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원주에서 우주를 품다
30주기 맞아
이 글은 <가톨릭평론> 44호(2024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올해 30주기를 맞는 무위당无爲堂 장일순(1928-94). 평생의 대부분을 원주에서 지낸 장일순은 우주적 전망의 생명 사상을 전하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존 공생의 삶을 일관되게 살았다. 자본주의 체제가 무엇보다 생태적으로 지속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난 오늘날, 그의 삶은 30년이 흘렀어도 ‘생태적 회심’과 ‘대전환’이 절실한 이 시대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이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의 뿌리는 자본주의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적 부담은 계속해서 증가해 오늘에 이르렀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자기 증식 운동으로 유지된다. 자본은 시장의 경쟁 속에서 자기를 증식한다. 경쟁은 자본주의의 기본 질서다. 한편 오늘날 자연과학은 모든 것이 서로 깊이 연결된 세계상을 제시한다. 불교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만물이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인 세계를 말한다.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자기만 커지려고 하면 누군가는 억눌리고 죽게 된다. 우주의 질서를 거스르는 배타적 자기 증식은 죽음의 힘이다. 자기를 절제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자발적 자기 제한은 생명의 힘이다. 모든 것이 연결된 세계에서 번영은 함께 누리는 것이다. 자기 증식이 본질인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자기 제한에 기초한 생태적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무너져 가는 우리 ‘공동의 집’을 보살피려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의 원천이 된다. 오늘, 장일순의 삶을 다시 읽으려는 까닭이다.1)
원주 사람, 장일순: 토박이의 삶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난 장일순은 1940년 천주교 원동 성당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했다. 그는 중학교 이후의 학업과 군 복무, 3년의 수형 기간을 빼고 줄곧 원주에서 살았다. 1955년에는 원주 봉산동에 집을 직접 짓고 199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공동의 집’인 지구 생태계가 심각하게 훼손된 오늘날 한곳에 뿌리내린 장일순의 삶은 집의 보전保全이란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근대 이전, 공간은 동질적이지 않았다. 세계는 사람, 동물, 신神, 영靈 등이 사는 곳으로 가득했다. 자연은 생명이 깃든 곳, 모든 생명의 ‘어머니’로 경외와 경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상황이 달라 졌다. 데카르트에서 보듯이, 세계는 사유 주체인 정신과 사유 객체인 물질세계로 분리되었다. ‘길이와 넓이와 깊이’ 곧 연장延長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바라본 세계는 수많은 고유한 장소가 어우러진 곳에서 균질한 기하학적 공간으로 변했다. 자연은 주인 없는 물건, 정복과 지배의 대상, 자원의 창고로 전락했다.
동질적 공간 개념은 다양한 생명이 깃든 자연을 이윤 창출을 위한 소유와 채굴의 대상으로 전도한다. 폭력적이고 반생명적이다. 세계를 떠도는 초국적 자본에 ‘이곳’과 ‘저곳’은 이윤의 크고 적음을 빼고는 별 차이가 없다. 지역을 존중할 이유도 동기도 없다. 세계화된 자본에 지역의 삶과 자연이 망가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균일한 기하학적 공간은 추상적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는 고유한 장소의 어우러짐이다. 장소의 고유성을 인정할 때 세계는 다양한 존재가 깃든 ‘집’이 된다. 이것이 지역에 뿌리내린 ‘토박이’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평생을 원주 한곳에서 살았던 장일순의 삶에 주목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봉산동 자택에서 중심가까지는 걸어서도 20분 정도로 족한 거리인데 보통 2시간씩 걸리기가 다반사였다.... 아주머니, 아저씨, 길가의 좌판 장수, 기계 부속품 가게 주인, 리어카 채소 장수, 식당 주인, 아니면 농부들, 만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과 끊임없이 벌이 얘기, 아이들 소식, 농사 얘기, 살림살이며 시절 얘기를 나누는 데 보통 2시간 이상” 걸렸다. 장일순에게 ‘원주천 둑길’은 그저 집에서 원주 시내를 이어 주는 길이 아니었다. 그 둑길은 원주 사람 장일순이 다른 원주 사람들을 만나 삶을 나누는 또 다른 ‘집’이었다.
