체의 역사가 동시에 이 안으로 흘러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노달리타스라는 시각에서 그것을 다시 보고 거기서 건질 것이 무엇인지,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말해 제일 큰 것 중 하나가 성직주의인데, 이 사제 중심주의가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었으며 어떤 면에서 걸림돌이 되었 는지를 논의했어요. 아주 구체적으로 사제가 너무 말을 많이 해서 다른 사람은 아예 말을 못하거나 해도 적게 한다든지 그렇게 분위기가 굳어지는 면도 있겠죠. 사제중심주의가 이렇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인지, 혹시 좋은 쪽으로 기여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거죠. 이런 식으로 시노드다운 걸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장애 요인은 무엇인지, 도와주는 요인은 무엇인지를 철저히 분석하는 거예요.
시노드는 추상적이지 않은데, 몇 가지 원칙도 제시합니다.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지 마라. 아주 가까운 것, 아주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누가 말을 안 하면 어떻게 해서든 말을 시켜라. 현장에 없는 사람도 데려와라. 와서 왜 그동안 거리를 두었는지 그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해라.’ 여러 면에서 철저히 연구합니다. 사제가 거기에 개입하지 않으니, 눈치 볼 필요도 없습니다. 가령 어떤 신부 꼴 보 기 싫어 그때부터 성당에 안 나갔다면, 어떤 점이 특별히 꼴 보기 싫었는지 그런 점을 계속해서 말하게 한 거예요. 일단 충분하게 말하게 하니까, 여러 주제로 나눌 수 있잖아요. 왜 그렇게 됐나? 내가 이 문건을 읽고는 ‘이야! 그래 이게 시노드다.’ 시노드 시노드 하더니 전 세계 교회가 함께 간다는 그 수준에서 보니 여기 희망이 있구나. 그러면 됐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희망을 품기 시작했어요. 한국 교회처럼 하면 백 번 천 번 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프랑스 평신도의 이야기를 보고 희망이 생겼어요. 시노드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고, 교구 단위에서 이어 갔다면 교회가 많이 바뀌었을 거예요. 시노드적 면모를 갖춘 교회로 말이지요.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다음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그러니까 이제부터 시작하자’가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늦어요. 직접 하면서 동시에 바꾸었어야 했는데, 우리는 아쉽게도 그런 기회를 놓쳤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의정부교구가 가장 모범적으로 진행했지만, 전 세계로 펼쳐 놓고 보면 한국 교회가 얼마나 그 흐름 속에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큰 그림에서 보자면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의 최소 단위인 교구에서 모임을 시작하고 국가 단위에서 그것을 취합 논의하고 그것을 다시 대륙별로 논의해 최종적으로 2023년에 총회를 하려고 했죠. 중간에 로마에서 논의하는 방식의 긴 여정을 거치는 것만 해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똑같아요. 기간이 4년이잖아요. 사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이런 배경에 놓고 보면, 꿈을 갖고 이상적인 그림만 잘 그렸지 실천은 못한 거예요. 이번 시노드는 이제라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뜻하는 성과를 얻고 그대로 실현한다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이 될 겁니다. 이 시노드가 마지막 공의회와 맞먹는 역사적 의미를 지닐 수도 있어요. 절대 공의회보다 비중이 낮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 백성에게 보내는 서한'(2018)을 통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드러난 심각한 일탈 현상으로 무엇보다 성추행 사건을 들었어요. 그래서 제일 큰 과제인 성직주의를 벗어나 제3천년기에 걸맞게 교회가 환골탈태해야 했어요.
프랑스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8년에 제안한 대로 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변화를 구현하기 위해 교회 안 여러 기구의 역량을 한데 모아 평신도들이 ‘교회의 약속들’(Promesses d’Église)이라는 협의체를 결성했습니다. 이 협의체를 통해 교회의 근본 변화를 위해 숙고해야 할 요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형제를 중심에 놓고 교회 안에서 발언권을 갖지 못한 모든 사람이 교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적극 한몫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논의해 왔어요.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공동번역 마태 23,8) 그런데 실제로는 교회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죠. 복음으로 돌아가면 답이 얼마나 분명한지 몰라요. 그 답을 놓치면 겉으로는 근사하게 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뼈까지는 못 들어갑니다.
