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지 않겠습니다", 송령이골에 추모비 세우며
제주4․3을 걷는다는 것
아름다운 자연경관, 한 번쯤은 살아 보고 싶은 곳, 은퇴하고 나면 편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은 제주도.... 제주 사람으로서 제주도에 대한 칭찬을 듣는 것은 기쁘고 뿌듯하다. 하지만 난개발로 신음하는 제주, 쓰레기로 덮여 가는 제주, 강정해군기지의 전철을 밟는 제2공항 건설 문제로 고통받는 제주를 생각하면 아프다. 심지어 오랜 시간 척박한 환경과 유배지로 무엇보다 4.3이라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제주를 생각할 때 착잡하다. 제주 곳곳에는 ‘다 함께 미래로 빛나는 제주’라는 현수막이 달렸다. 현 제주도정의 슬로건이다. 제주의 아름다움과 고유함을 빛내면서 도민이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는 뜻일 것이다.
예수살이공동체 제주4.3순례단은 ‘제주 4.3을 모르고서는 제주의 진정한 풍경을 볼 수 없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라는 슬로건을 들었다. 과거, 역사, 공권력, 희생자....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과거팔이’며 현재와 미래의 걸림돌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살이공동체는 가속 페달을 밟는 세상 앞에서 짧게 짧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소비사회에서 ‘오프(off)’를 외쳤던 1990년대 후반부터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고자 자문하며, 지상에서 천국이 진정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걸어왔으니까.
우리는 또 한 번의 걸음을 위해 다시 제주를 찾았다. 올해로 두 번째다. 4.3의 시발점이 되었던 제주북초등학교와 제주관덕정 일대, 제주4.3평화기념관과 광치기해변, 다랑쉬동굴, 오라리방화사건 현장 등 여러 4.3유적지, 화해와 상생의 상징인 영모원까지 2박3일 동안 4.3을 머리와 가슴에 품고 순례했다. 역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분노에 차서 밤을 새우며 토론하기도 했다. 참가자 모두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슴에 남겼다.
송령이골, 우리를 비통하게 했던 처참하게 버려진 주검의 흔적
그중에서도 우리를 오래도록 잡아끌었던 유적지가 있었다. 바로 송령이골이다. 제주도의 한 집 건너 한 집은 4.3으로 가족을 잃었을 정도로 해방 이후 난세 속에서 서구열강의 힘겨루기, 좌우 이념 대립 가운데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어느 하나 서글프지 않은 죽음이 없고 어느 하나 원통하지 않은 사연이 없다. 하지만 송령이골에 묻힌 이들의 이야기는 특별했다. 대부분의 유적지에는 ‘4.3유적지’라는 입간판이 자리했고 추모비가 세워 있었으며, 유족과 지역문학인들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시문이 새겨 있었다. 하지만 송령이골은 입간판도 없고 안내 표지판도 너무 작아서 찾기 어렵고, 공식적인 추모비도 없다. 다만 우리처럼 이곳을 찾아와 진혼제를 올리는 이들을 만났다는 것, 조그만 설명문이 여기가 4.3유적지임을 알게 해 주었고 그래도 햇볕이 잘 든다는 것이 위안을 주었다.
1949년 1월에 의귀국민학교에서 토벌대와 무장대의 교전이 있었다. 이 교전은 작은 6.25라 불릴 만큼 처절한 전투였다. 거기서 사망한 희생자 중 수습하지 못하고 방치된 무장대 시신이 바로 이곳 송령이골에 집단 매장됐다. 한 곳에서 사망한 토벌대와 이 사건으로 보복 희생된 주민들 시신은 수습이 되었으나, 송령이골에 있는 희생자들은 역사의 무관심 속에 2, 3차 가해 당하며 방치되어 왔다. 무장대 대부분이 남로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빨갱이 프레임에 갇혀 배척받고 잊혔다. 2004년에야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표지판을 세우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뜻있는 이들의 소리 없는 기도 속에 현재에 이르렀다. 제주4.3특별법에 따르면, ‘희생자’란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후유장애가 남은 사람 또는 수형인을 말한다. 송령이골에 묻힌 이들도 4.3희생자다. 희생과 죽음에도 차별이 있는 것일까? 해방 이후 새로운 꿈을 꾸었던 수많은 이가 선택한 길과 희생 앞에 이념 잣대를 세우고 여전히 그 죽음의 의미를 퇴색하는 시대가 가슴이 아팠다. 6월 4.3순례가 끝나고 순례로 끝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해 보자는 의견이 모였고, 다양한 아이디어 중에 추모비를 세우자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비를 세울 장소로 송령이골이 결정되었다.
