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술 파밀리아로 가는 길-이주 패러다임의 대전환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가톨릭교회는 초창기 이주민의 교회에서 시작했지만 근대 이후 이주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여기는 경향이 농후했다. 왜 필요악인가? 첫째는 바티칸이 있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이주는 대부분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즉 이주 동기 자체가 극심한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적인 성격이 짙었다. 둘째는 이주 자체가 갖는 본질적 불안정성 때문이다. 이주는 그 본질이 익숙한 곳에서 뿌리를 뽑아서 낯선 환경 속에 다시 뿌리내리는 매우 스트레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교회 입장에서 이주는 본당(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 공동체를 위협하는 요인이며, 공동체를 떠나 이주하는 신자들을 목자 없이 떠도는 양 떼처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오늘날 아직까지 존재하는 스칼라브리니 선교회(정식 명칭은 성 보로메오 이주사목 수도회)와 같은 이주사목의 유력한 사도직 단체들의 뿌리는 바로 이러한 불안정한 처지에 놓인 양 떼들의 목자가 되려는 동기에 있었다. 한마디로 20세기 초반까지도 교회는 이주하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관심을 가졌을 뿐, 이주 자체에 대하여 천착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물론 이는 비단 교회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주는 오늘날과 달리 20세기 초중반까지 인기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이주가 초유의 관심을 모으게 된 것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혼란은 중부 유럽에 파멸적 영향을 끼쳤다. 중부 유럽을 그나마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던 세 거대 제국이 파멸을 맞으면서 엄청난 혼란-이 혼란은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어진다-이 일어났다. 우선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발칸반도에서 다뉴브강 상류까지 아수라장이 되었고, 독일제국이 해체되면서 폴란드가 성립되었다. 문제는 당시 폴란드의 정치 지도자였던 피우수트스키는 예전의 폴란드-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 연합(이를 미엥지모제, 즉 두 개의 바다 정책이라고 부른다. 북해에서 흑해까지의 폴란드라는 의미다)이라는 엄청난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이 야심은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새로이 등장한 소비에트연합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만들어진 폴란드 영토가 예전 독일제국과 러시아제국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소련은 원래 폴란드의 영토였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부를 자신의 영토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반면 폴란드에게는 그 보상으로 동프러시아와 슐레지엔, 포메른을 넘겨주기로 했다. 이는 독일의 입장에서는 12세기 이후 이른바 동방식민운동으로 개척했던 모든 영토를 잃는 것을 의미하였다. 더 큰 문제는 나치 독일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혹독한 희생을 치렀던 중부 유럽 국가들이 아예 독일계 시민들을 추방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들의 입장도 이해가 가는 것이 체코슬로바키아나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침공은 그곳에 사는 독일계 민족들의 보호를 명분으로 삼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부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이러한 영토 요구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그리고 혹독한 수탈에 대한 반독 성향으로 인해 독일계 시민들을 추방했다.
그 결과 전후 서독 지역에만 난민이 대략 1200만 명에서 1700만 명 유입되었다. 이는 전쟁 사망자수를 훨씬 넘는 숫자로, 역설적이게도 전후 독일 경제 재건은 이렇게 유입된 인구 여력으로 할 수 있었다. 전후 독일계 시민 추방은 전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대략 200만 명 독일계 난민이 보복과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고 추정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대규모 이주로 인해 시민 사회와 교회는 이주 자체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새롭게 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톨릭교회의 정신적 지주는 교황 비오 12세였다. 비오 12세 교황만큼 역사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는 교황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1999년 영국의 저널리스트 존 콘웰이 매우 논쟁적인 책 "히틀러의 교황: 비오 12세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썼을 때, 비오 12세는 역사가들 사이에 엄청난 논쟁의 한복판으로 소환되었다. 콘웰이 비판했던 것은 비오 12세의 반유대주의적인 언행과 나치 정권에 대한 침묵이었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가 지적했듯이 비오 12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인도주의적 참상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에둘러 나치 정권을 비판했다. 실제로 독일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비오 12세가 연합군의 편을 들고 있다고 강하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바라보는 비오 12세의 시각은 1942년 크리스마스 라디오 연설에서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류는 전쟁의 폭풍으로 인하여 고향에서 떨어져나가 이국땅으로 흩어진 수많은 유배자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언자의 탄식에 어울리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상속의 땅은 외국인들에게 넘어가고 저희의 가옥들은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애가 5,2) 또한 인류는 자신의 잘못 없이, 때로는 국적 때문에 혹은 때로는 인종 때문에 죽음이나 점진적인 절멸로 내몰린 수십만 명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연설은 매우 뜻밖에도 교황청에서 인권을 언급한 최초 연설로 유명하다. 이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여기에서는 더 설명하지 않고 이주 주제만 계속 하자. 위의 인용문은 두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째는 전쟁으로 인한 이주고, 둘째는 나치 독일의 악명 높은 인종청소, 즉 홀로코스트다. 특히 후자로 인하여 나중에 신생 이스라엘의 총리가 된 골다 메이어는 “나치라는 공포의 시기 두렵기 짝이 없는 순교가 우리 민족에게 닥쳤을 때, 교황의 목소리가 희생자들을 위해 울렸다. 우리 시대의 삶은 매일의 전쟁이라는 폭풍 너머의 위대한 윤리적 진리에 관하여 말하는 목소리로 인하여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첫째 주제인 전쟁으로 인한 이주는 전쟁 난민 대량 발생에 따른 인도주의적 비극에 관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으로 인하여 난민이 상대적으로 적게 발생했던 것에 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전격전으로 대표되는 깊숙한 종심 돌파가 중심이었고, 이러한 전술 변화는 불가피하게 수많은 민간인이 필사적으로 전쟁을 피해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비오 12세는 이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들의 희생을 애도하였던 것이다. 1944년 전쟁의 축이 연합군으로 기울고 특히 러시아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한순간에 폴란드와 동프러시아까지 밀어닥치자 독일에서도 엄청난 패닉과 더불어 민간인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즉 1942년 라디오 연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전무후무한 인도적인 참사로 홀로코스트와 함께 지목되는 전후 독일인 추방에 대한 예언적 애도가 된 것이다.
전후 독일계 추방이 워낙 드라마틱해서 다른 이주 현상들을 가려 버렸지만,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와 그리스 같은 과밀화된 구대륙 국가들에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인력난이 심각한 신대륙 국가들로 계속 이주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인구 이동, 즉 이주가 단지 과잉인구 국가에서 과소인구 국가로의 이동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주에는 공간과 인구 밀도뿐만 아니라 부의 생산이라는 경제 원인이 더 근원 요소로 작동하였다. 특히 마샬 계획에 따라 전통적 선진국들의 경제가 살아나면서 저개발 국가들의 국민들은 일자리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주를 선택하게 되었다. 즉 이주의 양극화-계속해서 인구가 유출되는 저개발 국가와 계속해서 인구가 유입되는 고개발 국가-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고숙련 고학력 인구가 계속해서 유출될 수밖에 없는 저개발 국가는 바로 그 ‘두뇌 유출’로 인하여 산업구조는 계속 후진화되고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이주는 단순한 필요악의 문제가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글로벌한 흐름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 교회는 이주에 대한 교리를 새로이 정립할 때가 되었다. 그 역할은 비오 12세에게 돌아갔다.
김민 신부(사도 요한)
예수회 한국관구, 예수회 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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