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시작은 “밀양 할매들의 자존과 존엄 실현”
밀양송전탑대책위, 행정대집행 이후 7년 포럼 “끝나지 않은 폭력과 파괴된 마을”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대규모 공권력으로 행정대집행이 벌어진 지 7년. 밀양765kV송전탑반대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송전탑 건설의 부당성과 국가폭력, 마을 공동체 파괴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는 포럼을 열었다.
7일 열린 포럼에서는 “끝나지 않은 폭력과 파괴된 마을”을 주제로 김영희 교수(연세대)가 지속된 국가폭력과 마을 공동체 해체 문제, 정수희 집행위원(대책위)이 정부조사단 추진 경과와 쟁점을 짚었다. 이 자리에 함께한 밀양 주민들과 현재 송전탑 건설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봉화, 홍천 주민들, 관련 활동가들은 각자 경험을 나누며 연대의 의지를 다졌다.
먼저 김영희 교수는 2014년 6월 행정대집행 뒤 마을 주민들의 구술 연구 결과를 통해 국가와 한전이 어떻게 마을 공동체를 파괴했는지 살폈다.
김 교수는 송전탑 건설 추진 전 과정에서 정부와 한국전력(이하 한전)이 밟은 절차들은 형식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설명회, 제한된 정보만 제공, 자치적 주민회의를 방해하고 자의적으로 새로운 주민회를 만들어 주민자치 시스템을 무너뜨리기, 이장 등 자치 세력들을 주민 회유와 압박에 동원하는 등 한전은 다양한 방식으로 마을과 주민의 자치권을 훼손했다. 그 배후에는 대규모 경찰력과 행정력을 지원하는 국가가 있었다.
김 교수는 주민들의 구술에서 한전이 다양한 방식으로 회유하고 협박했음을 확인했다. “공론화위원회 등 형식적 절차에서 지역주민 참여는 있었지만, 논의를 주도한 것은 자본과 국가권력, 전문가 그룹이었고, 당사자인 주민은 철저히 배제됐다”고 지적했다.
그 뒤 남은 것은 “밀양 할매”로 대표되는 저항 주민들의 심리적 외상과 마을 공동체의 파괴다. 행정대집행, 의사결정 배제 등 물리적 폭력은 멈췄지만, 마을 사람들의 파괴된 관계와 일상은 국가폭력이 끝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예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
“이 돈지랄로 마을이 작살났다”
농촌 마을에서는 마을이 생활의 기반이며, 공동체가 관계의 총체이기 때문에, 송전탑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의 삶은 고립되고 찬성했던 주민들과의 사회적 관계는 단절됐다. 밀양 송전탑 투쟁 과정에서 두 명이 희생된 뒤 제정된 ‘송변전 설비 주변 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이뤄진 보상은 마을 공동체를 더 빨리 해체시켰다.
주민 대다수는 보상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송전탑 반경 1킬로미터 내외에 따라 보상 기준을 달리한 제한 규정 때문에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끊임없이 계속됐다.
김 교수는 “합의를 이룬 마을도 있지만, 밀양에는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거나 해결할 방법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서 “마을 보상금으로 다같이 야유회를 가거나 회식하는 경우에도 1킬로미터 바깥에 있는 몇몇 세대를 제외하는 일도 벌어지는 것이 현재 밀양의 상황이다. 주민들은 예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한전은 자체 매뉴얼에 따라 일방적 합의로 주민들을 압박했다. 형식적 절차를 지키면서도 사람들을 갈라놓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 권력 관계를 파악해 이용했다. 일례로 반대 운동을 하는 주민 자녀의 직장까지 알아내 압력을 넣기도 했다. 한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음 약한 할머니들에게는 “당신이 고집을 부리면 이장이 감옥에 간다, 마을에는 몇백이라도 받으면 형편이 나아지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 때문에 합의를 못한다”면서 공동체의 관계를 빌미로 압박했다. 반대 운동을 하는 주민들은 불만이 많은 사람, 보상금을 더 많이 받으려고 떼쓰는 사람이란 여론도 만들었다.
김 교수는 “노동과 일상 등 삶의 모든 부분을 함께하는 농촌에서 대부분 합의하는데 자신만 합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며 모든 일상을 혼자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선대 때부터 평생을 일궈온 관계들 안에 남은 것은 비난과 조롱이었다.
