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신자는 진짜인가요?"라는 질문, 필요할까?

예수회,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왁자지껄, 북한 바로 이해하기' 강좌 진행 북한에 기독교, 불교, 천도교, 러시아정교회 등 존재 탄압과 회유 등 거치며 스스로 지켜온 신앙

2021-06-24     정현진 기자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JPIC, 예수회 민족화해위원회가 진행하는 '왁자지껄, 북한 바로 이해하기' 온라인(ZOOM) 강좌가 6월 한 달간 진행 중인 가운데, 23일 '(북한 신자는)진짜 신자인가요'를 주제로 강좌가 열렸다.

앞서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김정은 체제 경제 실태 등을 살펴본 강좌에 이어 이날은 북한의 해방 이후 종교 상황에 대해 살폈다. 강좌를 맡은 김연수 신부는 예수회 민족화해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 교회 내 두 번째 북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 “북한 가톨릭교회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책을 낸 바 있다.

강좌를 시작하며 김연수 신부는 “2018년 남북관계의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싹을 틔운 가운데, 남북의 화해와 평화, 북한 복음화가 절실한 상황”이라며, “이러한 역사적 갈림길에서 북한의 종교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북한의 종교 정책과 현황을 이해한다면, 북한 선교 방식에 대한 방안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에는 어떤 종교가 있을까?

먼저 해방 직후 북한의 종교 상황을 보면 당시 북한 공산정권은 종교에 대해 ‘탄압과 회유’라는 이중적 정책을 실행했다.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에는 5만 5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으며, 개신교 신자는 약 20만 명, 불교 신자 약 40만 명, 천도교 신자 170만 명이 있었다.

1946년 말 당시 북한 인구 925만 7000명을 기준으로 전체 종교 인구는 약 25퍼센트로 종교를 배척하고 종교인들을 탄압하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였으므로 북한 당국은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회유책을 선택했다. 그 일환으로 종교단체가 설립됐는데, 1945년 12월 ‘북조선 불교도총련맹’을 시작으로 1946년 11월 개신교 단체인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이 설립됐고, 1947년에는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북한 당국의 정책을 지지하고 적극 협조했는데, 천주교는 당시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를 통해 협력을 요청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공주의를 표방하던 가톨릭교회는 “단체에 가입하고 무신론자에게 일시적이거나 외면적으로라도 협력하는 것은 교리에 어긋나고 신앙을 배반하는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북한 당국의 종교에 대한 “병행정책”은 내부적으로는 종교 탄압을 시행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종교를 인정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이중정책이다.

북한 종교 정책에 획기적 변화가 이뤄진 것은 1988년이다. 김연수 신부는 “주목할 만한 것은 종교활동들이 모두 중앙조직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라며, 유독 1988년이라는 시점에서 진행된 것은 추측컨대, 서울올림픽 개최,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씨, 문규현 신부의 방북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씨의 활동은 북한 내 천주교 부활에 큰 힘이 됐다고도 덧붙였다.

무엇보다 이들의 방북 및 활동은 북한 인민들이 가졌던 종교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꿔 놓았으며, “신부나 목사는 미국 사람들 앞잡이 노릇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나라와 통일을 위해 저렇게 감옥까지 가면서 애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또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종교와 종교인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특히 민족종교로 김일성 주석 자신이 무척이나 아꼈던 천도교에 대해서는 “기독교와 함께 내가 가장 중시해 온 종교의 하나”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영향으로 북한의 대국어사전의 종교에 대한 정의까지 바뀔 정도였다.

1989년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씨는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사진 출처 =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페이스북)

‘종교’에 대한 사전적 정의 변화

1981년 현대조선말사전 : 기독교 낡은 사회의 사회적 불평등과 착취를 가리우고 합리화하여 허황한 천당을 미끼로 하여 지배계급에게 순종할 것을 설교.

2000년 조선대백과사전 :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를 크리스트로 내세우고 그에 의한 인류의 구제를 설교하는 종교.

김연수 신부는 북한이 이처럼 종교에 대해 고심하고 종교활동에 대해 조금이나마 전향적 자세를 취하는 이유에 대해, “북한에 종교가 없다는 주장은 국제사회의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종교를 대남교류와 관련해 정치,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종교 활동이 더 이상 북한체제 안전에 위협요인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등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북한의 종교에 대한 입장 변화는 북한 내 각 종교 활동의 변화도 가져왔다.

물론 정확한 종교 실태 파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 그리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 발간지 <조국>(2004년 8월호) 등에 따르면, 현재 북한에는 천주교, 개신교, 러시아정교(조선정교), 불교, 천도교 등의 단체가 구성돼 있다. 이들의 숫자는 개신교와 천도교 각각 1만 3000여 명, 천주교 3000여 명 등이다. 러시아정교의 경우 성직자도 양성됐다.