시노달리타스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다
시노드에서 나를 초청한다면 나는 가서 아무 소리 안 하고 딱 이 노래 하나만 부르고 돌아올 거예요. 이 노래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 을 더 잘 표현하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 김남주 시인의 시로 만 든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불러 볼게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투쟁 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 어기여차 건너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얼마나 좋습니까? 잘난 사람 없습니다. 12사도 가운데 예수님을 팔아먹은 사람도 있었어요. 그게 현실입니다. 그게 없었더라면 그런 현상이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왜 그런가? 교회 아니라 천하 없는 데라도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그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진짜 사도가 있으면 가짜도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 가짜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해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이런 스캔들 저런 스캔들이 없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문제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일이 없다는 듯 살아서는 절대로 안 돼요. 그것은 남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도 있고 누구에게든 다 있어요.
예수님은 이런 때 어떠셨나? 현장에서 잡혔으니 변명의 여지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뭐라 하셨나? 그래 율법에 쓰여 있으니 죽여야 해. 돌로 쳐 죽여야 해. 근데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던져. 그 죄 라는 게 뭔 죄겠어요? 특별히 그 종류의 죄였겠지. 요즘 사람들이라면 돌로 쳤겠지요. 오늘날의 인심이라면 그랬을 거예요. 그때만 해도 순진해 다들 돌아섰지요. 고백을 만인 앞에서 하는 건데 아무도 안 남았다고 하잖아요?
현실의 교회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하는 것은 위선이에요. 그런 현실을 인정해도 세상 안 무너집니다. 만약 예수님 시대에 유다가 없었는데 교회사에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면 ‘이게 그 교회 맞아? 엉뚱한 거 아니야? 예수님이 세운 교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 아니야?’ 그랬을 겁니다. 어떻게 감당했겠어요? 그 충격이 예수님 시대에 이미 있었어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도 봐요. 밤이 되면 쓰러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줘야죠. 가다 힘들면 아픈 다리 서로 기대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가는 것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반자든 천하 없는 사람이든 함께 가는 거예요. 그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사회에 어떤 분야를 떼어 놓고 봐도 겉에서 드러나는 곳도 그렇게 순수한 사람들만 있는 데는 하나도 없어요. 현실 속에 살라! 우리는 꿈속에서 사는 게 아니다. 물론 인간의 머리는 꿈꾸라고 있지만, 발은 현실을 밟으라고 있는 거예요. 인간만 이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발은 땅을 밟고 있고 머리는 하늘을 뚫고 있어요. 머리는 하늘 끝까지 가요. 그것도 모자라 그 위에까지 상상하지요. 그러면서 현실은 땅을 밟고 있어요. 우리는 이 둘을 다 잡고 있어야 해요. 그러면 뭐 이상할 것도 없어요. 누가 큰 실수를 했다고 해도 감싸주면 그저 툭 털고 일어나요. 근데 거기서 그냥 단죄해 버리면 그 사람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얼마나 복음적이고 모범적인가? 어디든 그런 사람 한 명은 있었단 말이에요. 밤을 새워 기도해 뽑은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뽑으셨는데 말이에요. 나는 상상해요. 밤을 새우면 서 예수님이 뭐라고 기도하셨을까? 이 세상에 최고인 놈들만 보내 주십시오, 그랬을까요? 내 생각은 아니에요. 제일 평균적인 인간을 보내 주십시오. 좀 괜찮은 놈, 제일 못된 놈, 중간 놈 할 것 없이 ‘도레미파솔라시도’ 다 있는 거예요. 거기 제일 좋은 사람들만 보내 달라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이에요. 좋은 사람하고만 함께한다면 누구든 하지요. 썩은 나무토막을 가지고도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셔야 그게 하느님이시지, 그러잖아요? 우리 그리스도교는 그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원칙을 끝까지 밀고 가자면 자신을 이 세상에서 제일 망가진 인간 하나, 저 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함께 가자’예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함께 가다가 내가 쓰러지면 저 사람이 일으키고, 저 사람이 쓰러지면 내가 일으키면 되지요. 동시에 쓰러지지는 않으니까요. ‘함께 가자’의 가장 큰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이렇게 당장 생각해야 하는 거잖아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치밀한 기획 - 시노달리타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부터 이미 시노드야말로 하느님께서 제3천년기에 들어선 교회에 기대하는 길이라고 천명하셨어요. 이미 2015년 10월에 시노드에 관해 국제신학위원회를 통해 연구하게 했어 요. 국제신학위원회가 연구하게 했던 것 중 하나가 신앙 감각에 관한 문건인데, 그것이 다 시노드를 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신앙 감각은 뭔 말인가? 감각은 사람뿐만 아니라 개돼지에게도 다 있어요. 눈으로 보면 보이고,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놀라서 뛰는 데는 소나 말이나 사람이나 똑같아요. 그것이 감각입니다.
