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구 직원으로 산 23년, "나의 글로벌 직장 일기"

[인터뷰] 저자 최수향 박사

2024-06-07     정현진 기자

1997년부터 2021년 말 퇴직까지. 약 23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평화와 지속가능발전 교육을 위해 일한 최수향 박사(젬마). 그가 퇴직 뒤, 세계 곳곳에서 그간 살아 왔던 여정을 책으로 엮었다. 

유네스코 파견직으로 시작해 1998년 과장이 됐을 때, 언론은 그를 조명하면서 “여성 최초”, “최고” 등의 수식어를 붙였고, 국제기구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23년 뒤 퇴직한 그가 비로소 “나의 글로벌 직장 일기”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은 그 물음에 답하는 것 같지만, 일종의 반전을 선사한다. 어떻게 하면 국제기구에 발을 디디고, 그곳에서 승진을 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 아닌, 각국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건져 낸 삶과 일에 대한 태도들을 잔잔하게 담았다. 

최수향 박사는 이 이야기들은 “가슴 한 구석 빚진” 것에 대한 말들이며, “세계 시민으로 살면서 겪은 일상”이라고 했다. 또 “인생은 요란하게 준비할 것도 아니고,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것도 아니”라는 메시지라고도 말했다.

"나의 글로벌 직장 일기", 최수향, 도서출판 경계, 2024. (표지 제공 = 경계)

우연히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일을 시작했고, 또 우연히 유네스코 2년짜리 파견직에서 과장으로 발령된 사연으로 시작한 여정에서 최수향 박사는 끊임없이 “행운과 기적”을 발견하고, 감사한다. 여러 국가에서 그만큼의 우여곡절과 경험을 하고 만남과 헤어짐을 거치며, 주어진 길을 완주한 그는 ‘세계 시민’으로 살면서 겪은 일상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300여 쪽의 글에는 아주 특별하거나 충격적인 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건이나 쟁점, 일의 노하우를 전하는 내용은 없다. 다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상황들을 겪고 부딪히면서 결국은 건져낸 의미들을 만나게 된다.

카자흐스탄 작은 도시에 출장을 갔을 당시, 영하에 가까운 날씨에도 난방, 온수 공급도 안 됐던 호텔에서 작은 보온병의 온수로 머리를 감았던 에피소드도 그중 하나다. 머리감기는 물론, 양치와 세수까지 마친 뒤에도 보온병 온수가 남아 있던 기억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 대부분은 불필요한 덤이다. ‘졸졸이’ 샤워 꼭지와 보온병 한 통의 온수는 고맙게도 나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고, 지금도 물질적 욕구가 일 때면 나를 잡아주는 소중한 제어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64쪽)

베트남 산골 마을 유치원 아이들에게 카스텔라를 선물로 주고 싶었지만, 직접 나눠 주지 않고 선생님을 통해 전달한 이유를 말한 대목,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과자를 받아먹기 위해 차창에 매달리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받는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극심한 홍수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에서 수영장 있는 호텔이라는 안전망을 누렸다는 부끄러움을 말하는 대목, 그렇게 책 곳곳의 말들은 태도와 마음에 대한 것들이다.

최수향 박사와 반려견 디디. ⓒ정현진 기자

“사람 사는 곳엔 다 어느 정도의 고통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다는 진리”

23년, ‘글로벌 직장’을 통해 얻은 것들은 그를 ‘세계 시민’으로 성장시켰고, 살게 했다. 어떤 시민으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무엇에도 크게 흥분하지 않는다는 것. 세상 어디에도 온전히 지옥, 온전히 천국인 곳은 없다는 걸 체득했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 큰 지옥도 없고 이 세상에 큰 천국도 없고 조금 지옥, 조금 천국일 뿐이에요. 짐바브웨는 물을 얻는 것조차 정말 힘든 곳이었지만, 그곳에서도 삶의 달콤함이 있고, 보석 같은 삶의 순간들이 있어요. 세계 시민이라고 말을 한다면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나의 정의는 그 한마디예요.”

세계 시민으로서 어떤 태도가 가장 중요했는가 묻자, 그는 “편리와 환경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극단적 이분화하지 않는 태도”라면서, 그것은 결국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고, 어떤 이유로든 혐오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수향 박사는 “흔한 말이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든 비슷하다. 삶, 사람이라는 공통분모에 그저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결코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무엇에도 크게 흥분하지 않는 덕분에 삶이 단조롭기도 하지만, 그래서 편안할 수 있다”는 그는 “익사이팅한 즐거움이 있다면 불편함도 익사이팅하게 온다”며 웃었다.

