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주민투표를 통해 본 한국반핵운동과 민주주의 1
영덕 핵발전소 반대 주민투표 6주년을 기억하며
이 글은 지난 11월 11일과 18일, 영덕핵발전소반대범군민연대와 핵재처리실험저지30km연대가 진행한 토론회에서 핵폐기를위한전국네트워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준한 신부(부산교구)가 발표한 내용으로, 한국의 반핵운동 역사와 의미, 그리고 핵재처리 반대 싸움의 과정을 짚고 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의 핵발전 관련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지금, 앞으로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발제문은 앞으로 6번에 걸쳐 연재됩니다. - 편집자 주
“우리 4개 후보지는 물론 이 땅 어디에도 핵발전 확대를 전제로 하는 핵폐기장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핵폐기장도 필요 없고 지역 지원금도 필요 없다. 지역 지원금 몇 푼에 대대손손 지켜갈 우리 고향을 맞바꾸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팔 수 없다.”
2003년 제252차 원자력위원회를 통해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된 고창, 영광, 영덕, 울진 핵폐기장 4개 후보지 대책위 공동 성명서 내용 중 한 대목입니다. ‘핵의 장례식’을 의미하는 꽃상여를 짊어진 청년회를 선두로, 연이은 깃발과 함께 영덕 주민들은 1톤 트럭에 ‘핵은 죽음이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분노의 장례행진을 했습니다.
18년 전의 외침이라고 하기에는 하나도 녹슬지 않은 살아 펄펄 뛰는 오늘의 목소리처럼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에 서글프기만 합니다. 바로 시간은 흘렀어도 변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덕 주민투표 6주년 토론회를 맞아 영덕이라는 지역뿐 아니라 우리나라 반핵 역사의 한 변곡점이 된 역사적인 주민투표의 그 현재적 의미와 미래에 대한 제안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영덕 주민투표는 오랜 기간 끊임없는 반핵 투쟁의 결과로서 성취된 것이라는 점을 유념하고자 합니다. 영덕 주민들의 반핵 투쟁의 역사와 분리된 결과로서 주민투표만을 부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성과에 대한 말 잔치로 끝날 수 있습니다. 영덕 주민들의 기나긴 노고에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영덕 반핵운동의 기반 - 저항의 지역, 영덕
영덕의 역사를 간단히 일별하면, 반핵운동 이전의 영덕은 그 자체로 한국저항 역사의 한마디를 장식하는 지역입니다. 대한제국 최초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며 영덕군 축산면에서 나고 자라 경북 일대를 호령했습니다. 양반이 아닌 평민이 주도적으로 의병운동을 일으켜 아래로부터 민의를 대변하는 이 운동은 불의에 저항하는 영덕 역사의 첫마디가 되었습니다.
일본 식민시절 당시만 해도 중심지였던 영해면에서는 1919년 3월 18일 대한독립 만세운동을조직해 29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영해, 병곡, 창수 독립만세운동으로 재판에 회부된 인사는 170명이었고 이는 3.1운동 관련 재판에서 전국 최대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영덕의 저항정신은 그 뿌리가 매우 단단하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백두대간으로 해방 정국에는 빨치산이 많았던 영덕 지역은 군경 토벌 작전으로 수많은 빨치산뿐만 아니라 지품면을 포함한 많은 곳에서 민간인 희생 사건이 일어났을 정도로 한반도 역사에서 저항과 아픔을 간직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전개된 영덕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저항 의식이 강한 동시에 그 패배감과 피해 의식이 혼재된 지역 정서를 간직하면서 또다시 핵의 가공할 위협 앞에 서게 됐습니다.
영덕 핵폐기장 반대 운동
한반도 반핵운동 역사의 시초는 전남 영광의 온배수 어업 피해 보상요구 투쟁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반핵운동의 역사는 사실상 핵폐기장 건설 반대 운동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핵폐기장 반대 운동의 선두에 영덕이 있었습니다.
영덕 핵폐기장 반대 운동은 크게 3차례 진행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1986년 7월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돼 1988년 12월부터 지질 조사에 착수 뒤 1989년 영덕군 남정면 핵폐기장 반대 운동은 우리나라 최초 핵폐기장 계획에 맞선 첫 핵폐기장 반대 운동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무려 9개 읍면 단위 집회에 3000여 명의 주민이 참가해 7번 국도를 점거하는 등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해 지질 조사 석 달 만에 핵폐기장 건립 백지화를 달성했습니다. 이어 2003년 제252차 원자력위원회를 통해 또다시 울진, 영광, 고창과 더불어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되자 상여 시위를 벌이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다시 한번 정부의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원자력 진흥 정책을 막아냈습니다.
마지막으로 2005년 노무현 정부의 지원금을 매개로 불법적 관 주도 주민투표를 강행한 중저준위 핵폐기장 유치 시도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3000억 원이 넘는 유치 지원금,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 본사 이전, 8조 원 상당의 지역 지원, 양성자가속기 건설 지원 등으로 경주, 군산, 포항, 영덕 등의 지역을 상대로 중앙정부가 싸움을 붙이는 방식으로 결국 경주로 확정되는 가운데 주민이 분열되고 운동진영은 큰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긴 반핵운동의 역사를 거치며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개발이익에 눈먼 지자체의 압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재판을 받게 되고, 거금의 벌금형을 받는가 하면, 반핵운동에 앞장선 식당을 운영하는 주민은 주민들의 냉대로 결국 폐업을 하고 고향을 떠났는가 하면,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에서 의욕적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젊은이들마저 떠났으며, 농민들은 농사와 관련해 영덕군이 의도적으로 인허가를 잘 내주지 않으면서 생존의 벼랑 끝에 서는 등 수많은 피해를 받았습니다.
