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제국의 안뜰, 북당(北堂) 6

2023-05-08     오현석

“중국인은 서양 음악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합니다. 청각 구조가 서양인과 다른 까닭입니다. 기후 조건도 한몫하는 듯합니다.”

아미오의 중국 음악 연구

조제프 아미오(Joseph-Marie Amiot, 錢德明, 1718-93)가 쓴 글이다. 원고 제목은 ‘중국현대음악’(“De la musique moderne des Chinois”). 건륭 19년부터 몇 년간(1753-59?) 쓴 편지 모음이다. 그는 북당의 예수회 선교사였다. 1751년에 북경에 온 뒤로 생애 마지막까지 북당에서 살았다. 하프시코드를 곧잘 연주했고, 중국 피리 솜씨도 좋았다. 문학적 재능까지 뛰어났다. 건륭제가 총애한 이유다. 그의 손끝에서 상당수의 중국 시가(詩歌)가 번역되었다. 생동감 넘치는 프랑스어였다. 별들의 운행을 관측했고, 중국의 음악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 무게와 도량형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부럽게도.

북당에 오자 아미오는 서둘렀다. 그는 청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하기를 원했다. 음악은 비장의 무기였다. 그는 문인들을 초청해 프랑스의 명곡들을 연주했다. 하프시코드의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반응은 뜻밖이었다. 시큰둥했다. 무심한 표정만 어른거렸다. 그들에게 유럽 음악은 지루하고 난해했다. 어느 문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음악은 귀에서 가슴으로, 또 마음에서 영혼으로 흐릅니다.” 아미오의 충격은 컸다. 당신네 서양 음악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었으니.

조제프 아미오가 집필한 ‘중국현대음악’(“De la musique moderne des Chinois”). 아미오가 1763년부터 몇 년에 걸쳐 쓴 음악 관련 편지를 모은 책이다.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고악경전”을 번역하다

중국 음악을 이해해야 한다. 아미오가 갖게 된 소망이다. 시와 음악은 상류층 문화의 핵심 코드였다. 그에 접근하지 못하면 선교는 난망해 보였다. 고빌(Antoine Gaubil, 宋君荣, 1689-1759)이 그의 포부를 알고 격려했다. 고빌은 1723년에 북당에 왔다. 중국 문화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아미오가 믿고 따른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아미오에게 책을 번역해 보라 권유했다. “고악경전”(古樂經典)이었다. 그리고 번역에 필요한 모든 걸 지원하겠노라 약속했다. 아미오는 그길로 번역에 들어갔다.

“고악경전”은 고대 중국인의 음악 이론이 담긴 책이다. 강희 연간에 이광지(李光地, 1642-1718)가 편찬했다. 그는 이학(理学)에 뛰어난 신하였다. 중국 경전에서 음악을 언급한 부분을 모아 해설했다. 중국 음악사학에서 위상이 높은 책이었다. 번역 과정에서 아미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주 막막한 상황일 때, 이 책은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단서들을 주었습니다.”

1754년, 아미오는 “고악경전” 번역을 끝냈다. 북경에 온 지 3년 만이었다. 번역 원고는 즉시 프랑스로 보내졌다. 수신자는 드 라 투르(Simon de La Tour, 1697-1766) 신부. 프랑스 예수회에서 중국 문화를 담당했던 책임자다.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le-Grand)의 학장이기도 했다. “이 자료가 유용하다면 매년 보충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미오가 덧붙인 말이다. 동시에 부갱빌(Jean-Pierre de Bougainville, 1722-63)에게 번역 작업의 성과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프랑스 문학아카데미(l'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의 비서였다.

조제프 아미오의 초상화.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프랑스 학계의 반응

아미오는 매년 중국 음악 관련 자료를 보냈다. 1763년 부갱빌이 죽고, 드 라 투르와도 소식이 끊어질 때까지였다. 9년의 시간이었다. 그 기간에 아미오는 아무런 답신도 받지 못했다. 그가 보낸 번역과 보충 자료가 유용하지 않았던 걸까. 이후로도 한동안 그에 관한 소식은 없었다. 아미오 역시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중국의 병법서인 “손자”(孫子) 번역에 집중했다. “고악경전” 번역은 그렇게 잊혀져 갔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미오의 번역본은 프랑스 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1774년, 아미오는 뜻밖의 편지와 책을 받았다. “고악경전” 번역을 보내고 20년이 지난 후였다. 프랑스 왕립도서관장인 비뇽(Jérôme-Frédéric Bignon, 1747-84)이 보낸 것이었다. 동봉한 책은 루시에(Abbé Pierre-Joseph Roussier, 1716-92)의 “고대음악”(Mémoire sur la musique des anciens”(1770)이었다. 책의 내용과 자료가 중국 선교사들에게 유용하리라 생각했던 게다. 아미오는 한껏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번역했던 원고가 아무렇게나 인용되어 있었다. 왜곡되고 변조된 채로 말이다.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그랬다. 그의 번역 원고가 프랑스에서 꽤 유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지식인들은 자기 멋대로 해석했다. 교정이 필요했다.

조제프 아미오가 쓴 중국음악사 “중국고금음악고”(中國古今音樂考, “Mémoire sur la musique des Chinois, tant anciens que modernes”). 1779년에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서양에 처음 소개된 체계적인 중국음악사였다.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새로운 중국음악사

아미오는 새로운 책을 쓰기로 결정한다. 20년 전, “고악경전” 번역의 오류를 해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원고는 2년 후에 완성되었다. 그가 직접 쓴 중국음악사였다. 제목은 “중국고금음악고”(中國古今音樂考, "Mémoire sur la musique des Chinois, tant anciens que modernes”). 1779년에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중국 음악의 사상과 기본 체계, 중국 음악사 개요, 중국의 악기다. 서문에 그는 이렇게 썼다. “중국 음악은 인간과 천지의 조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 음률은 정치, 윤리, 도덕, 풍속에서의 조화로움을 표현합니다. 제 책을 통해 중국 음악이 올바르게 평가되길 바랍니다.”