장일순은 원주의 장삼이사와 기꺼이 시간을 나누었다. 시간은 곧 삶이니, 이들과 거리에서 함께한 시간은 그들의 삶에 대한 관심과 존중의 표현이다. “삶은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만남의 시간”이니, 그는 시간을 허비한 게 아니라 제대로 썼다.('모든 형제들' 66항) 그에게 소중한 만남의 장소였던 원주천 둑길은 다른 어떤 길로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곳, 소중한 곳이었다. 그 둑길뿐만 아니라 원주 곳곳이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정든 곳이 계속 남아 있길 바란다. 어릴 때 살던 집과 학교와 낯익은 가게들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 행복해진다. 자기 집처럼 소중하기에 그렇다. 한 지역에 뿌리내린 토박이는 자기가 사는 곳을 존중한다.
장일순의 공경
물론 한곳에 오래 산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장일순이 원주라는 지역과 주민을 존중한 데는 ‘공경’의 삶을 손수 보여 주신 할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여운旅雲 장경호는 사람과 생명을 공경하신 분이다. “할아버지는 아주 검소하고 겸손한 분이어서 곡식 한 알이라도 땅에 떨어지면 주워 그릇에 담아 모으셨어. 물건 하나라도 소중하게 다루셨지.” 원주의 재력가였던 장일순의 할아버지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했고 ‘거지’도 손님으로 대했다. 할아버지는 “밥을 얻으러 온 사람이 있으면 윗목에 앉아 밥을 먹는 며느리를 불렀다.” “어머니는 바로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 동냥 그릇을 들고 온 이에게는 밥과 찬을 담아주었고, 빈손으로 온 이에게는 윗방에 따로 상을 차려 대접했다.” 장일순은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와 어머니께 가장 낮은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할아버지의 사람 공경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았다. 장일순의 형은 15살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 출상 때 손자의 상여에 큰절을 바치는 할아버지를 보고 장일순이 그 까닭을 물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네 형이 내 손자였지만 저승에는 먼저 갔으니 거기서는 내 어른이다.” 장일순은 할아버지의 절을 “공경하는 마음을 어려서부터 심어 주려는” 뜻으로 새겼다.
장일순의 생명 사상: 하나인 생명
원주에서 교육운동, 신협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던 장일순은 1977년 기존의 사회운동에서 한계를 느끼고 운동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결심했다. “땅이 죽어가고 생산을 하는 농사꾼들이 농약 중독에 의해서 쓰러져가고.... 인간만의 공생이 아니라 자연과도 공생을 하는 시대가 이제 바로 왔구나.” 문제의 근원은 산업 문명과 자본주의 체제에 있었다. 과학기술로 향상한 생산력으로 대량 생산과 소비를 계속하는 한 자연은 물론 인간도 온전할 수 없다. 그는 ‘땅의 죽음’을 문명의 전환을 요구하는 시대의 징표로 읽었다. 자본주의는 오늘도 땅이야 죽어 가건 말건 생산과 소비를 늘리며 자기 증식에 바쁘다. 다단계 하청과 플랫폼 노동에서 보듯이 갈수록 착취 강도가 높아지는 노동 환경은 사람도 자본의 먹잇감이라는 걸 보여 준다. 이 거대한 죽음의 질주를 멈추려면 사회경제 체제와 개인의 내적 변화, 곧 대전환이 필요하다. 장일순은 생명 사상에 기초한 생명운동으로 대전환을 시도했다.
“생명은 하나라는 거예요.” 장일순의 생명사상은 ‘하나’로 요약된다. 하나인 생명이 온 우주에 스며 있고, 모든 것은 이 생명에 참여하여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하나를 이룬다. “생명운동의 핵은 전일성”이다. ‘전일성全一性’은 여럿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인 생명의 힘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생명은 물질에서 나왔으니 이 공동체는 생명체를 비롯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바로 자연이다.
“경쟁과 효율을 따지면서 일체가 이용의 대상이 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생명이 존재하기가 어렵게 되고, 생명이 무시된다.” 모든 것이 ‘하나인 생명’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질서에 상응하는 삶의 이치는 경쟁과 효율이 아닌 협동과 절제이며, 배타적 자기 증식이 아닌 자발적 자기 제한이다. 세계의 질서를 거스르는 경쟁과 효율을 내세울수록 하나인 생명 공동체는 더 위험해진다.
