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이념 아닌 비열한 폭력의 문제

제주 4.3 70주년 학술 심포지엄 2

2018-02-23     정현진 기자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22일 열린 학술 심포지엄 ‘제주 4.3의 역사적 진실과 한국 현대사에서의 의미’에서는 제주 4.3의 통합적 의미에 대한 강우일 주교의 기조 강연에 이어, 화해와 상생의 세계적 모델로서 제주 4.3과 4.3의 철학적, 역사적 의미를 짚는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제주 4.3, 화해와 치유의 세계보편 모델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이상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던 제주4.3의 절대 비극적 유산을 극적으로 극복해 온 제주민들의 역사적 궤적의 귀결은 혁명적 자기 변혁을 통한 평화, 인권, 화해, 상생의 모습 자체였다.”

김대중도서관장 박명림 교수(연세대)는 제주 4.3 이후, 제주도민의 진실과 화해, 포용, 상생을 위한 노력은 ‘세계보편적 치유 모델’이라며, “4.3 뒤, 모든 생명이 죽고 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 제주민들은 절대 폐허를 넘어 진실, 화해, 상생을 향한 상상할 수 없는 고결성을 보여 줬다”고 했다.

그는 킬링필드, 아우슈비츠와 같은 대학살에 비춰, 제주 4.3 극복과정과 그 형태는 ‘제주 모델’, ‘제주 4.3 치유모델’, ‘제주 정신’으로 이름 짓고, “모든 국민, 지도자와 공유하는 한편, 남남갈등과 남북분단의 극복 모델, 과거사 극복의 모범적 세계 보편 모델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박명림 교수는 이른바 제주 모델의 핵심은 “민관 협력과 협치 정신, 화해협력과 평화공존의 정신, 도민들 사이의 단합과 연대, 결속의 정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지속성”이라고 꼽았다.

제주의 비극성은 무엇보다 형제나 부자지간이 각각 경찰과 무장대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고, 민간인들이 국가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국가를 위한 유공과 국가에 의한 희생으로 구분해 온 것에 대해, “서로 엇갈린 죽음 앞에서 이념이란 무의미를 넘어 악독한 것이며, 제주민들의 입대나 입산은 이념적 선택이나 충성, 반역의 선택이 아니었다”며, “유공자와 희생자의 구분은 평등한 인간들의 죽음 앞에서 사라져야 하고, 그 삶을 둔 구별도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제주 4.3 안에서 제주도민들은 유공과 희생을 사회적 죽음 또는 역사적 죽음으로 통합해 내는 불가능에 가까운 지난한 작업을 해 왔다며, “제주 공동체가 서로 용서하고 관용하며, 화해와 상생, 인권, 평화까지 담아낸 이 과정은 제주의 범위를 넘어서고 한국사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한 화해와 극복에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를 통한 관용의 의미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주 4.3의 정신과 가치를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누구에 의한 어떤 범죄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며, “제주도민들은 진상규명 과정에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처벌과는 별개로 책임을 규명하는 것은 재발 방지와 교훈을 위해서 필수적이며, 책임의 범위와 범주 역시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법률과 형사적 개념이 면제된다고 해도,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인간적 책임은 여전히 남아 있다며, “무고한 시민에 대한 최초의 집단 학살, 대량 학살에 대해, 한국 사회와 국가 전체가 집단적 죄의식과 책임의식을 느낄 때, 비로소 4.3은 전체 한국을 묶는 재생과 갱생의 접점, 연대 요소가 될 수 있다. 학살에 대해 한국민 모두는 동시대의 인간적 죄인”이라고 했다.

박명림 교수의 발표에 대한 토론은 백장현 교수(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와 박찬식 박사(제주학연구센터장)가 맡았다.