특히 천주교 현황을 보면, 해방 전후 북한에는 교구 4개, 주교 3명, 사제 90명 그리고 신자 5만 7000여 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후 북한 당국은 천주교에 대해 다른 종교와 다른 입장을 취했는데, 인원수가 적었고 반공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또 외국인 성직자들도 많아 회유가 쉽지 않았고 그만큼 박해도 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평양교구의 경우 해방 전보다 10배가 넘는 수의 신자가 미사에 참석했다고 한다. 신자들의 노력으로 1948년에는 1년간 1000명이 넘는 신자가 세례를 받았다. 신자들의 모금으로 신학생도 양성돼, 1945년부터 매년 사제 서품이 이뤄졌다. 평양교구에서는 1948년 10월 마지막으로 2명(서운석, 최항준)이 사제품을 받았고, 황해도에서는 1947년 최석호 신부가 마지막 사제품을 받았다. 함경도 덕원면속구에서 1945년 허창덕 신부, 1948년 김종수, 김이식 신부, 연길교구에서는 1948년 김남수 신부의 서품이 각각 마지막 기록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어떠했을까?

김연수 신부는 한국전쟁 뒤 전후 복구 사업에 북한 천주교 신자들 또한 협력해서 일하게 됐지만 북한 당국은 종교인들을 적대계층으로 분류해 감시와 반종교 교육을 받아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를 포기하는 이들도 생겼지만 남은 신자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잃어버리고 탄압을 받는 와중에서도 비밀리에 자신의 신앙생활을 이어 가기도 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고 1968년 북한 당국은 종교생활에 대한 감시를 풀면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지하에서 종교생활을 이어 가는 이들에게 공식적으로 가정예배 등을 허용하기도 했다.

“조광동은 1991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은주 엘리자베스, 차성근 율리오, 동희만 다니엘, 고영희 수산나 네 명의 천주교 신자들과 좌담회를 가졌다. 차성근은 김일성종합대학교 어문학부를 졸업하였고 성당이 설립되면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서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고아였던 자신을 키워준 마동일 선생 등과 가정 신봉을 드렸다고 하였다.”(북한 신자들의 증언 가운데 일부)

김 신부는 “북한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전쟁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자녀들에게 천주교 집안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경우가 있고, 자녀들에게조차 비밀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점은 박해시대를 유추해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면서, “하지만 부모가 죽기 전에 유언을 통해서 신앙을 말해 주고 앞으로 때가 오면 성당에 나가서 영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하는 경우도 있었음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북한 천주교 신자들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자녀들에게도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며, “더 이상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개인적인 신앙을 유지하는 독특한 상황을 견뎌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1980년대 특히 바티칸이 비공식적으로 북한과 접촉하면서 경제적 지원을 시작하고,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한 뒤, 비공식적 북한 접촉이 본격화되면서 변화했다.

바티칸은 북한과 접촉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북한 사이의 외교 관계를 활용했고, 프랑스 원조기구를 통해 50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면서 북한 당국과 대화 채널을 마련했다. 이어 북한과 직접 접촉을 시도하던 바티칸은 평양에서 개최될 국제적인 모임에 대표단을 참석시킬 가능성을 타진하고, 주세페 베르텔로 몬시뇰과 장익 신부를 참석시켰다.

장익 신부 일행은 1987년 6월 7일 평양에 도착한 뒤 김승렬 야고보, 마등룡 바오로, 윤봉순 모이세, 박덕수 말구, 홍도숙 데레사 등 북한 천주교 신자 5명을 만났다. 그들은 해방 전에 사용하던 가톨릭 언어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고,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북한 천주교 신자들은 1987년 10월에 “조선천주교인협회”를 결성할 준비를 하고 평양에 성당에 세울 계획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준비위원회는 1988년 6월 30일 ‘조선천주교인협회’(1999년에 조선카톨릭교협회로 변경)를 결성했다. 협회는 교리서 두 권과 기도서를 출간하고, 대외활동을 늘리면서 중국 가톨릭교회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 조심스럽게 사제 양성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장충 성당이 1988년 10월 완공됐고, 10월 31일 장익 신부와 정의철 신부가 교황 특사로 파견돼, 장충 성당에서 최초의 미사를 봉헌했다.

장충성당 내부 모습.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김연수 신부는 해방 뒤 북한 천주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북한 정권에 비협조적, 비판적이었던 천주교의 성격, 사제와 수도자가 없어 신자 스스로 영적인 힘과 신앙을 키워가는 현실 등을 고려할 때, “북한 교회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조선카톡릭교협회 결성과 장충성당 건립이 북한 교회의 새로운 출발을 보여 줬지만 남한 교회에서는 이 단체 등이 북한 당국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그 진정성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북한 신자들에 대한 진정성 논란은 북한을 방문해 미사를 봉헌한 외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겪는 갈등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 교회가 매주 30년간 종교행사를 거행한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북한 교회를 방문한 이들에게 북한 신자들이 예비자 교리를 위한 학습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일 등을 볼 때, 이들은 계속 예비 신자들을 모집하고 교리를 가르칠 계획이 있는 것이라며, “남한 교회는 북한 교회의 성장을 위해 재건주의적 사고보다는 북한 신자들과 협력하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그들이 성장하지 못한 이유,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