장일순의 생명 사상: 우주에 가득한 생명
장일순의 생명 사상은 어릴 때 할아버지께 배워 익힌 ‘사람 공경’이 동학, 노장, 불교, 성서 등의 가르침에서 자양분을 얻어 인간을 넘어 우주 만물로 그 지평이 넓어졌다.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 하늘과 땅이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는 이 선시禪詩는 “생명은 하나”라고 말한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 十方”, “조그마한 티끌 안에 우주”가 있다. 모든 것 안에 다른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소중하고 고유한 존재 이유가 있다.
“하늘과 땅과 세상의 돌이나 풀이나 벌레나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는 것이 없다.” 장일순은 동학, 특히 제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해월은 제1대 교주 수운水雲 최제우의 ‘시천주天主也’ 사상을 만물로 확대했다. “천지만물 막비시천주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 사람뿐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중에서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까지 공경해야 한다. 바로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三敬사상’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한울님을 모심으로써 서로 이어졌으니 밥을 먹는 것은 ‘이천식천以天食天’, 곧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경이와 경외의 행위다. 밥 한 사발을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사심 없는 자기 부정으로 겸허하게” 자신을 비운 예수님 앞에 남는 것은 “아버지밖에” 없다. 하느 님은 생명 자체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므로 예수님에게는 “생명밖에 없다.” “일체의 사물은, 우주 일체는, 우리 모두는 거기에서 와서 도로 거기로 가는” 것이다. 생명에서 나와서 생명으로 돌아가니 모두가 하나다.
장일순은 생명 사상의 근거로 불교와 동학과 성서의 가르침을 거침없이 인용한다. 종교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말씀은 다 같아요. 어차피 삶의 영역은 우주적인데 왜 담을 쌓습니 까? 그것은 종교의 제 모습이 아닙니다. 장일순은 ‘하나인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 동학에도 있고, 예수님 말씀에도 있고, 부처님 말씀에도 있고, 노장에도” 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장일순의 삶의 원리: 겸손
모든 것이 하나라는 생명 사상에 상응하는 삶의 기본 태도는 겸손이다. 겸손은 내가 다른 모든 것 덕분에 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한다. 시인 김지하가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라고 했듯이, 장일순은 자신의 호 ‘무위당’에 걸맞게 하지 않는 일이 없으면서도 하는 일 없는 듯 살았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겸손’이었다. 교만하면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를 내세우고, 겸손하면 상대를 존중하고 자기를 감춘다. 교만은 불경을 낳고, 겸손은 공경을 낳는다.
겸손은 자기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남을 도와서 남이 앞에 서게” 하는 마음, “꽃 하나 벌레 하나 풀 하나를.... 하심下心으로” 섬기는 태도다. “밑으로 기어라.” “개문류하開門流下라, 문을 활짝 열고 밑바닥 놈들과 하나가 돼야 해. 그래야 개인이고 집단이고 오류가 없거든.” ‘기는 것’은 겸손의 표현일 뿐 아니라 진리의 길이다. 세계는 아래에서 볼 때 제대로 보인다.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겸손을 강조했던 장일순 본인은 정작 어땠을까? “선생님은 남들 보고는 기어라, 기어라고 하면서 정작 선생님 자신은 기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한 지인의 말을 듣고 그는 바로 그 앞에 엎드렸다. 포장도 안 된 흙길이었다. 겸손humility은 흙humus에서 나온 사람human의 근원적 태도다. 기꺼이 땅에 엎드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람이 된다. 장일순은 겸손으로 ‘사람’이 되라고 권유했다.
장일순은 자신의 ‘호’로 1970년대는 ‘무위당无爲堂’을, 1980년대부터 는 ‘일속자一粟子’를 즐겨 썼다. “선생님은 어째서 ‘조 한 알’이라는 그런 가벼운 호를 쓰십니까?” 누가 이렇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 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지그시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거야.” 그는 조 한 알이라는 ‘호’로 자기를 내세우려는 충동을 추슬렀다. 겸손은 근대 이후 인간이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한 탓에 벌어진 오늘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절실히 필요한 태도, 생명 사상에 함축된 삶의 이치에 부합하는 태도다. 모든 것이 하나를 이루는 세계에서 다른 모든 것 덕분에 사는 우리에게 겸손은 삶의 근본 원리다.