제주4.3평화공원 4.3 당시 행방불명자들의 묘역. ⓒ정현진 기자

제주 4.3 피해자들에게 화해 강요할 수 없어

백장현 교수는 “제주4.3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었는가?”라고 물으며, “제주 4.3이 과연 보편이 될 수 있는가, 제주도민에게 화해를 강요해서는 안 되며, 차이에 대한 인정이 화해와 평화의 시작”이라고 반박했다.

백 교수는 “4.3 피해자들의 분노와 한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고, 그럴 조건도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 또 제주 4.3을 일반적 모델로 삼는 것 역시 용서와 관용을 외부에서 강요할 수 없다”며, 화해란 가해자들의 진심어린 사과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에 따라 점차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화해와 평화의 다른 해법으로 ‘차이’의 인정을 제시했다. 그는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나와 다른 생각과 문화, 우리 집단과 다른 생각과 문화를 허용할 수 없다면 평화는 꿈도 꿀 수 없으며, 사회도 유지될 수 없다”며, “제주 4.3을 넘어서려면 당시 각 공동체의 책임을 담당했던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필요하다. 당시 가해자, 피해자들의 생각 차이, 노선 차이, 당시 제주도민이 염원한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3당시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성찰, 민족공동체로서의 동질감이 있었다면 민간인 대량 학살의 사태로 나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어 박찬식 센터장은 제주 4.3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했던 제주민란의 전형을 드러내며, 그들은 이념이 무엇인지 모른 채, 오직 침략당한 공동체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저항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4.3은 항쟁과 진압의 양측 모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갈등의 상처를 남겨 놓은 채 미봉됐다며, 70주년인 올해까지도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이념 대립 구도는 여전하다고 설명하면서, “앞으로 4.3에 대한 논의와 인식은 폭동이나 항생의 이념 대립 구도를 넘어서는 남남화합과 남북통일의 미래지향적 길로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그는 “유공과 희생을 통합해 두 가치가 대립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똑같이 대우 받는 세계 보편적 가치를 창출하기를 바란다”며, 후대에 남겨진 4.3의 이름을 정하는 과제 또한 이 틀 위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 4.3, 이념의 패러다임에서 폭력-회심 패러다임으로

“그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는데, 무덤이 있으면 비석이 없고, 이름을 새긴 비석이 있으면 무덤이 없다. 이 어긋남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임산부도, 이름조차 없는 젖먹이도, 닥치는 대로 아무나 죽이고, 아무데서나 죽이고, 아무데나 파묻고, 수장시켜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한 살인자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마지막 발제를 맡은 김상봉 교수(전남대)는 여전히 ‘4.3의 이름 없음’을 통해 철학과 역사의 맥락에서 제주 4.3을 바라봤다.

김 교수는 제주4.3은 어느 편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객관적 사실 인식부터 가치 평가에 이르기까지 그 판단은 분노와 적개심까지 동반한 극한 대립으로 남아 있다며, “4.3의 특징인 분열과 대립은 ‘폭력’에서 비롯되며, 그 적대성과 폭력은 은폐되고 억압되어 있을 뿐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70년 전의 사건을 우리 자신의 일로 돌아봐야 하는 이유도 1948년 4월 3일 당시 제주에서 일어난 폭력적 대립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4.3을 부른 여러 이름은 폭력적 충돌과 대립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무시하거나 비본질적 요소로 치부해 왔다.”

또 그는 제주 4.3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분단 상황에서 수동적으로 규정된 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이 아니라 분단을 각자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하고 추동했던 두 적대 세력 사이의 충돌이었다며, “4.3은 해방 훨씬 전부터 국민들 마음속에서 시작된 정신적 분단이 해방공간에서 현실적 충돌로 표출된 것”이라고 봤다.

“남로당 무장대가 우익인사인 문영백의 집을 습격해 그의 두 딸(14살, 10살)을 살해한 것이 범죄라면, 군경 토벌대가 북촌마을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한 것 역시 범죄이긴 마찬가지다. 양측은 서로 간의 전투가 아니라 비무장 민간인 학살에 더 몰입했다.”

