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히 행복을 즐기는 법
[기획-낭비사회의 좋은 소비]
밥벌이는 지겹지만 돈쓰기는 즐겁다고 한다. 요즘 청년들을 삼포시대라 하는데, 밥벌이가 어려워 결혼도 취업도 포기한다지만, 한 주일 내 저렴한 라면과 우동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모은 돈으로 주말에는 볼거리를 찾아 여행 가고, 거기서 값비싼 밥집을 찾아가는 재미로 사는 친구들이 꽤 많다고 들었다. 밥벌이는 익숙하지만, 돈쓰기는 아직 낯설어하는 중년이 갑자기 불쌍해 보인다. 씀씀이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소비하느냐는 것이다. 시간과 돈을 허비(虛費)하는 것은 문제지만, 인색한 것은 더 나쁘다. 허비함은 생각이 없음이고, 인색함은 덕이 없음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교황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모든 사람이 이른바 소비의 자유를 누리는 한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다.”(203항)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많아도 빈털터리면 허사다.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인생의 목적이 생계유지”인 것처럼 살지 않는다. 그러나 기본생활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유’를 얻기 위한 조건으로 돈을 버는 것은 허망하다. 교종은 “마음이 공허할수록, 사람들은 구매하고 소유하고 소비할 대상을 더욱 필요로 한다.”(204항)라고 말했다.
교종은 아주 묘한 이야기를 회칙에서 던졌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소비능력이 늘어나면서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무엇보다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못함”을 교종은 아쉬워한다. 많은 것을 갖는 것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실재 앞에서 차분히 머무르는 행위”를 더 높이 평가한다. 절제를 통해 얻은 그 사소한 것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준다고 교종은 생각한다. “순간순간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 충만하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226항)이 그래서 필요하다.
예수님이 들에 핀 나리꽃과 하늘의 새를 바라보라고 권할 때, 자신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하고 진지하게 물었던 부자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마르 10,21) 말씀하셨을 때, 예수는 행복의 다른 길을 가리키고 계셨다. 결국 부자 청년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에서 절망감을 느꼈지만, 정작 그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고 있었던 예수님은 ‘하느님 안에서’ 행복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과 피조물과 온전히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피상적이고 공격적이며 충동적인 소비자로 만드는 병적인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찬미받으소서>, 226항)
뜻밖의 소식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