장일순의 삶의 원리: 혁명 또는 대전환
생명 사상은 세계 인식부터 행동 양식까지 대전환을 하자는 혁명적 발상이다. 장일순은 혁명의 ‘자발성’을 강조한다. 강제된 혁명은 결국 서로를 파괴할 뿐 진정한 변화를 이뤄낼 수 없다.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 사상을 구현하는 혁명은 힘이 아니라 “보듬어 안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새로운 삶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니까요.” ‘줄탁동시啐啄同時’, 병아리가 알 밖으로 나오려고 껍질을 쫄啐 때 어미 닭이 밖에서 함께 쪼아야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상대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기고 기다려야 한다. 어루만지고 보듬어 안는 것은 딱딱함이 아닌 부드러움이다. 생명의 힘은 딱딱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에 있다. “모든 생명은 연하잖아. 그러니까 살아 있잖아. 그렇기 때문에 그 딱딱한 대지를 뚫고 나오는 거지.” “정말로 강한 것은 부드럽고 착한 것이야. 봄볕이 얼음을 녹이는 이치와 같은 것이지.”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이긴다.
장일순의 부드러운 혁명은 개량적이 아니라 근원적이다. “주판도 잘못 놓게 되면 털고 다시 가야 하는데.... 근원적인 문제서부터.... 다시 들여다보면서....” 아무리 오래 해 왔어도 잘못됐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할수록 잘못만 커진다. 생명운동은 산업 문명과 자본주의가 잘못이라는 선언이다. 잘못된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 가야 할 길로 가자는 제안이다. 서로를 죽이는 경쟁을 서로를 살리는 협동으로 바꿔야 한다는 각성이다.
장일순의 삶의 원리: 협동
“따지고 보면 내가 내가 아닌 것이지.” 협동은 ‘생명은 하나’라는 우주의 질서가 제시하는 삶의 이치다. 만물이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된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는 경쟁이 아닌 협동이다. 생명은 서로를 이기려 는 경쟁보다 서로 보듬고 돌보는 협동에서 나오고 자란다. 자본주의에서 경쟁은 보편적 질서가 되었지만, 경쟁이 심해질수록 인간과 자연의 고통은 늘어난다. 세계의 질서, 삶의 이치에 어긋난 탓이다.
“경쟁에는 협동이 없어요.” 장일순은 생명의 원리인 협동을 배격하는 경쟁을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는 승자 독식의 경쟁지상주의 세계에서 살지만, “이긴 자들을 있게끔 해 준 자들은 패자들이다.” 패자가 없으면 승자도 없는 법이다. 삶은 함께 기대며 걸어가는 것이다. “경쟁이 수반되면.... 효율을 따지게 돼.” 그러면 “일체가.... 적수가 돼.” 선의의 경쟁은 필요하다지만 현실에서는 한계 없는 “악의의 경쟁”이 판을 친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경쟁은 한계가 있는 경쟁, 실은 경쟁의 얼굴을 한 공생이다. 경쟁에 익숙해진 우리가 자연을 경쟁의 세계로 볼 뿐이다. 우리의 모습을 자연에 투사한 셈이다. 필요가 아닌 승리를 목표로 하는 경쟁은 끝을 보기 마련이다. 경쟁의 극단적 형태인 전쟁이 잘 보여 주듯이 경쟁의 결과는 파괴적이다.
1985년 원주에서 시작한 한살림운동은 ‘생명은 하나’라는 생명 사상을 땅과 농사에 적용한 협동운동, 곧 생명운동이다. “이 땅이 없으면 이 만물이 존재할 수가 있어요?” 무엇보다 만물의 근원인 땅이 건강해야 한다. “자기가 사는 게 뭐냐, 땅을 살려야지.” 자기를 살리려면 땅부터 살려야 한다는 말이다. 생명은 하나이니 한살림운동은 “누구를 무시하고 누구를 홀대할 수”가 없다. “우리끼리만 몸에 해롭지 않은 것”을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함께 가려면 상대를 어루만지고 보듬고, 나아가 상대의 처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말이지, 농약이 있는 농산물도 좀 먹어 줘야 되잖아?” 이렇듯 한살림운동은 “모두가 하 나가 되자는 운동”이다. 분열과 대립이 아닌 일치와 화합의 운동이다. 장일순은 한살림운동으로 그저 몸에 좋은 농산물을 먹자고 한 게 아니라 생명의 근본적 존재 양식인 협동과 공생의 삶을 확산하고자 했다. 한살림운동은 우주의 질서에 맞는 삶의 양식으로 함께 번영하자는 운동이다.