김 교수는 “할머니들조차 당신들 때문에 동네가 발전을 못한다, 송전탑 막는다더니 못 막고 뭐 하느냐 같은 조롱이 싫어 버스를 타기 어려운 상황이다. 젊고 활동적이고 사회적 관계망이 폭넓은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가늠하기 어려운 정도”라면서 “비난과 조롱 속에 사회적 관계의 기반을 계속해서 잃는 경험이 매우 힘들었다는 구술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뿐이 아니다. 보상금 차등 지급 등 자본을 활용한 갈등의 조장도 계속됐다. 한전에 얼마나 협조적이었는가에 따라 줄을 세우며 개인과 마을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는 것이다. 밀양 어른들은 “이게 한마디로 다 돈지랄이다”, “이 돈지랄로 마을이 작살났다”고 표현했다.
서로를 횡령으로 고발하고, 언성이 높아지면 곧바로 소송이 돼 버린다. 문제는 이 소송을 한전이 지원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친인척이거나 동창, 동창의 부모, 자식의 친구로, 어른들은 젊은이를 격려하고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섬기며 살던 이들이다. 송전탑 건설을 거치며 이제는 반대 운동했던 할머니에게는 인사하지 말라는 이까지 생겨났다.
김 교수는 이것이 반대 운동을 했던 주민이나 마을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합의했던 마을이나 주민도 각종 송사에 시달리고, 합의금을 부동산에 투자해 실패하거나, 합의를 주도했던 일부 주민들이 마을의 보상금을 착복하기도 했다. 이러한 송사는 2017-18년쯤 가장 많았고, 해결된 것도 있지만 새로 시작되는 것도 있어 분쟁의 씨앗은 여전히 있다.
회복의 단초는 송전탑 반대 운동한 이들의 자존과 존엄 실현
김 교수는 파괴된 마을공동체가 언젠가 회복되기 어렵다고 봤다. “단 한 번이라도 마을에서 새로운 정의가 실현되고 구성원들이 그 실현의 현장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폭력의 고리가 끊어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채로는 파괴된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심리적 상처”도 치유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밀양에 사는 누구나 탈원전, 탈송전탑의 정치적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확인하고, 한전과 국가 권력이 저지른 폭력의 내용을 이해”하며,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탈송전탑과 탈원전 운동을 해온 이들의 자존과 존엄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장면이 실현될 때”에야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공동체 파괴를 단순 갈등으로 보는 정부
정수희 집행위원(대책위)은 그동안 진행된 밀양송전탑 진상조사를 위한 정부조사단 추진의 경과를 짚었다.
대책위는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국민인수위원회에 4대 요구안과 10대 정책제안서 제출, 2018년 한전에 대한 두 번째 공익감사 청구, 정부조사단 추진을 촉구해 왔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밀양송전탑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대선 약속을 저버렸고, 탈핵 정책이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정부조사단 추진은 단 세 차례 시도됐다.
밀양 주민들에게는 밀양송전탑 건설의 타당성, 한전의 주민 매수와 방조, 공모 등의 불법, 부당 행위 등의 진실을 밝히고 심각하게 파괴된 마을 공동체에 대한 대안 마련이 매우 중요하다.
2018년 처음 시도된 조사단 추진은 2019년 6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밀양 송전탑 건설 과정에서 경찰의 인권침해를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정부 권고안까지 제시하면서 다시 시작됐지만, 지난 3월 끝내 결렬됐다.
산업통상부가 제시한 조사 대상에 한전의 공동체 파괴 행위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산업부는 공동체 파괴가 아닌 사업주체와 주민 사이에 생긴 단순한 갈등으로 인식하는 한계를 보였다.
정수희 집행위원은 “경찰과 한전이 자행한 폭력과 마을공동체 파괴는 진행되는 현안이며, 진상조사와 처벌, 사과는 주민의 핵심 요구”라면서 “문재인 정부에서도 산업부는 진상조사 요구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 산업부로 파견된 한전 직원이 작성한, 한전 입장과 똑같은 공문을 보내오는 등 밀양 주민을 기만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도시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 대규모 발전시설을 짓는 방식으로는 송전탑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지역 간 불평등과 갈등이 계속되기 때문에 핵발전소 같은 대규모 에너지 생산 시설의 폐쇄, 지역 분산형 에너지 사회로 바꾸기 위한 논의가 필요다”고 제안했다.
