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세계의 이중 잣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분쟁 상황이 코카서스 남부의 조지아(전 이름 : 그루지야)에서 발생할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이 상황을 촉발한 계기는 지난 5월 28일 조지아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다수의 찬성을 얻어 통과한 ‘외국 영향 세력의 투명성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에 따르면 조지아어로 정보를 전파하는 비정구 기구(NGO), 미디어, 재단, 인터넷 플랫폼은 외국에서 20퍼센트 이상의 자금을 조달받는 경우 외국 행위자로 등록하고 수입원을 공개해야 한다. 해당 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통계청(National Statistics Office)에 따르면, 인구가 370만 명에 불과한 조지아에서 4051개 단체의 NGO가 활동하고 있다. 비공식 출처에는 심지어 2만 5000개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중 대다수가 유럽과 미국에서 자금을 지원받고 있다. 독일 정당 재단 및 연구소와 같은 수많은 서구의 기관은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가장 비중 있는 조지아 텔레비전 방송국인 <이메디 티브이>(Imedi TV)는 미국 사모펀드 헌웰 파트너스(Hunnewell Partners) 소유다. 이라클리 코바키제 총리가 이끄는 '조지아 드림당'(Georgian Dream Party) 의원들은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고, 야당인 ‘통일민족운동당’ 의원 대부분은 투표를 거부했다. 이로써 살로메 주라비슈빌리 대통령의 거부권이 기각되었다. 정부와 야당 모두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고 있고, 야당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가입을 서두른다. 조지아는 2023년 12월부터 EU에 가입할 수 있는 후보 자격을 얻었다.
정부는 국가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2003년 비폭력 정권 교체로 이어진 이른바 '장미혁명' 같은 또 다른 '칼라(색) 혁명'을 막기 위해 이 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의회의 법안 심의 기간 중에 수천 명의 야당 지지자가 정부에 비판적인 조직들을 침묵시키기 위한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트빌리시에서 다시 벌였다. 시위자들은 집권당 의원들을 “노예들”, “반역자들”, “러시아인들”이라며 모욕했다.
러시아와 지도상 가까운 조지아는 EU와 미국에게 지정학적 중요성이 가장 크다. 그 때문에 EU와 미국은 이 새로운 법안을 저지하고 러시아에 맞서 조지아를 무장시키고 이 나라를 몰도바 및 우크라이나와 함께 NATO에 가입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조지아 정부는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에 관심이 있으므로 모스크바에 대해 실용적인 정책을 추구한다. 서방 정치인과 외교관들은 이 법이 조지아를 EU에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전국적 대규모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이와 동시에 수십만 정부 지지자도 최근 몇 주 동안 거리 시위를 벌였지만, 이런 사실은 서방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조지아 야당과 유럽연합 및 미국 관리들은 이 법을 ‘러시아 법’이라고 비난하며 2012년에 통과하고 2019년에 개정한 러시아의 ‘외국 에이전트 법’을 여기에 빗댄다. 이 법은 원래 해외에서 재정 지원을 받는 NGO에만 적용했지만, 현재 시행하고 있는 개정 버전은 금액에 관계없이 외국 자금을 받아 인쇄, 오디오, 시청각 또는 기타 보고서 및 자료를 출판하는 모든 개인 또는 그룹에 적용된다. 이에 해당하는 이들은 6개월마다 재무제표와 활동 보고서를 러시아 정부에 제출해야 하며, 1년에 한 번씩 당국의 감사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와 달리 조지아 법은 ‘에이전트’를 언급하지 않고 “외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조직”이라고 명시한다. 조직의 해당 정보는 등록부에 기록하고 매년 업데이트해야 한다. EU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법안이 철회되지 않을 경우 조지아 정부 구성원과 이 법안 통과에 찬성한 모든 의원을 상대로 EU 기금 지원과 EU 가입 협상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앤터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에 따르면, 미국은 “조지아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데 책임이 있거나 이에 연루된 개인”에 대한 비자 제한을 도입하길 원한다. EU와 미국은 지난 10월 조지아 의회 선거에서 야당을 지원하기 위해 특별 ‘감찰실무그룹’을 구성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의 가혹한 비판과 요란하게 위협적인 몸짓 뒤에는 눈에 띄는 이중 윤리와 이중 잣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조지아뿐만 아니라 원래는 러시아도 유럽과 미국의 해당 법률인 ‘에이전트 법’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여당인 조지아 드림당에 따르면 조지아 법은 1938년 미국에서 제정한 외국인 에이전트 등록법(FARA)을 기반으로 한다. 이 법은 미국 정책에 대한 외국의 영향력, 특히 독일 나치 선전 선동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외국 법인을 위해 정치적 또는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등록하고 문서화하고 이 활동을 승인받아야 했다.
초기에는 정치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기소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하원에 비(非) 미국인 활동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1947년 10월 30일에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이 위원회의 심문을 받았다. 1966년 개정 이후 FARA는 실제로 외국 세력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일하면서 미국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 개인에게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외국 에이전트’라는 용어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개인이나 단체는 실제로 외국의 명령이나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있음을 미국 정부가 입증할 수 있는 경우에만 FARA 적용을 받을 수 있다.
FARA가 활용된 최근 사례로는 도널드 트럼프의 2016년 대선 캠페인 및 러시아 정부가 미국의 대중 담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근거로 한 트럼프의 활동에 대한 조사가 있다. 2023년 아프리카 인민사회당(African People's Socialist Party)의 지도자 오말리 예시텔라는 ‘미국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음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FARA가 법무부로 하여금 정치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위협하고 범죄자로 만드는 일을 허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에서는 러시아 텔레비전 채널인 <러시아 투데이>, 러시아 통신사인 <타스>(TASS), <중국 글로벌 뉴스 텔레비전 네트워크>(CGNTV) 등이 외국 에이전트로 등록되어 있다.
2023년 12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은밀한 외국의 영향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패키지 법안을 채택했다. 이는 2024년 6월 유럽 선거를 앞두고 ‘은밀한 외국 영향력과 의심스러운 자금 조달’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위원회는 글자 그대로 이렇게 말했다. “푸틴 대통령이나 다른 독재자가 우리의 민주적 절차에 은밀하게 개입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투명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법률을 통해 외국 영향력의 위협에 대처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는 기본적 민주주의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자국의 법률이 정당화되는 반면, 유럽이나 미국 법률과 내용이 거의 다르지 않은 조지아 법률은 이러한 민주주의 질서 보호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현실이다.
게르만 호흐(Germann Hoch)
독일 프라이부르크 출생.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라틴어 및 그리스어,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과 독문학을 복수전공했다. 기쎈 대학에서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Deutsch als Fremdsprache)'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프랑크푸르트 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한국에 와서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일하고 정년퇴임한 뒤, 번역과 독일어 교육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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