‘암을 모시다’: 장일순이 삶을 마무리하는 법
“이 암이 시대의 병 아닙니까?” 1991년 위암 진단을 받은 그는 암이라는 질병도 모든 것이 근본에서 하나라는 생명 사상에서 받아들였다. “자연 전체가 암을 앓고 있는데 사람도 자연의 하나인데 사람이라고 왜 암에 안 걸리겠어요.” 큰 병에 걸리면 우리는 으레 ‘투병’을 말한다. “‘투병’이라니? 뭐하고 싸운단 말인가? 암세포는 내 세포 아닌가? 잘 모시고 의논하면서 가야지.” 생명 사상으로 보면 내가 대상화해 싸워야 할 상대는 없다. 내가 어루만지고 보듬을 상대, ‘너’라고 불리는 다른 ‘나’가 있을 뿐이다.
암세포도 내 세포이므로 잘 모셔야 한다는 장일순의 태도는 우리에 게 ‘건강’이 무엇인지 묻는다. 건강은 단지 몸에 병이 없는 상태를 뜻하나? 몸에 생긴 병을 없애기만 하면 건강해지나? 이렇게 생각할수록 건강은 의료기술 등 다양한 수단에 의한 몸의 통제를 뜻한다. 그래서 건강은 의료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더 좋은 의료 ‘서비스’로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다. 건강은 상품이 되고 의료는 산업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의료산업이 우리에게 권장하는 건강이다.
의료산업이 고도로 성장한 오늘, 장일순이 암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좋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의료산업이 제안하듯이 오래 살면 좋은 삶인가? 질병 연구와 치료 기술의 놀라운 진전과 함께 의료산업은 노화를 포함한 모든 질병의 극복, 암묵적으로는 죽음의 극복을 궁극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죽음의 극복이 가져올 완벽한 건강은 몸에 대한 의료 기술의 완전한 통제를 뜻한다. 그때도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할까? 더구나 코로나19에서 보듯이 오늘날 최신 의료 기술이 다루는 다수 질병은 산업화 이후에 생겨난 질병이다. 의료 기술만으로는 온전한 건강도 좋은 삶도 보장되지 않는다.
건강은 단지 질병이 없거나 질병을 없앤 상태가 아니다. 몸이 ‘나’와 뗄 수 없는 ‘나’의 일부라면, 진정한 의미의 건강은 온전한 인간이 되는 힘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장일순은 ‘생명은 하나’라는 우주의 질서에 끝까지 충실할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할 것이다. 모두가 하나인 세상에서 사람만 건강할 수도, 나만 건강할 수도 없다. 사람의 건강과 세상의 안녕은 뗄 수 없다. 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나는 내 길을 간다: 낙관과 희망
“문명 자체가 지금 종말을 고하는 세상이고, 지구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런 시대”다. 장일순은 당시의 세계 현실을 누구보다 냉철히 직시했고 문제의 성격을 정확히 알았으며 그만큼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해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지 않아요? 어차피 사람은 자기 나름의 사는 즐거움이 있고, 보람이 있어야 하니까. 그러면 내일 망한다 해도 그냥 밀고 가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요. 또 한 가지는, 그렇게 하면 소망이 있다고 믿어요.” 자기 증식의 힘이 압도하는 현실에서 자기 제한의 삶으로 시도하는 대전환은 성공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큰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대전환의 시도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실패는 미래의 변화를 끌어 낼 원동력, 새로운 미래의 밑거름이다.
장일순은 한곳에 뿌리내린 토박이의 삶, 생명 사상, 겸손과 혁명과 협동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초대는 즐거움과 보람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을 준다. 이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아낌없이 나누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겸손하며 사양하는 검소한 삶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또한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서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지향했던 삶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에서 잊힌 삶, 오늘 이 시대에 꼭 회복해야 할 삶, 우리가 가야 할 우리의 ‘오래된 미래’다. 우리가 이 초대에 응할 때 세계는 파괴적 경쟁에서 벗어나 협동과 공생을 모색하는 공동의 집으로 변화할 것이다. 절망하지 않는 한, 희망은 있는 법이다.
1) 이 글은 다음 책에서 인용했다.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녹색평론사, 1997); 최성현, "좁쌀 한 알: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도솔, 2004);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편,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무위당 장일순을 기리는 생명의 이야기"(녹색평론사, 2004).
조현철
예수회 사제. 서강대 명예교수,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 대표, 녹색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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