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힘이 셉니다
2023년 4월 18일 시청에서 있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기 전 혼자 조용히 이태원 참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기억의 길을 시작하는 곳 벽면엔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쓴 기도와 안부를 묻고 인사를 전하는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 있었는데, 그 벽 위에 쓰여 있는 “기억은 힘이 셉니다”라는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기억은 무언가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은 성주간 수요일이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삼일 전례를 준비하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그 참사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과 사회 구성원인 우리에게 굉장한 충격과 고통, 상처를 남겼습니다. 마음 깊이 미안함과 부끄러움, 무력감을 느끼며 일상을 살면서도 온전히 그 일상을 살기 어려웠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강대학교 이냐시오 성당 미사에서 예은이 아빠 유경근 님께서 “저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노란 리본을 달아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는데, 헤스터의 주홍글씨처럼 노란 리본을 평생 달고 다녀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나, 우리의 책임임을 깊이 느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은 괴산 방과후 학교 ‘하늘지기 꿈터’를 다녔던 솔휘도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해였습니다. 솔휘는 수학여행을 가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친구들을 기억하고 수학여행을 가지 않기로 결정한 후, 자신의 수학여행 비용을 기부하고자 광화문 광장에 계신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부모님을 뵈러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광화문을 지키고 계시던 아버님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버님들은 참사로 희생된 자녀들과 같은 나이의 솔휘가 광화문으로 찾아와 준 것을 무척 고마워하셨습니다. 아버님 중 한 분이 솔휘에게 괜찮으면 청운동 동사무소 천막에 계신 어머님들께도 들러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솔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곧장 청운동 동사무소 천막으로 어머님들을 찾아갔습니다. 어머님들도 아버님들처럼 솔휘를 무척 반겨 주셨는데, 어떤 분들은 솔휘를 안고 울기도 하셨습니다. 어머님들이 솔휘와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셨는지 천막에서 같이 자고 가라고 하셔서 솔휘는 외갓집으로 가기로 했던 계획을 바꿔 그곳에서 어머님들과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청운동 동사무소 천막에 세월호 부모님들과 함께 있던 김 PD가 솔휘의 방문을 세월호 관련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자신이 속한 매체보다 당시 세월호 관련 기사를 정성껏 취재해 보도하고 있던 <JTBC>에서 인터뷰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JTBC> 기자인 친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조용히 방문하고 가려고 했던 터라 솔휘도 많이 망설였는데, 솔휘 어머님과 의논 후 기록의 중요성을 고려해 광화문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방송을 목적으로 한 인터뷰도 아니었고, 그 당시 좀 예민한 부분들이 있어서 방송으로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날 솔휘와 함께 점심을 먹고 광화문 광장으로 걸어오던 중에, 솔휘가 살 것이 있다고 해서 화장품 가게에 들렀습니다. 솔휘는 그곳에서 클렌징 폼 2개와 선크림 2개를 샀는데, 왜 이 물건들을 샀는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아버님들과 저녁을 먹을 때, 아버님 중 한 분이 지나가는 말로 광화문 광장에서 생활하며 지하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시는데, 화장실에 비치된 손 씻는 비누를 사용하다 보니 피부가 아프다고 하신 말씀을 솔휘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스팔트 반사열로 얼굴이 까맣게 탄 것을 보고는 선크림도 함께 구입한 것입니다. 같이 들었지만 나는 지나친 말씀을 솔휘는 기억하고 있었고, 그 기억이 아저씨들을 위한 선물을 구입하게 한 것입니다. 솔휘에게 부끄러우면서도 참 고마웠습니다.
그 후로도 솔휘는 세월호 관련 집회에 종종 혼자 찾아와 참석했고, 세월호 희생자 부모님과도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기억한다는 것, 마음을 쓰며 스쳐 지나가는 말들도 주의 깊게 듣는다는 것, 내 계획과 다르게 벌어지는 상황에 깨어 있으며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내 계획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다 기억과 사랑의 힘일 것입니다.
한동안 슬픔과 무력함에 젖어 살다가 그저 슬퍼할 수만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감으로 색을 입힌 색지를 잘라 그림을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씨를 써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하는 분들에게 나눠 드릴 책갈피를 만들었습니다. 바느질을 잘하는 지인들과 함께 광화문 천막에 앉아 핸드폰에 달 노란 세월호 배를 만들어 판매한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용산화상경마도박장 반대 집회에 참석한 어머니들은 함께 눈 베개를 만들어 청운동 동사무소에 머물고 계시던 세월호 희생자 부모님들과 팽목항에 계신 부모님들께 보내드리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세월호 노란 리본과 노란 팔찌를 하고 다니고, 선거 때도 세월호를 기억하며 이윤보다 생명이 우선인 세상을 위해 투표하도록 포스터를 만들어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 서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억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 제주 4.3사건과 4.19혁명의 희생자들 등의 죽음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 제주 4.3사건과 4.19혁명의 희생자들 등의 부활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거름이 되어 우리가 누군가를 살리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도록, 우리가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다움을 회복하도록 돕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한 현실 안에서도 희망을 갖고 인내하며 기도하고, 아주 더디지만 이 사회를 조금씩 바꿔 나가기 위해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그분들이 우리 가까이 함께 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기억은 힘이 셉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남궁영미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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