“삶에 꿀팁은 없어요”

한국 최고 국제기구 여성 국장이 됐을 때, 그는 여러 경로로 성공 비결, 이른바 ‘꿀팁’을 찾는 물음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 기억에 대해 그는 책에, “큰 방향을 정하고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부지런함은 내게 없었다. 다만 토막 쳐진 매 순간에 대한 충실함과 그 연속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썼다.

다이어트, 입시, 건강, 재테크 꿀팁....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넘쳐나는 꿀팁들의 향연,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세태에 대해 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하고, 일종의 정보도 필요하지만, 그건 긴 인생에서 1센티미터 정도 나아가는 것"이라며, “사는 데 마치 도깨비 방망이 같은 꿀팁이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인생 준비는 열심히가 아니라 잔잔한 일상에서 준비하는 것”이고, 굳이 방법이라면, 충실함의 연속, 기회가 왔을 때, 기회라고 눈치채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수향 박사가 현재 온전히 자신만의 일상을 보내는 공간이다. 서예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기도 하는 이 작은 방 한 칸이 은퇴 뒤 그가 온전히 꿈꿨던 삶의 자리다. ⓒ정현진 기자

더 이상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

최수향 박사의 요즘 일상은 그의 기댈 언덕 같은 반려견 디디를 돌보는 것, 좋아하던 그림과 서예, 판화다. 그의 책에는 흔한 관련 사진 한 장 없지만 그가 직접 그린 이미지 삽화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노트 22권을 빼곡히 채운 일기다.

그는 60살을 넘긴 뒤, “실존주의적 충격을 받은 날이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의 3분의 2가 지났다는 생각이 강하게 왔어요. 3분의 1이 남은 건데, 돌아보니 내 안에 행복이 없는 거예요. 그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조금이라도 즐거운 일을 찾아보겠다고요.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일기 끝에 ‘오늘 디디는 좋았고, 그래서 나도 행복했다’라고 쓰는 날이 대부분인데, 그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하더라고요. 하루가 그렇게 열리고 닫히고, 시간이 소모적으로 흐르지 않아요.”

그의 경력을 보면, 퇴직 후에도 또 다른 일들을 하게 되기 쉽다. 후배들을 위한 강의, 실무와 관련한 자문 역할 등이 있을 테고, 실제로 요청이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최수향 박사는 자신의 인생에서 ‘일’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실무에서 떠나 현장감 없는 말들은 의미가 없고, 최상의 정보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 외에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금 외의 다른 수입을 욕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돈을 벌고 싶지 않아요. 돈을 버는 게 정말 죄스러워요. 이건 삶의 태도 문제인데요.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어렵게 사는 이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들에게 내가 해 준 게 없거든요. 세상을 떠날 날이 오는데, 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 뒤에 누군가 나에게 너 혼자 편하게 살다 왔냐는 꾸짖음을 듣는 거예요. 하지만 그땐 돌이키기 너무 늦잖아요.”

삶의 격차를 목격하는 일, 그러나 안전과 안락이 보장되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대해 그는 늘 불편했다.

“내가 내 직업으로 누리는 복지는 내 손안에서 분명히 느껴진다. 내 삶의 안락함과 그들의 힘든 삶을 맞대어 비교해서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동안 자주 경험한 이 격차에 대해서 항상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질문을 하나 한다. ”그래도 되는 건가?“ 이것이 뜬금없는 질문이어야 할까?”(239쪽)

남은 생의 가장 큰 두려움, 죄스러움을 없애기 위해, 그리고 마음 편하게 떠나기 위해 그는 또 자신의 몫을 찾는다. 할 수 있는 한 기부를 더 많이 하고, 이번 책 인세도 모두 기부할 예정이다.

은퇴 뒤의 일상은 ‘다행’을 찾는 연습이라는 그는 책의 끝에 이렇게 적었다.

“그럴싸한 모습으로 남 앞에 나설 일도 없고, 주위로부터 큰 부러움을 살 일도 없다. 그런 일상 속에서 다행스럽게 보낸 하루에 진심으로 만족해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폼 나는 일’이 개인의 행복과 관련해서는 다 부질없음을 깨달은 결과다. ‘다행’인 하루는 소모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