제주4.3평화공원 모녀상 '비설'. 제주4.3 '초토화작전' 당시, 25살이던 '변병생'과 그의 2살짜리 딸이 피신 중 총에 맞아 죽었다. ⓒ정현진 기자

김 교수는 제주4.3을 파악하는 또 하나의 관점으로 ‘민간인 학살’에 주목했다. 4.3은 군경 토벌대와 남로당 무장대 간의 충돌과 죽음보다 더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무고한 민간인 학살’의 측면에서 보면, 대부분 군경 토벌대의 민간인 학살을 말하지만, 남로당 무장대의 살인 또한 같은 무게로 봐야 한다며, “군경 토벌대에 의한 학살이 80-90퍼센트로 절대적이긴 하지만, 무고한 인간을 살해하는 행위를 두고 상대적 숫자의 차이 때문에 어느 한 쪽을 정당화하거나 두둔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범죄를 두 집단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좌우를 막론하고 살인자들은 희생자들이 자기들에게 살인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며, “그런 논리가 항상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량학살의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살인의 원인을 떠넘길 때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먼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4.3에서 자행된 민간인 대량 학살에서 “비겁하고 비열한 폭력성을 본다. 누가 먼저, 언제, 어떻게 폭력을 행사했느냐가 아니라, 무고한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비무장 민간인 학살에 몰입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는 1948년 12월 3일 무장대가 세화리를 공격한 상황을 들어 “무장대는 경찰지서를 공격하지 않았고, 경찰은 무장대의 습격에 반격하지 않았다. 대신 무장대가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한 뒤, 경찰도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했다”며,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을 회피했다는 점에서 비겁하고 맨손의 약자를 무기로 살해했다는 점에서 비열했다. 둘의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김상봉 교수는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 이상적 나라 지향, 내적 절제와 규율에 따른 폭력”이라는 항쟁의 원칙에 따르면, 제주 4.3은 분명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고 항쟁은 제주의 명예였다면서도, “그러나 남로당 무장대가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그 봉화불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빛이 아니라 적대 대한 분노와 증오의 화염이었고, 그렇게 양측이 쌓은 악행으로 민중의 순수한 항쟁 의지는 배반당했다. 배반당한 항쟁이라는 것이 4.3의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4.3을 생각한다는 것은 입으로 통일을 원한다면서 행동으로는 더 고착시킨 분단 앞에 분노와 증오로 갈가리 찢어진 마음의 지옥도 앞에 정직하게 마주서는 것”이라며, “4.3이라는 이름 없는 비석에 이름을 새길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거울이기 때문이며,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사랑과 믿음을 저버린 죄인이다. 4.3을 생각하는 것은 거울 앞의 회심, 참회”라고 말했다.

교회, 제주공동체의 고통과 죽음의 그늘에 아파해야

김상봉 교수의 발표에 대한 토론에 나선 한재호 신부(제주교구)는 4.3을 이념의 패러다임에서 폭력-회심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김상봉 교수의 관점에 “이념적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것은 진상규명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무장대와 토벌대의 폭력은 같은 범죄라는 양비론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 신부는 4.3의 신학적 관점에서 “(현재까지 제주도민에게 남아 있는) 4.3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의 원체험은 탐욕과 분노, 이념에 대한 지나친 교만, 인간 존엄에 대한 냉대, 폭력에 대한 불감증적 인식에서 발생했다”며, “이는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화, 조직화된 것으로, 신학적으로 보면 구조적 악이며 세상의 죄, 곧 ‘원죄’의 구도 속에 놓여 있다”고 했다.

그는, “교회가 제주 지역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제주의 원체험 안으로 들어가 제주도민이 지금까지 겪고 있는 고통과 죽음의 그늘에 아파해야 한다”며, “그 안에서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이념이 아닌 복음적 패러다임으로 구현해야 하며, 제주가 군사 기지가 아닌 평화의 섬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제도나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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