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는 길, 나에게 가는 길
이 글은 <기쁨과 희망> 28호에 실린 조진선 수녀의 영화평입니다. '너에게 가는 길, Coming to you'(변규리 감독, 연분홍치마, 2021)는 성소수자 자녀를 둔 두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정동진독립영화제 땡그랑 동전상,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용감한 기러기상, 전주국제영화제한국경쟁 심사위원 특별언급, 다큐멘터리상을 받았습니다. - 편집자 주-
초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좌측 상단에 조그만 화면으로 ‘성소수자’라고 사회가 ‘굳이’ 특별히 이름을 붙여 분리해 놓은 이들의 부모가 ‘나는 성소수자, 00의 엄마, 00의 아빠입니다’라고 커밍아웃이 계속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음을 안다. 새로운 시작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관람자들은 흐느낌을 넘어 꺼이꺼이 운다. 그러나 영화 '너에게 가는길'은 신파를 강요하지도, 이해해 달라 구걸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평범하지만 평범할 수 없는 일상으로 초대할 뿐이다.
이후 위치설정은 관람자의 몫이다. 놀랍게도 낯설고 불편하게 생각하고 암묵적으로 차별과 혐오에 가담했던 우리를 성소수자의 일상을 통해 그의 입장에서, 부모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담백하게 ‘사람‘을 만나도록 이끈다. 그 공감이 굳이 연민으로 진행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담담하게 ‘사람’ 한결, ‘사람’ 예준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엄마 비비안, 나비를 만나게 한다. 자녀가 겪어야 하는 고통의 현실 안으로 어떻게든 들어간 우리는 그들의 엄마가 되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자신의 상황에 맞닥뜨려, 어려움 중에 있는 ‘너에게’ 가게 된다.
커밍아웃, 그래 엄마가 간다
내가 낳은 자식인데 내가 모르는 낯선 얼굴로 낯선 언어로 낯선 눈빛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낯선 이야기를 한다. 성소수자라고. 당황스럽다. 뭔가 어색하다.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엄마다. 일단 안는 것이다. 듣는다, 숙고한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낯선 너의 세계로 간다. 낯설다. 그런데 그 낯선 너의 세계에서 바라본 내가 있던 세상은 이제 더 낯설다. 내가 사는 세상, 내 아이가 살아내야 할 세상이 이렇게 폭력적이고 배타적이었더란 말인가. 내 자식이 감당해야 할 폭력이 너무 끔찍하다. 돌을 맞아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라고 내 아이가 말한다. 세상에! 안되겠다. 나는 이 세상에 목소리를 내야겠다. 내 아이가 살아갈 이 세상에 외쳐야겠다. 차별과 혐오를 멈추세요! 내 아이가, 수많은 사람이 울고 있어요. 돌을 던지지 마세요, 내 아이가 피투성이가 되고 있어요. 그렇게 성소수자를 위한 활동가가 되어간다.
엄마들은 거의 같은 말을 한다. ‘힘들게 살아가도록 낳아 주어서 미안해’라고. 엄마는 자녀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언제나 자신들의 탓으로 여긴다. 문제는 그 현실을 살아야 할 당사자의 오늘과 내일이다. 소위 ‘커밍아웃’ 하기 전까지 가정은 평온했다. 그러나 성소수자 자녀의 일상은 늘 생과 사의 갈림길, 삶과 죽음의 다리를 건너는 아슬아슬한 고뇌의 시간이다.
엄마들에게 커밍아웃을 듣기 전의 세상과 그 후의 세상이 전혀 다른 세상이다. 그런데 어쩌면 자식들 덕분에 세상을 지배하는 폭력의 실체를 발견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게이인 것을 알고 아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 눈을 뜬 엄마. 남의 일인 줄만 알고 있었던 일이 나의 현실이 된 엄마. 자신의 혼란보다 자식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더 애처롭다. 그래서 엄마는 ‘너에게’ 간다. 엄마는 미안하다. ‘힘들게 살아가게 낳아줘서 미안해.’ 이 단순한 표현 안에 깊은 눈물이 응집되어 있다. 커밍아웃 후 수년이 지난 지금의 두 엄마는 성소수자들을 위한 활동가로 열심히 움직이면서도 여전히 자식에게 가고 있다.
