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맛, 손으로 살아가는 맛
우리 집 다랑논 두 배미의 면적은 도합 600평이 조금 못 된다. 시골에서 이 정도 면적이면 논농사 짓는다고 말을 꺼내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작은 크기. 그럼에도 몇 십, 몇 백 마지기 논농사를 짓는 대농 못지않게 모내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하는데, 그 까닭은 모내기를 손으로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모를 숭군디야? 이앙기로 숭그믄 30분도 안 걸릴 거인디.…(쯧쯧)”
내가 모를 심는 동안 동네 아저씨 한 분은 나를 만날 때마다 그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아저씨도 습관적으로 입에 붙어서 하시는 말씀일 뿐이다. 지난 14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손으로 모를 심었더니 이제는 마을 사람들도 그러려니 한다. 한때는 그분들도 ‘누구나 손모내기를 하던 시절’을 살아왔으니 우리들 하는 짓이 크게 별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새록새록 ‘나는 별일 없이 산다’는 노래의 노랫말처럼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즐거웁게, 신나게, 재밌게’ 모내기를 만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모내기를 앞두고 있을 때면 물에 잠겨 있는 논이 태평양 바다라도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곤 했다. ‘대체 언제 끝나려나’ 싶어 조바심이 나며 한없이 심란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한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누룽지라도 입에 물고 있는 듯이 맛을 느끼며.
그러고 보니 필사를 할 때도 그렇다. 몇 년 전부터 좋은 책을 만나면 손글씨로 따라쓰기를 하고 있는데, 처음 얼마 동안은 손이 너무 아프고 그 느린 속도감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한자어를 쓸 때는 더하다. 마치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글을 쓰는 것 같다.) 내 마음은 벌써 저만치 앞서 달려가 있는데 손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손이 한없이 미련하게 여겨져서 ‘더 빨리 쓰지 못하겠니?’ 채근하는 태도로 필사에 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저만치 앞서서 달려 나가려는 마음 자체가 없다. (마음이 손에 딱 붙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음과 손 사이의 갈등과 실랑이가 없으니 훨씬 힘이 적게 들고 그렇기에 힘들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게(또는 덜 하게) 된다. 큰 저항감 없이 그냥 쓰게 되는 것이다. 내가 따라쓰기 하고 있는 텍스트의 의미나 여운은 뒤로하고서라도 손이 자기 속도대로 움직여 나가는 것 자체로 깨알 같은 기쁨을 ‘맛’보면서.
그렇다. 문제는 맛이다. ‘손맛’이라는 낱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손으로 하는 일에는 티가 나게 마련이다. 이앙기로 모를 심은 이웃 논의 풍경과 손모를 심은 우리 논의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손으로 쓴 글씨, 손바느질이 된 옷감, 손으로 만든 도자기.... 손을 써서 하는 일은 확실히 덜 반듯하고, 더 투박하다. 하지만 거기엔 분명 손맛이 있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그 정감 있는 맛. 그 말인즉 손에서 멀어질 때, 손으로부터 떠나갈 때, 맛도 함께 사라질 거라는 얘기다.
내가 이번에 모내기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나에게 손모내기를 고집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손이 많이 가는 농사를 짓는다고 수확물을 비싸게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우러러본다든가, 나라에서 표창장을 준다든가, 세금을 면제받는다든가 하는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맛있게 살고 싶어서요’라고 말해야겠다. 정말이지 이 맛을 아는 이상 얼렁뚱땅 후닥닥닥 해치워 버리듯이 손을 빼버리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그게 도대체 어떤 맛이냐고 꼬치꼬치 묻는다면? 안 쓰던 근육을 쓰게 되니 근육이 자극을 받아 아프면서 시원해지는 맛, 단기간에 내 손이 커지는 것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맛(진짜다. 모내기 하기 전과 하고 나서, 손의 크기가 다르다), 내가 심은 모가 그려내는 선이 예뻐서 자꾸만 보고 또 보게 되는 맛, 논의 질퍽거림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비틀거리면서도 애써 균형을 잡아가는 맛,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을 정도의 내 속도를 지켜가며 일하는 맛, 손에서 거머리를 떼어낼 때 자꾸만 몸이 길어지는 거머리를 쭉쭉 잡아당기는 맛.... 실로 다양한 차원의 맛을 줄줄 읊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 손모내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나 또한 언제까지 이 맛을 만끽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손맛과 사는(살아가는) 맛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때때로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손맛을 기억하고 되살리는 일이 쓰레기를 줍고, 일회용품 사용을 멀리하고, 환경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우리 삶을 어루만져 줄지도 모른다.

정청라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무관심, 무 호기심의 삭막한 땅을
관심과 호기심의 정원으로 바꿔 보려 합니다.
아이들과 동물들의 은덕에 기대어서 말이죠.
무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명랑한 어른으로 자라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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