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갚는 마음

2024-06-17     오현화

설마 했는데 비가 정말 그치지 않고 내렸다. 6월 8일, 밀양행정대집행 10주기(6월 11일)를 앞두고 전국의 활동가들이 ‘다시 타는 밀양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으로 모였다. 서울, 부산, 울산에서 시작해서 각 지역에서 하나둘 버스를 조직해서 천 명 가까운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버스 한 대를 조직해서, 아침 일찍 출발하는 버스에 떡과 비건김밥을 넣어 주고 오전 일정을 마치고 밀양으로 부지런히 달려갔다. 버스 차장을 맡은 활동가에게 김밥이 맛은 괜찮았냐, 버스 기사 아저씨는 괜찮았냐 자꾸 물으니까 “아유, 걱정 좀 그만해! 왜 이렇게 걱정이 많아!”란다. 같이 출발하지 못하니 걱정이 되는 거지 뭐.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말은 백 번을 들어도 마음이 아프다. 지금도 나는 전기에 의지해서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밀양행정대집행 당시 나는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기사로만 상황을 보고 동동거렸다. 뜯겨져 나간 자리들, 들려 나간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슴에 늘 얹혀 있었다. 이번 집회 당일에도 오전에 일정이 있어서 같이 버스를 타고 갈 수 없어서, 사전에 할 수 있는 실무들을 하고 점심 무렵에 버스를 쫓아갔다.

가는 길에 비가 계속 왔다. 추풍령 인근에서는 비와 안개로 앞이 어둑해서 산신령이 금도끼, 은도끼 들고 나타날 것 같았다. 대구를 지나 중앙고속도로 따라 청도 1터널을 빠져나오자 정면에 거대한 철탑들이 시야를 압도하며 우뚝 서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철탑이 이렇게 가깝게, 여럿이 세워져 있었구나. 다음 터널로 빨려들어가 밀양 영남루까지 계속 달렸다.

'밀양행정대집행 10년,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 웹자보 갈무리. (이미지 출처 = 녹색당)

집회 장소에는 아침 일찍 출발해서 사전 행사를 한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십 년 전의 현장으로 다시 오고, 누군가는 나처럼 빚을 진 마음으로 왔다.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어도 신발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비에 푹 젖은 신발을 보며 이거 어쩌냐고 하니 허허 웃기만 했다. 깃발들은 폭삭 젖어서 미역이 되어 버렸다. 가끔 빗물을 털어 줘야 하는데 사람들 옆에 있는 깃발은 그러지도 못해서 물 먹어서 무거워진 깃발을 가만 세우고만 있었다. 맨 앞쪽 천막에 밀양 어르신들이 오셔서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주민들도 밀양의 활동가들도 고맙다고만 했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돌아다니고 구호를 외쳤다. 음악이 나올 때마다 꽃무늬 바지를 입은 울산팀이 둠칫둠칫 춤을 췄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함께 힘을 모으고, 웃으며, 희망을 가지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마음으로 비를 맞으며 덩실덩실 길놀이를 했다. 밀양에서 정성껏 준비한 묵밥을 맛있게 먹고 출발하려고 하니 비가 그쳤다. 아니 뭐 이런 게 다 있담!

내가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활동가냐면 그렇지 않다. ‘활동가’라고 하지만 활동가 개개인의 활동 폭은 매우 다르다. 누군가는 단체의 전업 활동가로 노동자성을 가지고 활동하기도 하고, 전업이지만 프리랜서로 다른 방법으로 생계를 꾸려 가기도 한다. 나는 좀 느슨하게 연대하는 쪽이라 생계를 위한 다른 활동 짬짬이 품을 내고 있다. 교회 안에서 마을 안에서 사부작사부작 하는 정도다. 그래서 늘 현장에서 전력을 다하는 활동가들에게, 그리고 바로 그 현장에 빚을 진 마음이 있다. 그 빚을 갚는 마음으로 내 발이 갈 수 있는 현장을 간다.

새만금 갯벌도, 삼척 맹방해변도, 그리고 밀양도 현장에 갔을 때에 비로소 온몸으로 감각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말이나 글, 사진으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그것은 피조물의 부르짖음, 요청 혹은 노래이기도 하다.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마음의 무거움은 말라버린 갯벌과 파괴되는 해변과 거대한 철탑에서 실체화된 빚으로 나를 압도한다. 그 빚은 순간적으로 큰 절망을 가져오지만 우리는 이를 오롯이 마주하고 끌어안으며 서로의 손을 잡고 힘을 내고 희망으로 다시 나아간다. 그래서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강의를 듣거나 매체를 통해서 소식을 건너 듣기만 하지 말고 현장의 초대에 응답해 주기를 부탁드린다. 처음이라 뻘쭘해도, 이미 한 번 가 봐서 또 뭐가 있겠나 싶어도, 가면 또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다. 온몸으로 경청하게 된다. 모든 자리에 매번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때로, 정말 가끔이라도, 남의 빚이 아니라 나의 빚을 마주하고 끌어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도 나는 주어진 일들에 허덕이느라 많은 일을 그저 마음으로 응원한다. 그래도 달력을 요리 보고 조리 보면서 세종보에서 한 달 넘게 천막 농성하고 있는 동료들을 만나러 갈 날을 끄적인다. 주말에는 ‘전기, 밀양-서울’ 책의 탈탈낭독회에 가야지. 이번 낭독회에는 밀양의 활동가 어진 님도 오신다. 길 위에서, 산과 물이 있는 현장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 기대된다. 이렇게 나는 나의 빚을 마주하고 가만가만 토닥인다.

덧. 밀양 송전탑과 행정대집행 이야기를 알고 싶으시면 희망버스에서 이번에 상영한 동영상을 소개합니다. 

밀양행정대집행 당시 10대 고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밀양 주민으로, 청년 목수로, 활동가가 된 남어진 님의 이야기입니다.

오현화

가톨릭기후행동 공동대표, 마을 활동가, 세 아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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