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아닌 삶을 만나기 위해서

2023-05-19     정현진 기자

얼마 전, 1995년 4월에 일어난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을 봤다. 프로그램에는 사건 직전 현장에서 등교하던 학생들과 그 부모들이 그날 아침까지 살았던 소소하고도 소중한 일상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사건 전말,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담고 있었다. 보는 내내 '대구 가스 폭발 사고'라는 이름만 기억했던 것은 아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생각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기 쉽지만 특히 우리가 보고 듣던 가난과 소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구조적으로 생겨나고 유지되는 가난은 늘 어디에든 있는데, 그것을 짊어진 이들의 상황은 참사, 재난, 죽음, 사건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한 단면을 드러내 보인다.  

독거노인 실태, 차상위계층 상황, 노숙인 수, 고독사, 수재민, 참사로 목숨을 잃고, 이를 밝히고자 생업을 내던진 이들, 코로나19 상황으로 일을 잃은 이들.... 이들의 존재는 통계로 드러나거나, 참담한 사건이 되거나, 다른 어떤 일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되어야만 언급된다. 뭉뚱그려지고 얄팍한 형태로. 

“2020년 1인 가구의 가처분소득 기준 상대적 빈곤율은 47.2퍼센트로, 전체 인구 빈곤율 15.3퍼센트보다 3배 이상 높았다. 65세 이상 노년 1인 가구 빈곤율은 72.1%나 됐다....”

뉴스에서 흔히 보는 숫자와 통계로서의 빈곤. 저 수치가 과연 우리에게 얼마나 구체적인 한 사람, 매 순간의 삶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혼자 살 때는 시장에서 장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아픈 엄마와 지내면서 어느 날은 하루에 3번 시장에 갔다. 매일 통장 잔고를 옥죄는 식비와 물가 상승 정도를 체감하면서야 비로소, 월 100만 원도 벌지 못하는 이들의 밥상을, 밥을 지어먹는 일의 엄중함을 생각했다.   

또 장 보는 일, 밥 짓는 일,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고 당연한 그 일이 아주 다양한 맥락으로 우리의 삶을 초대하고 일깨운다는 것을 알았다. 

종종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일은 여전히 아주 특별한 사목이나 사업, 또는 비장한 무엇으로 인식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람들 사이에 물처럼 스며들기에 교회의 손은 너무 말끔하고 곱다.

삶에서 자신의 먹을 것을 꾸리고 밥을 짓는 일이 없다는 것은 중요한 것을 알아갈 기회의 결핍이다. 사랑, 정의, 자비는 구체적 삶만큼의 숫자와 형태로 존재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장면들 속에서 건져 올릴 수 있다.

(이 글은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소식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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