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식별? 성소 모임? ‘선택된 이들’만 하는 거 아닌가요?

2024-06-03     김예슬

이번 청년 칼럼에서는 결혼 전 성소 식별의 경험과 결혼 후 부부가 교회에서 겪은 신앙생활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2회(6, 7월) 집필 맡아 주신 김예슬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본당(성당)에 신학생이 있는 경우, 그 신학생인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여름방학을 맞아 본당으로 돌아오는 학사님은 입는 옷-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와 재킷-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제품까지 몇 년 남았는지도 본당 신자들은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신부나 신학생처럼 거룩한 길을 걷는 사람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따로 뽑아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본당 공동체 구성원 중에 수녀가 되고자 했던 자매도 분명 있었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알게 된 경우는 없었다. 사제가 되는 방법은 상식처럼 널리 알려진 반면, 수도생활 그 자체에 대해서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도서관의 제한 구역처럼 신비롭게 가리워져있었다. 본당마다 수녀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남양성모성지 초봉헌실 ⓒ김예슬

서른을 앞두고 있던 어느 겨울날, 평소 나들이도 자주 다니고, 가족 저녁식사도 함께 했던 외할아버지께서 4기 암을 진단받고, 4개월의 짧은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자주 뵙던 할아버지의 빈자리는 가족 모두에게 큰 슬픔이고 충격이었지만, 내게 유독 더 크게 영향을 미쳤는지 근본적인 가치관이 흔들렸다. 외할아버지께서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모 수녀님 두 분이 병문안을 오셨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할아버지 장례식 때 또 뵙게 되었고, 이모 수녀님들을 ‘신비롭고 거리감 느껴지는 수도자’의 모습이 아닌 ‘오랜만에 만났지만 친근하게 느껴지는 가족’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은 수도자의 삶을 궁금해 하게 된 첫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결혼으로 성가정 이루기’가 당연하다고 여겨 독신이나 수도 성소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를 잃고 ‘인생이 참 덧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자,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그나마 의미 있게 살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도자로 사는 삶은 어떤 가치가 있으며, 어떨 때 보람을 느끼는지, 온갖 질문이 온 마음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막막했다. 무엇보다 ‘성소 식별’을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나’를 수도자의 길로 초대하고 계신지도 알 수 없었으니 ‘수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혼자 그 답을 찾으려고 헤매던 중에 피정을 가게 됐다. 오랜 기간 번역 봉사를 하며 활동하던 교구 청년부에서 봉사자를 위한 피정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주제 성경 구절을 묵상하는 침묵 피정이었기에 다른 청년들과 친교를 나누는 대신 서로 외딴곳을 찾아 고요 속에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시간을 보냈다. 성경 속에서 “과연 나에게 수도 성소가 있을까?”에 대한 답을 감히 찾고자 했다. 내 안에는 ‘예수님께서 나를 수도자의 삶으로 초대하고 계시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예수님과 친밀해지겠구나’ 하는 기대 및 떨림과 동시에 ‘만약 내가 수도자가 된다면 가족과 친구들과 영영 떨어져서 살 수 있을까? 지난 8년 동안 미국 유학을 뒷바라지를 해 주며 나를 위해 희생하셨던 부모님을 배신하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 애써 쌓아 온 내 경력은 다 의미 없어지는 걸까?’와 같은 현실적인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러던 중, 루카 복음 5장 11절을 만났다. 그때 피정의 집 경당의 텅 빈 성가대석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다. 유명한 구절이라 잘 알고 있던 터라 여기까지 읽었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구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2)에서 지금도 여전히 울컥하는데, 그날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만나자마자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다. 분명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고 기도하면서도, 사실상 내가 가진 그 무엇도 버릴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부르고 계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성소 식별에 대한 답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루카 복음서 5장 11절 ⓒ김예슬

그날 저녁, 청년부 피정 담당 수녀님께 면담을 청해 처음으로 성소 식별에 대해 고백했다. 수녀님은 차분하게 나의 속이야기를 들어 주셨고, 내가 진정되자 수녀원 성소 모임에 한 번 나와 볼 것을 권유했다. 알고 보니 거의 모든 수도회가 한 달에 한 번, 예비 회원을 대상으로 정기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주보에 수도회별로 성소 모임 장소, 시간, 장소, 문의할 수 있는 연락처까지 모두 공지하고 있다.)

그때부터 성소 모임을 1년 반 가까이 다녔다. 성소 모임에는 수녀원 입회 시기가 정해진 자매님, 성소를 계속 식별 중인 자매님, 친한 수녀님의 초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하는 자매님 등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성소실 수녀님과 소풍도 가고, 다 같이 미사를 드리기도 하고, 그냥 차와 간식을 먹으며 수다 꽃을 피우거나, 수녀님들이 정성스레 준비해 준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신부를 초청하여 다양한 주제에 대해 특강을 듣기도 했다. 1박2일 피정처럼 서울을 벗어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임은 한 달에 주말 하루 약 4시간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이 성소 모임이 마치 고퀄리티 ‘당일 피정’ 같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을 참 좋아했고 내게 꼭 필요한 시간들이었기에 지금도 이 주제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단 한 번이라도 성소 모임에 나가 보라고 추천한다. 수도자가 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결혼을 할지 독신으로 살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한 게 없다면 성소 모임의 경험이 분명 예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거듭날 기회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끝내 입회하지 않게 되더라도 여생을 신앙인으로 살아갈 젊은이들의 신앙 토양을 비옥하게 가꿔 주는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점점 많은 수도회가 성별과 나이 제한을 느슨하게 풀고 성소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참 반갑게 여기는 이유다.

나의 수도 성소 식별 과정은 마치 예수님과의 뜨거운 연애 같았다. 그래서 수도원 입회는 연애 끝에 이어지는 결혼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사랑하는 이와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하며-소통 창구는 다름 아닌 기도와 묵상-그분의 부르심을 계속해서 알아차리고자 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수도회와 입회 희망자도 마치 반려자로서 서로 맞아야 하는 것이었다. 마치 결혼도 두 사람의 뜻이 맞아야 하듯이, 수도회나 입회 희망자 어느 한 쪽만 원한다고 이루어질 일이 아닌 것이었다. 

나의 경우도 그러한 이유로 한 번은 입회 시기를 늦췄고, 결국 성소 식별 과정의 끝이 입회가 아닌 좌절이었다. 수도자의 삶이 내 길이라고 확신했던 만큼, 마치 굳건히 서 있던 땅이 끝도 없이 내려앉은 것처럼 그 이후로 방황했지만, 몇 달의 시간이 흐르니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날 수도자로서 자신을 그분께 봉헌하는 삶이 아니라, 평신도로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역할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그리하여 오늘도 세상 안에서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해야 주님 보시기에 참 좋으실지 고민하여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유한함과 허무함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던 시기에 가슴 뜨겁게 성소를 식별할 수 있었던 시간을 허락해 주셨음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면서.

김예슬(아기아가타)

프리랜서 한영번역가,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청년부 예로니모 번역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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