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성의 원리를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가는 처음부터 저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경쟁이었습니다. 반을 정하는 배치고사부터 쪽지 시험 그리고 중간, 기말고사.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웠고, 그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조금이나마 남들보다 앞서야 하는 것, 그런 현실은 고등학교에 가서 더 심해졌지요. 순간순간 기준에 따라 세워지는 줄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안 될 것 같은 숨 막힘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가서 만난 현실은 완전 달랐습니다. 배려와 형제애를 배우게 되었지요.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서 배운 ‘사회교리’라는 과목에서 저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회교리를 배우면 처음 언급되는 것이 바로 사회교리의 3가지 원리입니다. 공동선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이지요. 저는 요즘 우리 사회를 바라보며 보조성의 원리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보조성의 원리는 국가 또는 상위의 집단이나 단체가 개인이나 하위 집단이나 단체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회적 원칙을 의미합니다. 보조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살펴보면 이 뜻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보조성(subsidiarity)이라는 개념은 라틴어 ‘subsidium(예비, 보조)’에서 유래합니다. 이 말은 원래 로마 시대 군사용어로 전방에서 싸우는 부대에 대해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예비 부대를 지칭하는 말이었지요. 즉 보조성의 원리는 모든 상위 질서의 사회는 하위 질서의 사회들에 대해 지원과 발전의 자세를 갖출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최초의 사회교리 회칙인 ‘새로운 사태’ 발표 40주년을 기념해 1931년 발표된 회칙 ‘사십주년’에서 비오 11세 교황은 단순히 도와주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상위 단체가 하위 단체의 역할을 뺏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원리를 통해 각 개인과 여러 하위 집단의 자율성이 상실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사회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확고부동한 사회 철학의 근본 원리이다. 따라서 한층 더 작은 하위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단으로 옮기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해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회 활동은 본질적으로 사회 구성체의 성원을 돕는 것이므로 그 성원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해서는 안된다. … 그러므로 권력자들은 이 “보조성의 원리”를 더욱 충실히 따르고 다양한 조직체간의 위계 질서가 널리 받아들여질수록, 사회의 권위와 능률이 더욱 높아지고 국가의 상태는 더욱 행복하고 번영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비오 11세, '사십주년' 제35항)
특별히 교회가 보조성의 원리에 집중하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 그 자체와 더불어 개별 사회와 사회 전체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인간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보조성의 원리를 “사회의 모든 분야에 존재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자유를 보장하면서 또한 더 많은 권력을 지닌 이들이 공동선을 위하여 더 큰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 (프란치스코, '찬미받으소서' 196항 참조)이라고 정의하면서 보조성의 원리가 궁극적으로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 보조성의 원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라 망신을 톡톡하게 시킨 잼버리가 끝이 났습니다.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인 전라북도 그리고 그보다 더 하위에 있는 단체들의 책임 공방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더불어 얼마 전 벌어진 한 젊은 해병의 죽음을 두고 대통령실과 국방부 그리고 그들의 지휘를 받는 해병대. 더 밑으로 내려가 봅시다. 아무리 위계질서가 중요한 군인이지만 한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사단장부터 시작하여 끊임없는 은폐와 꼬리 자르기가 판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 자유롭게 정보를 전달하고 비판의 날을 세워야 할 언론을 통제하려 애를 씁니다. 정부는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하위 단체와 국민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통제하려 합니다. 그리고 잘하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이 다 하려고 하는 욕심과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상위 단체가 하위 단체를 존중하고 그들의 역할을 뺏지 말아야 한다는 보조성의 원리가 지니는 소중함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디 이 정부가 비오 11세 교황이 말한 그 “불의하고 중대한 해악"을 더 이상 저지르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유상우 신부
부산교구 우정 성당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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