교회가 역지사지로 성소수자를 본다면
주변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세상이 차별과 혐오를 멈추지 않는 한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살지 못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한 어떤 이가 동생으로부터 ‘조용히 살라’는 이야기를 듣거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 이게 웬 말이냐며 억압하거나 가족의 틀에서 배제되는 일까지 발생한다. 수많은 성소수자가 자살을 한다. 매체에 보도되지 않는 자살은 거의 50퍼센트(성소수자의 수)에 가깝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성탄을 준비하고 있다. 성탄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다는 신비를 기념하는 날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되, 인간들이 피하고 싶은 조건들을 취하고 오셨다. 이 신비는 일상에서 살아내야 할 미션이다. 강생(육화)의 신비를 살아가기 위한 쉬운 방법이 ‘역지사지’라고 생각한다. 흔히 동성애자 또는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만나보면 절대 선택이 아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이렇게나 극렬한 혐오와 폭력을 당하는 상황을 누가 선택하겠는가. 교회는 그런 방식으로 양들의 현실을 인식하면 안 된다. 양 우리에 들지 않은 길 잃은 양을 찾아가야 하는 교회의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인식이 일어나지 않도록 길 잃은 모든 양을 찾아 울타리 밖 ‘너에게’로 가야 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에 비하면 ‘너에게 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데 교회(지도자들)는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양들을 돌보는 것이 ‘사목’이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사목자들은 우선적으로 울타리 문을 열고 세상 밖 ‘너’에게 가야 한다. 그렇게 가서 ‘듣고 보고, 공감하고’ 안아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 사회문제도 성당에서 기다리며 또는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에 앉아서 바라볼 일이 아니다. 노동자도, 장애인도, 이주민도, 난민도, 성매매 피해 여성들도, 중독자들 등 세상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차별과 혐오를 당하는 이들이고, 이들에 가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인 것일까. 아닐 것이다.
강생, 세상으로 그리고 너에게 가는 길
하느님은 내려오셨는데 사람들은 자꾸 올라만 가려고 한다. 그래서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우화가 탄생했나 보다. 한국의 성직자, 수도자까지도 인간 사회의 ‘지배’와 ‘다스림’의 원리에서 발생한 서열과 위계가 강고하다. 교우들은 사제, 수도자를 너무 존중한다. 그런데 너무 떠받드는 것은 그들의 영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예루살렘 입성하는 예수를 태웠던 나귀가 자신을 환영하는 인파로 착각하게 만드는 화려한 유혹이 그들의 일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길, 예수가 되는 길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가 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차별과 혐오’라는 것은 없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사야서 11장 1-9절 ‘평화의 왕국’에 나와 있듯이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사자와 사슴이 뛰어노는 세상이 우리가 완성해가야 할 하느님나라다. 그 나라는 어떤 조건, 어떤 배경에도 위협을 받지 않고 차별이 일어날 수 없는 세상이다. 그저 세상의 소수자, 약자, 그야말로 주변인인 ‘너에게’ 가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말하고 싶다. 구체적 현실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눈물, 고통, 처절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떨고 있는 ‘너’들은 특히 자본주의가 극악을 떨고 있는 이 시대는 더 많기 때문이다.
‘너’에게로 간다, 하느님을 만난다, 그건 선물이다!
현장 활동가의 삶을 조금 살아낸 사람의 입장에서 어쭙잖은 의견을 말하자면, 가톨릭교회는 지금 진정 예수의 제자들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루카 16장)에 등장하는 부자일 수도 있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 레위인(루카 10장)일 수도 있다. 부자는 라자로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제, 레위인은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라는 필요조건을 핑계로 죽어가는 사람을 피해 갔다.
‘너에게 가는 길’은 우리에게 평온할 만큼 자연스럽게 ‘나’로 향하게 해준다. ‘너에게’ 감으로써 거기서 ‘나’를 만난다는 것은 선물이다. 너의 현실을 듣고 보고 만나고 접촉함으로써 따뜻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공감하며 성장하는 나를 만난다. 어떤 틀이 없이 그저 고유한 ‘너’들이 살아내는 생명의 향연이 이 우주를 만나고 그 우주에서 하느님 창조의 신비를 만난다.
어떤 ‘너’는 가는 길이 불편하고 어색하고 낯설다. 우리에겐 ‘약자’라는 조건과 ‘사람’이라는 인식이 그 길을 쉽게 만들어 준다. 하느님께서 ‘약자’로 오셨고 배제되는 조건으로 오셔서 그리스도의 생애는 철저히 아웃사이더의 생애였음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운명도 그와 같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약자인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다.(마태 25,40)
그래서 너에게 가면 거기서 ‘나를 만나고’ 하느님을 만난다. 어떤 상태에 있든 그는 ‘사람’이다. ‘성을 중심으로’ 소수로 분류하고 분리하는 순간 차별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창조주 하느님께는 소수와 다수가 있을 수 없다. 인간 존재의 심오한 신비를 두고 왜 ‘성’을 중심으로 인간을 분류하는 문화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신비롭고 존엄한, 고유한 ‘나’들의 창조적 축제인 세상인 것이다. 교회가 과감하게 성소수자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이 안전감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들의 현실을 듣고 공감하며 함께 공존하는 공동체 건설에 마음을 모으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낯설더라도, 불편하더라도 그래서 더 ‘너에게’ 다가가는 강생의 신비의 길을 가는 교회를 그려 본다.
조진선 수녀
의정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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