영덕의 핵폐기장 반대 투쟁은 명암이 엇갈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반핵운동 차원에서 그 한계와 향후 운동을 위한 나름대로의 성과를 낸 것입니다. 당시 아주 극렬한 핵폐기장 싸움이었지만, 결국 우리 지역에 핵 쓰레기를 둘 수 없다는 지역 운동에 그쳤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그 후로도 원자력진흥정책은 일관되게 추진됐고, 이 극렬했던 핵폐기장 반대 투쟁은 반핵 투쟁과 그 연대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1989년과 2003년 핵폐기장 반대 투쟁은 모두 군수가 주도한 관 주도형 반대 투쟁이었습니다. 철저히 지역 중심의 님비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핵폐기장 투쟁 당시는 군수 주도의 유치에서 벗어나 순수 민간 주도의 반대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이전 투쟁과 크게 갈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지역 님비적 투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관의 탄압에 의해 지역공동체가 완전히 붕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관 주도라는 물리적 조건과 님비적 한계가 있었지만 성과도 있었습니다. 바로 핵 자체의 위험성이 주민들에게 알려졌다는 일종의 학습의 성과였습니다. 후쿠시마 핵사고가 주민들에게 빠르게 각성의 기회가 됐던 것은 세 차례의 핵폐기장 반대 투쟁이 밑거름으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주민투표 이전 신규 핵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
한국 반핵 역사의 시발점인 핵폐기장 반대 운동의 선두에 섰던 영덕 주민들의 노고는 결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원자력진흥정책은 지금도 그렇거니와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이 영덕 주민의 삶의 현장을 끊임없이 침탈했고, 급기야 신규 핵발전소 건설로 또다시 영덕 주민사회를 유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수원은 ‘신규핵발전소 입지 확보를 위한 정책 수립 용역’(2009년)을 통해, 해남, 보성 등 10곳의 지자체를 일방적으로 신규 핵발전소 가능지로 선정했습니다. 이후 한수원은 가능성 있는 4곳(해남, 고흥, 삼척, 영덕)에 지방의회의 동의서를 첨부한 ‘유치 신청서’를 2011년 2월 말까지 내도록 종용했습니다. 이에 2010년 12월 30일 당시 김병목 영덕군수가 주민의 의견도 묻지 않고 핵발전소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또다시 영덕은 반핵운동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랜 반핵운동에 지쳐 가던 영덕 주민들은 군수까지 나서서 개발이익을 빌미로 군민들을 호도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에 유린당하는 와중에 2011년 3월 11일 한국 반핵운동의 기폭제가 된 후쿠시마 핵사고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일면 패배감에 젖어 들기도 했던 분위기가 바뀌어, 다시 청정 영덕, 깨끗한 고향을 지키고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영덕 주민투표의 시발점이 된 ‘영덕핵발전소유치백지화 투쟁위원회’가 2011년 6월 14일에 출범합니다. 지자체의 조직적 방해로 현수막마저 영덕이 아닌 인근 포항에서 공수해 조달했을 뿐 아니라 경찰과 공무원의 감시로 겨우 10여 명의 사람이 출범 행진을 하는 일견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이는 후대에 큰 성과를 위한 작은 발걸음이었음이 증명됐습니다.
영덕핵발전소유치백지화 투쟁위원회는 2011년 12월 23일 한수원이 삼척시와 더불어 영덕을 후보지로 선정하는 결과를 발표하고, 마침내 2012년 9월 14일 신규핵발전소 지역으로 지정 고시되는 와중에도 영덕 반핵운동의 산실이었으며 주민투표의 출발점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먼저 2011년부터 장날마다 자체 홍보물을 만들어 선전전을 했는데, 특별히 2013년 새해 들어 진행된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주민에게 핵발전의 위험을 알리기 위해 무기한 1인 릴레이 시위를 하는가 하면, 경북 도지사와 영덕군수가 참여한 영덕해맞이공원의 경북대종 타종식에서 기습시위를 벌이며 300명의 공무원이 팔짱을 끼고 인간 벽을 세우는 중에도 구호를 외치며 주민들의 호응을 받아냈습니다.
이외에도 반대 주민들의 수많은 노고는 결국 주민투표로 뜻을 모으게 됐고 2015년에 들어 매일같이 영덕과 영해 등의 재래시장을 다니며 선거인명부 작성 및 반핵 선전전을 끊임없이 전개하는 발로 뛰는 주민 밀착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바로 그 결과로 영덕핵발전소유치찬반 주민투표추진위원회가 결성돼 2015년 11월 11일과 12일, 이틀에 걸친 역사적 주민투표로 1만1209명의 투표 참가와 91.7퍼센트의 반대 의사를 기적적으로 모으게 됐습니다.
특히 관의 철저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명부를 작성하기 위해 서명을 모으면서 3만 6000여 명의 군민 중 1만 5000명의 동의서를 받았다는 것은 활동가들의 헌신적 노력과 선전전, 가가호호 방문이라는 밑바닥에서부터 이뤄진 노고의 결과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미 주민투표 이전 수많은 선전전과 선거인명부 동의서 작성을 위한 주민과 만남을 통해서 핵발전소의 문제점과 청정 영덕을 지키고자 하는 민의는 이미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다시 한번 영덕 주민투표는 결과로서 영덕 주민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확인한 것일 뿐 그 이전의 희생적인 활동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준한 신부
부산교구 남산 성당 주임, 핵폐기를위한전국네트워크 운영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