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미안한 마음이 더 필요한 오늘에게
"사랑은 늘 미안하다", 김용태, 생활성서사, 2024
“사랑은 늘 미안하다”
대전교구 김용태 신부(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장)가 월간 <생활성서>에 6년간 연재한 칼럼 중에 골라 엮어낸 책이다.
‘작은 이들에 대한 감수성’, ‘복음 감수성’, ‘신앙 감수성’ 각 세 장에 담긴 짧은 단상들은 강론이나 가르침이라기보다 김용태 신부가 본당(성당)에서, 거리에서, 여러 상황과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말 걸고, 때론 답하고 성찰한 흔적들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결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계명,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에서 시작해 확장되고 모인다.
네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 사랑의 전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랑을 실현할 곳은 어디인가, 이 모든 것을 통한 구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너무 많이 듣고 말했던, 그래서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깨닫고 삶이 되지 못해 어쩌면 여전히 성당 안에서 맴돌다 마는 말들에 대해, 김용태 신부는 자신의 삶의 경험과 성찰,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 내용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그러나 부드럽게 엮어 놓는다. 또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성경의 단어와 맥락을 재구성한다.
예를 들면, ‘이웃사랑의 중심’에서 김 신부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10,36)라는 예수의 답변을 다시 들여다본다.
“‘나의 이웃’을 묻는 율법 교사의 질문이 예수님에 의해서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을 묻는 질문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중심의 이동’이다. 사랑이라는 계명의 중심이 ‘나’가 아닌 ‘강도 만난 사람’으로 변화된다.... 이제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 ‘나의 사랑을 받을 사람이 누구인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나는 과연 강도 만난 사람을 사랑하는가?’를 성찰하는 문제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93쪽)
그리고 ‘자비’에 대하여.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착함이 우리 자비의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착하심과 그분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간절함이 우리 자비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에 더해 “부자는 악하고 가난한 이는 착하다는 사고방식은 결국 가난한 이가 뭐라도 받아먹으려면 착해야 한다. 착하지 않으면 도와줄 필요도 없다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면서, 이런 사고가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에게까지 이르는 근래의 사회 현상을 짚어낸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성경 말씀이 그저 그런 모양새와 관계성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막연한 이해에 대해,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 위해 애쓰는 그 자체가 하느님을 향한 ‘매달리는 사랑’이라는 말은 어떤 위로가 된다. ‘욕망’ 그 자체가 죄일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는 “아니. 욕망은 삶의 동력과도 같으며,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 행동 에너지”라며, “문제는 욕망의 방향성으로, 무엇을 갖고 싶은가, 어디에 오르고 싶은가의 문제”라고 삶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은 아직도 의심하는 이들이 섞여 있는 그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중대한 사명을 맡기신다. 제자들이 완벽하게 준비가 된 다음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모자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님은 완벽한 제자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완벽하게 필요로 하는 제자를 원하셨던 거다.”(198쪽)
“꼭 거기(해고 노동자들이 농성하는 굴뚝)까지 가서 미사를 해야 됩니까”라는 항의성 질문에, “그 사람들 그러다 죽을까 봐.... 그래서 가요. 죽지 말라고! 기운 내라고! 버티라고!” 답하면서도 무력감에 화가 나고 답답했다고 고백하던 김 신부는, 책 말미에서 스스로에게 말하듯 답을 찾는다.
“나 하나 열심히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그런다고 별 수 있겠어? 겨우 이걸로 뭘 할 수 있겠어? 어느 세월에? 그러다 말걸? 그런 말 앞에서 기죽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자. 주님께서는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의 용기와 우리가 봉헌하는 한 줌의 정성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201-202쪽)
그리고 구원의 객체인 죄인, 양, 제자로 “받아먹는” 자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행하”는 존재, 예수가 한 것을 “그대로 행하는” 존재로 주체가 되자고 초대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의 ‘지금 여기’는 지나쳐 가는 곳이 아니라 생의 최종 목적지라는 그는 “구원을 다음 어딘가로 막연히 미루지 않고 ‘지금 여기’의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내 손으로 실천한다면 구원은 허상이 아니라 반드시 이뤄지는 실재로 자리한다”며, 지금 이 순간의 사랑, 연민, 한 발 나아감의 구원적 의미를 말한다.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구절 속 어딘가에 보물처럼 숨어 있는 전환과 성찰, 사고의 뒤집힘을 읽으면서 오래, 곱씹었다. 생각보다 긴 시간 읽어야 했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막연히 짐작했던 제목, “사랑은 늘 미안하다”의 의미가 조금 가까워졌다. 미안하다는 마음은 나와 내 가족과 어디든 있는 내 이웃을 함께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실천하는 첫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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