지난 2023년 9월 10일 제주4.3순례에 함께했던 제주 참가자들이 예수살이공동체 제주4.3순례단을 대표해 송령이골에 추모비를 세웠다. 순례단의 대표인 박기호 다미아노 신부가 비문을 썼다. 잘 자란 나무 아래 땅을 다지고 균형을 맞춰 비를 올렸다. 소박하게 준비한 음식과 술을 올리며 예를 표했다. 이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주일미사를 함께했다. 파견성가로 ‘상록수’를 부르면서 우리를 대신해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과 이곳을 지나간 이들의 추모의 마음을 생각했다. 순례를 함께한 이들의 기도와 마음도 흘렀다. 우리는 왜 이 자리에 추모비를 세운 것일까? 우리의 마음을 여기에 이르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제주4.3에서 예수의 얼굴을 보았다, 죽음에서 부활을 갈망하며
복음 속 두 얼굴이 생각났다. 강도를 만나 만신창이가 된 가난한 이의 얼굴.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며 베드로를 바라보는 예수의 얼굴. 레위인도 사제도 지나친 얼굴, 민족에게 버림받고 제자들도 바라보지 못한 얼굴. 제주4.3을 만나면서 우리 안에는 아픔과 서글픔, 분노 그리고 깊은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쌓여 갔다. 송령이골 희생자들을 마주하며 그냥 이대로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이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 쓰러진 이에게 다가간 것처럼.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의 가슴에 자신을 바라보던 예수의 얼굴이 새겨져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한 것처럼. 우리는 송령이골 앞에서 저마다의 가슴속에 남은 가난하고 아픈 역사의 얼굴,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 얼굴을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예수를 따르고 살려는 우리의 신앙과 꿈이 솟아오른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2000년 전 예수가 살았고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그의 생각과 마음과 걸음을 따르는 이들이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수가 달려간 곳에 같이 가고 그가 울고 아파하고 쓰러진 자리에 함께하는 이들이다. 돈이 최고라고 다른 이를 끌어내리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라고, 살아남기 위해 인간다움을 포기해도 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무릎을 꿇어 제자의 발을 씻고 병든 이의 손을 맞잡고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분열과 전쟁 앞에 눈물 흘리는 예수의 그 깊은 시선을 따르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지나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자꾸 거기에 머물렀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아름다운 꿈을 꾸었던 빛나는 청춘들. 버려지고 방치되고 순수한 애국심까지도 왜곡되고 이용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 아른거리는 예수의 눈길을 지나칠 수 없었다. 송령이골 앞에 서서 찬찬히 비문을 읽어 보았다.
솔고개 밭담길로 허영 혼불 한 무리 날아갔네
우리 기어이 그들 모두 부활로 돌아오게 하리
자유의 파도 넘치고 돌고래 떼 춤추는 날에
우리는 거기에 추모의 마음뿐 아니라 다짐과 희망도 새겼다. 떠난 이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길은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지금 여기서 실현하는 것이다. 아마도 예수살이공동체 제주4.3순례는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이 자리에 찾아 비문을 읽으며 예수살이를 살았는지 돌아보며 다시 시작할 것이다. 추모비를 세우던 날 구름이 살짝 끼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송령이골에서 불어오는 이 바람이 제주 전역을 돌아 자유와 평화의 파도가 되어 흘러넘쳤으면 좋겠다고, 그날이 오면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춤출 수 있기를 기도했다. 많은 이가 이곳에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 제주의 풍광 앞에서만이 아니라 제주의 아픔 가운데에 발길을 멈추고 기도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마주하는 송령이골을 지나치지 않기를 바란다.
조만간 다시 송령이골을 찾아가려고 한다. 추모비가 송령이골 땅에 잘 적응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강소진
예수살이공동체 회원.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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