“봉화와 홍천은 또다른 밀양”,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는 밀양, 봉화, 청도, 홍천에서 송전탑 반대 운동을 펼쳐 온 주민들과 관련 활동가들이 소회를 나누고, 현재 송전탑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봉화와 홍천에 연대의 목소리를 보냈다.
밀양 주민 박은숙 씨는 “국가폭력으로 너무 긴 세월을 보냈는데 그동안 어르신들이 아프시거나 돌아가시기도 해서 가슴이 아프다. 지금 봉화와 홍천에서 우리랑 같은 아픔을 겪어야 하는 분들이 있어 안타깝지만, 아직 지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질기게 버텨야 한다”고 당부했다.
청도 주민인 이은주 씨는 “반대했던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마을을 위해 반대한 것인데 지금 그 이익은 찬성한 사람이 모두 가져가고 괴로움은 반대한 사람들이 겪고 있다”면서 “우리 마을 50가구 중 10가구가 7년 넘게 싸우고 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 달라”고 격려했다.
이어 봉화에서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는 송동현 위원장(백두대간송전선로반대봉화군민비상대책위원회)은 “송전탑 이야기만 하면 밤에 잠도 안 오고 눈물이 난다. 한전도 문제지만 행정기관을 비롯해 지역에서 밀어붙이는 분위기가 대다수라 몇몇이 막기에는 매우 벅차다”면서 “그러나 밀양과 청도의 정신을 이어받아 끝까지 반대를 외쳐 보겠다. 연대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홍천 송전탑 반대 주민 조인자 간사(홍천군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도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울진에서 가평까지 220킬로미터, 440기의 송전탑을 세우겠다고 한다. 홍천지역에는 100여 개가 세워지고 사업 지역 전체 가구의 56퍼센트가 홍천에 집중돼 있지만 주민의 안위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어 그는 “한전은 밀양의 상황을 재현하지 않으려 입지선정위원회라는 임의기구를 만들어 사업을 추진하지만, 입지위원 중 지역대표라는 이들은 회의 내용과 결과를 주민과 공유하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리고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한다는 것이 문제”라면서 2018-19년에 걸쳐 입지선정위원회가 진행되도록 홍천 주민들은 아무도 몰랐다고 밝혔다.
그는 주민들이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500kV(HVDC)는 (땅속에 송전로를 묻는)지중화가 가능한 만큼 주민과 충분한 논의를 거치고 정보를 투명하게 밝혀 주민들을 또다시 고통의 늪으로 빠뜨리지 말라고 촉구했다.
한편 이날 마을공동체 파괴 대책과 앞으로의 연대 방안도 논의됐다.
이헌석 정책위원(에너지정의행동)은 핵발전소, 석탄화력발전, 군사시설 등 국가폭력을 수반해 왔던 개발문제가 지역 안에서 한계에 부딪히지 않고, 밀양과 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현실을 알리고 새로운 싸움을 계속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진 활동가(다산인권센터)는 한전은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주요 주체이지만 기업이라 정작 책임에서는 빠져나가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전과 같은 공기업은 물론 사기업들이 벌이는 인권침해에 대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이며 이를 위한 정부의 역할과 책임 방안을 마련해야만 반복되는 한전의 인권침해를 멈출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어 그는 “너희는 전기 안 쓰느냐는 모욕과 함께 마을 주민들에게 파괴된 일상을 감당하라고 하면서 결국엔 일상을 파괴당하지 않은 대도시 주민들이 그 이익을 그대로 받는 불균형을 우리 사회가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면 일방적 희생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봉화와 홍천은 또다른 밀양이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서 “피해 주민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아야 하고, 이 보상에는 산자부가 거부하고 있는 파괴된 공동체까지 포함된다. 공동체 파괴에 대한 본격적 논의하고 대책을 마련할 책임은 지금 정부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한편 대책위는 이번 포럼에 이어 11일에는 밀양 영남루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이달 30일까지 밀양 내에 전국 연대자 현수막 달기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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