지성을 이야기할 때 대단한 사람들, 말하자면 뭐 스승이라 자처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지요. 우선 교황님끼리만 비교해도 바로 앞 베네딕토 16세는 진짜 지성인 중에서도 지성인이었어요. 신학자 중에서도 대단한 양반이었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거기에 비하면 교장 선생님 앞에 초등학생이지요. 신학적으로 보자면 그렇지만, 정말 사목자로서 양 냄새 나는 감각으로 보면 오히려 거꾸로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을 해도 이 양반이 내놓은 글을 보면 눈물이 줄줄 나는 거예요. 글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요. 똑같은 말을 하는데도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말을 하자는 거냐? 하느님 백성은 안 배웠어도 감각만 있으면, 즉 신앙 감각 그러니까 하느님이 성령이 주신 감각만 있으면 자기 앞뒤를 헤쳐 갈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점을 착안해 차근차근 포석을 두었던 것이지요.
2015년 10월 17일 시노드 설정 50주년을 맞아 한 연설이 있지요. 시노드는 공의회가 끝나고 나서 얼마 안 있다 설정했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50주년 연설이었지요. 교황은 시노드다운 교회의 모습이 어떠 해야 하는지에 관해 대강의 그림을 제시했어요. 이때부터 ‘교회는 세례성사를 바탕으로 교회 구성원이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평등하다. 누가 높고 낮은 것이 없다.’ 이 이야기를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보이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시노드를 통해 이것을 실제로 보여 주려고 했지요. 실천으로 보여 주지 않으면 머릿속에만 남을 뿐이에요.
그래서 첫째는 듣는 교회가 되어야 해요. 모두 다른 이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한쪽은 가르치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배우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를 선생이라 하지 말라. 선생은 하느님 한 분밖에 없고 너희는 다 형제다. 동등하다’라고 하셨잖아요? 굳이 말하자면 시노달리타스는 이런 거예요. 멀리 갈 것도 없어요. 그런데 대부분 교회가 벌써 여기서부터 막히잖아요. 그렇잖 아요?
둘째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날 저녁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봉사라는 말은 아주 부드럽게 들려요. 그러나 말만 그럴 뿐 본래 봉사는 종 노릇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 도 보통 종이 아니에요. 노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둘로스’(doulos)는 ‘노예’, ‘둘류오’(douleÚw)는 ‘노예 노릇을 한다’는 뜻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실제 퍼포먼스로 보여 줬잖아요. 너희 중에 높은 사람이 되려면 끝까지 겸손하라고 했잖아요.
하느님 백성을 이루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교회 안에서 이런 두 가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가정에 관한 시노드, 젊은이에 관한 시노드, 아마존에 관한 시노드에서 이미 이런 모습의 교회 상을 구현하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특별히 2018년에는 세례받은 모든 이를 향해 강력한 목소리로 호소하면서 교회의 혁신에 적극 투신해 줄 것을 당부했어요.
'하느님 백성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교황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성폭력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것은 동시에 권력 남용과 양심의 문제라는 점을 환기시켰어요. 또한 그런 문제가 교회 안에서 권위에 관한 관 념과 그 행사에 관한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했어요. 그런 경향을 한마디로 성직주의로 표현한 것이지요.
이런 맥락을 고려해서 우리가 시노드다운 교회 곧 ‘함께 길을 걸어가는 교회’를 설명할 때,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아까 그 노래를 부르면 시노달리타스가 뭔지 선명하게 잘 드러나요. 이 말 나올 때마 다 그 노래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억지를 부릴 필요가 없어요. 내가 넘어지면 어때요? 내가 넘어질 때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줄 테고, 다른 사람이 넘어지면 내가 일으켜 줄 테니까요. 숨길 것도 없어요. 그렇잖아요? 정말 함께 가는 교회라면 권력 남용에서 비롯되는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고 동시에 제3천년기에 들어선 그리스도인과 다른 모든 사람이 새로운 상황에 걸맞게 살아가도록 촉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과제 혹은 모든 도전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이 묶여 있으면서 동시에 확실히 구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시노드가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거예요.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끝나야 분명하게 드러나겠지만, 지금도 우리는 몇 가지를 미리 내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박문수
가톨릭 신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