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미움 받게 하소서
7월 주일 복음 묵상
7월 5일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더 많이 미움 받게 하소서
미움을 받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렵고 떨리는 일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큰 특권이며 영광인지요. 되돌아보면 내가 과연 예수님 때문에 누구에게서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만난 이들, 또는 마음이 착한 친지와 친구들이거든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미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내 이름 때문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이고 진리이며 평화입니다. 아하! 그러니까 사랑 진리 평화 때문에 배척 받는 것이군요. 사사로운 개인 사이의 인간적 미움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예수님처럼 불의와 거짓에 저항하다가, 그러니까 정의와 진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는 것이군요.
그러고 보니 저도 '미움' 좀 받았습니다. 저는 집하고 성당만 오가던 사람이었고, 동네 밖에는 잘 나다니지 않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당엔 나오지 않고 날마다 거리로 나가 미사를 드린다니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더군요. 해고노동자들 이야기를 하거나 용산참사 이야기를 하면, 그런데 다니지 말라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분은 매일 미사 거르지 않고, 피정이란 피정은 다 다니며 성당에서 성서공부 봉사자 역할에 열성적인 천주교 신자이시지요. 세월호 참사 이후 몇 달이 지나자 오랜 세월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가 충고하더군요. 이제 그만 하라고. 그 유가족들 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아녜스는 그런데 가서 힘쓰느라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아,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외인들에게서 듣는 소리는 그렇다 해도 같은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신앙'을 들먹이며 사회정의 참여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충고를 주는 데에는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옵니다.
하느님!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과 진리와 평화를 위해 더 많이 미움 받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나라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한 귀퉁이라도 들어 드리도록 더 많은 사람에게 미움 받게 해 주십시오, 아멘.
7월 12일 / 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때로는 성서 말씀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이 그렇습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정말 우리가 받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정말 우리를 파견하셨을까요? 게다가 "길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다니... 이건 그저 먼 옛날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우리와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 안에 예수님의 제자 된 그리스도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더러운 영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탐욕과 불의와 거짓으로 세상을 더럽히고 선한 이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과연 저들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은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나라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빵이나 여행보따리나 전대의 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리, 생명, 평화로 무장하고 더러운 영으로 무장된 적군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람의 가치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탐욕의 영은 물러가라. 권력과 자본을 잃을세라 선한 이 짓밟는 불의의 영은 물러가라. 진실을 덮어버리려는 거짓의 영은 물러가라.
7월 19일 / 연중 제16주일 · 농민주일 (마르 6,30-34)
다시 파견되기 위하여
성서를 읽다가 그 장면을 그림처럼 마음속에 그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장면 속 사람 하나가 되어 예수님 곁에 서 있어 보신 적이 있는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스승이 명하신 대로 충실히 사명을 이루고 돌아온 사도들이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님께 보고 드립니다. 그러자 스승 예수님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는 제자들에게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입소문을 타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은 널리 퍼지고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오는데, 그래서 당장 제자들이 할 일도 태산일 텐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외딴 곳으로 보내십니다. 가르침과 병 고침 받으려고, 권위 있는 말씀을 들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소중하지 않아서 일까요? 그들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 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많은 이들을 더 오랫동안 돌보시기 위하여 그러셨을 것입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의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곁에 계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멈추어 세워 놓으십니다.
모든 곳이 '현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은 고통의 자리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니고, 행동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여러 고통의 자리에 가서 연대하고 함께 그 고통을 나누어집니다. 심하게 아파 몸져 눕지 않는 한 편안하게 집에서 있을 수 없어 날마다 거리로 나섭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심신이 지치기도 합니다. 이 때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나를 돌봄 없이 무조건 현장에 가는 것만이 최선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된 사람들인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사랑의 사명을 살고 예수님께 돌아와 이 말씀을 듣습니다. 얘야, 오늘도 고통의 자리에 가 있었구나. 하느님이 아파하시는 곳에 가서 같이 눈물 흘리고 있었구나. 억울하게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과 함께 진실을 인양하라고 외치고 있었구나.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난 철거민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구나.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 사랑을 살았구나.
그래, 이제는 멈추어 쉬거라. 고요히 내 앞에 머물러 앉아 있어라.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화와 기쁨으로 너를 채워주겠다. 나와 일치하여 생기 돋아나거라. 그러면 나는 너를 다시 세상으로 파견하겠다.
7월 26일 /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013년 초여름, 대한문 앞에서 날마다 미사를 드리던 때, 경찰이 기습적으로 분향소를 철거하고 이에 저항하는 쌍용차 해고노동자 형제님들과 서영섭 신부님을 마구 연행해 가고 나서, 우리는 어김없이 미사를 봉헌하고 그 자리에서 촛불을 켠 채 묵주기도를 올리며 밤이 어둡도록 자리를 지키고 앉아 연행된 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014년 초여름, 수천 명의 경찰이 여리고 순박한 밀양 할배할매 어르신들에게 행정대집행이라는 공권력의 폭력을 감행하고자 산 위를 포진하고 들어서는데, 어느 신부님께서는 해맑은 얼굴웃음 지으며 괴물 같이 큰 덤프트럭 앞을 막아서고 앉아 계시고, 가녀린 수녀님들은 경찰망을 뚫고 잠행을 하여 산에 올라 어르신들 팔에 팔을 끼고 움막을 지키며 밤을 지새웁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014년 무더운 여름, 죄 없는 생명들이 속절없이 바다에 수장되고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이 광화문에서 가슴을 뜯으며 지내고 있는데,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은 천막성전을 길 위에 세우고 열흘이 넘도록 단식을 하며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015년 초여름, 일 년이 넘도록 아무 것도 달라진 것도 밝혀진 것도 없는 답답하고 참담한 상황에서, 인적도 드물어진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는 여전히 거리 제대가 차려지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정성스레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는 수도 없이 제 안에 올라온 질문입니다. 아니, 현장에 나오는 많은 분들이 어쩌면 같은 생각을 한 두 번은 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한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말은 오늘 저에게 이렇게 들립니다. “이미 이 사회는 거대한 구조적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철통 같은 권력이 버티고 있는데,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모여 기도하고 미사 봉헌하는 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회의 모든 부분이 다 부패되어 있고 나날이 더 썩어 들어가는 시절에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같은 존재입니다. 나 하나 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아이 하나가 내어 놓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수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나 하나, 너 하나, 그리고 우리가 모두 녹아 들어가면 상한 냄새 진동하는 이 나라가 정화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분명코 기적은 일어납니다. 허나 그 때와 방법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너희는 소금이다." 하신 주님 말씀에 "예!"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제멋대로 소금이 되기를 원하거나 소금이 되기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소금으로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식하고, 기도하고, 미사 봉헌하고, 고통 받는 이들 곁에 가 함께 울면서 우리는 그렇게 자신을 내어 놓습니다. 이 모든 작은 행동 하나하나는 분명코 소용 있는 일입니다.
민윤혜경 / 번역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