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상을 예방할 ‘민족 화해’

2024-05-17     백장현

‘민족 화해’ 하면 많은 사람은 과거 6.25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남북 간 적대 상태를 완화하기 위한 도덕적·종교적 가르침쯤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민족 화해’는 남북 간 문제만이 아닌 남남 간 현안이고,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전쟁의 참상을 예방할 매우 절실한 현실적 과제다. 이는 2020년 충남 아산시에서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했던 6.25 전쟁 희생자 전수조사 결과물인 '아산 민간인학살 전수조사 보고서'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아산시의 6.25 전쟁 희생자 전수 조사

얼마 전 이 조사를 주도했던 분과 만나 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조사팀은 아산시 지원을 받아 6.25 전쟁 당시 사망했던 희생자 유족, 민간인 학살을 목격한 목격자, 이를 전해 들은 전문자 등을 면담해 희생자 신원, 희생 배경, 가해자 및 가해지휘명령체계, 학살 과정을 조사했다고 한다. 아산시의 12개 읍·면·동, 총 137개 리·동에서 443명을 면담해 그 진술을 들었는데,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토로했다. 끔찍한 얘기를 반복해서 듣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시 면접조사를 담당했던 두 사람 중 한 분은 병으로 돌아가고, 다른 한 분은 몸져 누운 채 한 동안 자리보전했다고 한다.     

참으로 끔찍한 역사였다. 전쟁은 인간 내부에 있는 악마를 판도라 상자에서 불러내 인간 세상을 아수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산 민간인학살 전수조사 보고서'는 읽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조사팀에서 확인한 바로 6.25 전쟁 시기 아산군에서 희생된 민간인 숫자는 최소 2800명이라고 한다. 민간인 희생자 전수조사를 아산시에서 처음 했기 때문에 아직 전국적으로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개 군에서 발생한 희생자 숫자가 이 정도라면 전국 226개 시·군·구 전체의 희생자 숫자는 가늠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아산군 민간인 학살의 특징 중 하나는 15살 이하 어린이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1950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수복하는 과정에서 신창면, 송악면, 염치면 등지에서는 가족 단위의 학살이 일어났고, 아기를 비롯한 어린이들이 학살되었다. 또 1951년 1월 1.4 후퇴 무렵 배방면에서는 가족 단위의 학살이 다시 발생해 상당수 어린이가 또 희생되었다. 이때의 학살은 미래 보복을 예방하기 위해 벌였던 만행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성장해 훗날 가해자에게 보복할 것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남자아이들만 학살했던 것이다. 아산시 배방면의 경우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구금 단계에서 풀어 주었지만, 부모와 가족을 따라온 어린아이들이 그대로 부모 곁에 머물게 되자 모두 학살하였다. 신창면 등에서는 보복 학살로서 당사자만이 아닌 가족 모두를 죽이면서 어린이들까지 학살하였다. 학살의 방법도 매우 잔혹했다.

6.25 전쟁 당시 사진 갈무리. (사진 출처 = ko.wikipedia.org)

전쟁 전 갈등 구조 · 문화가 희생자 규모를 키워

아산군 민간인 학살의 또 하나 특징은 희생자 규모에서 지역 간 편차가 크다는 점이다. 배방면, 신창면, 염치면에서는 희생자 수백 명이 발생했던 반면 둔포면 등에서는 수 명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면 별 차이가 크고, 또 마을 별로도 차이가 크다. 당시 수복 직후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정책은 경찰서와 지서를 통해 아산군의 모든 읍면에 공통 적용되었다. 그런데 지역별 편차가 크다는 것은 또 다른 변수가 작용했다는 의미다. 당시 지역별로 각 지역 사회가 갖고 있던 갈등 구조와 문화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갈등 구조는 지주와 머슴·소작인 사이 갈등이고, 다음으로 씨족 간·마을 간 갈등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마을 구성원들이 해방 후 이념 갈등 속에서 형성된 진영 대결구도에서 한쪽을 선택하며 강화되었고, 전쟁이 발발하자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동란 중 희생자가 거의 없었던 지역이 있다. 음봉면 덕지리가 대표적인데, 덕지리는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인공이 시작되자 채 씨를 중심으로 한 마을 어른들이 회의를 통해 마을 이장이었던 채 아무개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며 인민위원장을 맡겼다. 어른들이 채 아무개에게 당부한 것은 사적 감정으로 주민들의 뺨 한 대라도 쳐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마을에서는 이장과 마을 어른들이 협력해 인공 중에 궐기대회조차 열지 않았다. 인민재판이라고도 불렸던 궐기대회는 아산군 거의 모든 마을에서 열렸고, 여기서 가해를 당했던 사람들과 그 친인척들이 수복 후 보복을 하면서 대량학살로 이어졌던 것이다. 수복 후 덕지리 주민들은 일치단결해 인공하에서 인민위원장과 다른 보직을 맡았던 주민들까지 보호해 희생자를 한 명도 내지 않았다. 타 지역의 경우 인공하에서 인민위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던 사람들은 부역자로 몰려 거의 다 처형되었다.

덕지리 사례는 평소 신뢰에 기초한 화합 문화가 전쟁 중 학살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전쟁 전 주민들 사이 화합과 평화 문화를 갖고 있었던 덕지리는 이웃 마을인 강청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강청리는 전쟁 전 지주·양반과 머슴·소작인 사이 극심한 갈등이 내연하고 있었고, 이는 전쟁이 발발하자 90여 명의 엄청난 희생자 양산으로 이어졌다. 평소 화합 속에 평화의 문화를 갖고 있던 마을과 내적 갈등이 심했던 마을이 전쟁과 폭력이라는 상황을 맞았을 때 어떻게 달라지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민족 화해’가 생존과 번영의 필요조건

현재 한국 사회는 갈등과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날이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양극화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보수·진보 양 진영으로 나뉘어 첨예한 대결을 벌이고 있다. 양 진영 사이에는 대화가 단절돼 있고 혐오와 불신만이 팽배하다. 또한 양 진영 모두 강경파가 득세한 상태여서 화합과 통합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어렵다. 정권만 장악하면 법과 검찰을 동원해 어떻게든 상대를 말살하려고 시도한다. 이 상태에서 만일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엄청난 유혈 사태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의 갈등구조는 과거 농업사회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첨예하다. 남북이 적대 상태에서 무한 군비경쟁을 벌이고 있는 한반도에서 전쟁은 언제든 터질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사시 참극을 예방하기 위해서, 또 갈등과 대립 구조를 완화하고 통합과 평화의 사회로 가기 위해서 ‘민족 화해’가 필요하다. 민족화해 없이는 어떤 미래 구상도 현실화되기 어렵다. 민족국가 단위로 각자도생하는 작금의 냉혹한 국제정치 환경하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민족 구성원 간 차이보다 공통점을 중시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저서 "통일코리아 가는길", "북핵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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