서양에 처음 소개된 체계적인 중국음악사였다. 그의 책은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획기적인 책이었다. 이전까지 프랑스에서 알려진 중국 음악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18세기 권위 있는 중국 정보지였던 “중화제국전지” 역시 단편적인 정보만을 나열했다. 모두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의 가공을 거쳐 나온 것이었다. 정크푸드 같은 지식도 많았다. 거기서 중국 음악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이미지는 이내 실체로 굳어져 갔다.

아미오 역시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초기 저술에서 유럽 중심의 시각은 굳건했다. 그에게도 중국 음악은 프랑스의 것보다 열등했다. 프랑스의 예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안타깝게도 중국인들은 그 완벽함을 감상하지 못했다. 이해하지도 못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또한 엉뚱했다. “중국인의 청각 기관은 독특합니다. 우리 유럽인과는 다른 구조입니다. 우리의 음악에 관심이 없는 이유입니다.” 그의 연구가 깊어지면서 한때의 엉뚱한 결론도 수정을 거듭했다. 유럽 중심의 시각은 여전했지만, 그 농도는 조금씩 옅어져 갔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중국의 선율을 가장 깊게 이해한 사람이었다. 18세기 유럽인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왼쪽부터) “성악경보”를 바탕으로 2003년에 북당에서 연주된 아미오의 음악. 이 음반은 그때 연주한 곡들이 담겨 있다. 음반 제목은 “Vêpres à la Vierge en Chine”, 명청 북당 천주교 저녁기도’(明清北堂天主教晚禱, Vêpres à la Vierge en Chine)다. 장-크리스토프 프리쉬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그리고 아미오의 음악이 담긴 또 다른 음반. "Messe des jesuites de Pékin". 피카르와 파리의 중국 가톨릭센터 합창단 등이 참여했다. (이미지 출처 = Couvent, AUVIDIS ASTREE, naive)

“성악경보”, 중국적인 전례 음악

하나 더, 아미오의 음악 연구에 덧붙일 말이 있다. 유럽에 중국식 전례 음악을 소개한 일이다. 북당의 천주교 의례에서 사용했던 음악이었다. 건륭 44년(1779), 아미오는 중국 음악곡 54수(首)을 보냈다. 수신자는 프랑스 왕립도서관의 비뇽이었다. 200여 년 뒤, 프랑스 음악학자 피카르(François Picard)가 우연히 이를 발견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자료였다.

아미오의 음악곡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하나는 “중국통속음악곡집”(中國通俗音樂曲集)이다. 거기엔 중국 전통 속악(俗樂) 41수가 들어 있다. 다른 하나는 중국 천주교 음악곡 13수였다. 제목은 “성악경보”(聖樂經譜). 천주경(天主經), 성모경(聖母經) 등으로 대부분 명나라 말기의 기도문과 경문이었다. 곡들은 남성 독창, 여성 독창, 전체 합창곡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중국어 가사였다. 롱고바르도(Niccolò Longobardo, 龍華民, 1565-1655)가 번역한 기도서 “성교일과”(聖敎日課)에서 가져온 것 같다. 거기에 붙인 곡이 모두 중국 음악이었다.

북당에서 거행된 미사는 모두 라틴어 전례였다. 신부가 집전하고, 신자들은 그저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중국인 신자들에게는 별 감동이 없는 미사였다. 다른 형식의 의례가 필요했다. 이들 의례는 천주당 밖에서 중국어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의례외경례’(儀禮外敬禮)라고 불렀다. “성악경보”에 수록된 음악곡은 바로 그때 사용된 것이었다.

아미오의 ‘성모경’(聖母經) 합창 공연. 북경 북당, 지금의 시스쿠천주당(西什庫天主堂)의 성대가가 불렀다. 이외에도 유튜브에서 ‘Joseph-Marie Amiot’로 검색하면 그의 여러 연주곡을 찾을 수 있다. 들어보시길 권한다.

그때의 전례 음악이 되살아나다

아쉽게도 “성악경보”의 곡들을 정확하게 연주해 낼 수는 없다. 우선, 악보를 해석하는 게 쉽지 않다. 악기 소리를 내는 방식 역시 지금과는 달랐다. 관련 연구는 수록곡의 음악적 스타일을 분석하고, 그 유사성을 발견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또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서금곡의'(西琴曲意) 8수와 비교하기도 했다. '서금곡의'는 서양 음악에 중국어 가사만 덧붙인 것이었다. '서금곡의'는 악보 없이 가사만 전해지고 있다. ‘성악경보’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인의 음율로 만든 전례음악. 궁금하지 않은가. 사료는 북당의 만주족 음악가도 참여했다고 전한다.

2003년, “성악경보”를 발굴했던 피카르가 북경을 찾았다. 프랑스 음악가들,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함께였다. 그들은 북당, 지금의 시스쿠천주당(西什庫天主堂)에서 공연했다. 북당의 합창단도 참여했다. 당시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로 만든 음반이 있다. ‘명청 북당 천주교 저녁기도’(明清北堂天主教晚禱, Vêpres à la Vierge en Chine)다. 원곡에 얼마나 가까운지, 아미오 시대의 연주 방식과 얼마나 비슷한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선율이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 시간으로’(in illo tempore) 말이다.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