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불교계가 쿠데타 저항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
미얀마로 출가한 한국 스님이 본 미얀마 토크쇼 열려
디라 비구, 2008년 미얀마에서 수행 시작
지난 4월 미얀마에서 귀국
미얀마로 출가한 한국인 디라 스님이 점점 사그라지는 미얀마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지 않도록 계속 기억하고 이야기해 달라고 당부했다.
8일 ‘미얀마로 출가한 한국 스님이 본 미얀마_신부님이 묻고 스님이 답하다’ 토크쇼가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불교행동과 프란치스칸 JPIC 주최, 작은형제회 JPIC 주관으로 진행됐다.
토크쇼는 김종화 신부(작은형제회 JPIC위원장)가 묻고 디라 스님이 답하는 형식으로, 쿠데타 전후의 미얀마 상황, 미얀마에서의 수행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디라 스님은 2008년 미얀마의 찬메 수행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한 뒤 찬메 사야도에게 비구계를 받고 여러 곳에서 수행했다. 2019년부터 미얀마 흘레구의 마나빠다이 승가언어대학에서 스님들의 한국어 교육과 재가자 청년들을 위한 교사양성학교를 맡고 있다. 지난 4월 한국으로 들어와 대구의 마나빠다이 불교센터에 머물고 있으며, 미얀마 학생을 위한 인터넷학교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승려들 시위에 나서 절이 공격받으면 동자승들 누가 책임지나
미얀마 군부의 유혈진압에도 미얀마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2007년 샤프론 혁명 때와 다르게 승려들이 집단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디라 스님은 “한국 언론에는 미얀마 불교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보도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얀마 스님들도 보수, 진보 등 스펙트럼이 다양한데, 언론에는 한쪽만 보여 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어 디라 스님은 “(미얀마 스님들에게) 2007년 혁명이 트라우마처럼 작동한다”고 말했다. 당시 어제까지 보시하던 군인들이 절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스님을 죽였던 일 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군부는 정치에 나서지 말고 스님들 할 일을 하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뜻 나서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2007년 스님들이 앞에 나서자 국민들도 힘을 얻어 스님들 행렬을 따랐는데, 이로 인해 군부가 더 큰 살상을 하는 원인을 줬고, 스님들이 집단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큰 희생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스님들에게)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말리지 않지만 승가 전체가 나서는 것은 더 큰 위협을 초래하므로 시위에 나가지 말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얀마 불교계가 성명서를 내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 “이미 평화와 안전을 바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미얀마어로 냈다”고 설명했다. 미얀마평화승단연합회는 지난 2월 6일 군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낸 바 있다.
승려들이 시위에 나서지 않는 다른 이유로 절에서 돌보는 동자승들의 안전 문제도 있다. 미얀마에서 절은 일종의 보육원 역할도 한다. 형편이 어려워 출가한 동자승이 많기 때문이다. 디라 스님이 있던 절에서 돌보는 아이들이 50명 정도인데, 사회가 불안정해지니 이달에는 아이들이 100명이 넘었다. 그는 “스님이 시위를 나가면 절을 불태우고 주지승을 끌고 가는데, 그러면 동자승을 누가 어떻게 책임지냐는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디라 스님에 따르면 미얀마에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에 가깝다. 수행에 집중하려고 미얀마로 출가했던 그는 막상 겪어 보니 “한국에서 미얀마 불교에 대해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설명했다.
마을 사람들과 승려들은 가족처럼 지낸다. 태아부터 성장하고 죽을 때까지 “스님이 평생 삶을 함께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살면서 그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다. 공부를 위해 다른 지역, 다른 나라를 경험하고 온 승려가 그 마을에서 가장 학식 있고, 정보가 많다 보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스님들이 학교, 병원, 직업 훈련을 포함한 교육시설 등을 여는 등 다양한 일을 한다. 어떤 스님이 있냐에 따라 그 마을의 교육과 복지 등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인과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미얀마 사람들은 보시를 많이 한다. 그는 “대부분의 스님이 가족, 스승, 지도자이자 공평한 분배 시스템”이라며, “스님에게 보시한 것들이 필요한 곳에 분배된다”고 말했다.
쿠데타 이후 마을 사람들 사이 증오 생겨
김종화 신부가 미얀마 양곤에서 홍수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지금 상황에 관해 물었다. 디라 스님은 “오늘(8일) 양곤에 물이 허리 위로 찬 사진을 봤다”며 곧 우기가 시작될 것을 걱정했다. 그는 “현재 90퍼센트가 학교를 못 가고 있고, 파업으로 병원, 물류 등이 엉망이고, 도난도 많이 일어난다. 기본 구조가 돌아가도록 파업을 철회하고 안정돼야 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받는다. 그 점에선 시위 방향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기본적 사회 시스템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증오와 원한도 커졌다. 디라 스님은 “내가 있는 마을이 한국으로 치면 면 단위다. 사람들이 서로 잘 안다. 쿠데타 일어나고 한 달 뒤부터 밤에 총소리가 몇 번 들리고, 아침에 탁발 공양 가면 붕대를 멘 사람들이 한두 명씩 보였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경찰의 가족과 어울리면서 밀고하면 안전을 보장 못한다’고 경고하는 내용의 벽보가 붙었다. 그는 “마을에 딸 셋을 둔 경찰이 있고, 그 집 앞에는 마을 남자들이 대기하곤 했는데, 쿠데타 이후로는 그 집 앞에 아무도 얼씬 안 하고 딸들은 집 안에만 있다”며, 이렇게 마을 사람들 사이에 증오가 생긴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디라 스님은 미얀마 청년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한국의 촛불시위를 온라인으로 접한 미얀마 청년세대들은 어른 세대와 다르게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디라 스님이 가르치는 한 학생은 그에게 “죽더라도 싸우겠다”라고 말하며 시위에 나갔다. 그는 “그 학생만이 아니라 대부분 청년이 그런 생각을 한다.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정이 있어 시위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음은 같다”고 말했다.
토크쇼가 끝날 무렵, 그는 “외국인으로서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학생들을 두고 온 스승으로서 죄책감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신념으로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을 보면서 경외심이 들고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끝으로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한국 시민사회, 종교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냐는 질문에 그는 “(미얀마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데, 줄이지 말아 달라. 그림, 사진, 영화 뭐든 좋다. 계속 기억하고 끊임없이 이야기 되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한편, 토크쇼를 연 프란치스칸 JPIC와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불교행동은 5월 29일부터 6월 11일까지 “미얀마 사진전 & 그림전 : 그곳에 또 다른 우리가 꿈꾸며 산다” 전시회를 갤러리 더숲에서 진행하는 등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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