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아름답게 흙을 만진
이 밭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농민 임봉재 선생 인터뷰
지리산 자락을 두 팔로 감싸 안은 느낌이었다. 고속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산을 넘고 넘어 산청 입석리 마을, 임봉재 선생을 만나러 갔다. 집 마당은 이미 붐비고 있었다. 이슬비가 내리고, 라디오 음악이 크게 들리고, 키 큰 성모상 앞으로 고양이 똘이가 어슬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봉재 선생은 밭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뿌리가 억세기로 이름난 바랭이 풀을 비가 온 틈을 타서 뽑아낸다고 했다. 호미를 내려놓고 흙을 훌훌 털며 집안으로 들어선 그는 이내 밥상을 차렸다. 그가 차려 내어준 점심 밥상! 손수 밭에서 키운 푸르고 싱싱하고 깨끗한 먹을거리가 가득했다. 상추, 섬초롱, 민들레, 방풍나물... 온갖 야채들이 푸른 깃을 내밀고 있었다. 이런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 임봉재 비비안나, 농민운동에 평생을 바치고 이제 산청지역 농군으로 살고 있는 여성농민이다.
예수님이 아직 살아계시다면 어부 아닌 농부를 제자로
그는 거제도에서 대대로 내려온 구교 집안 출신이다. 열 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서너 살부터 교리문답을 외우는 것으로 말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딸아이는 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다 하셨지만 학교 안보내주면 밥을 안 먹겠다고 단식투쟁하는 손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셨다고 한다. 신자로서 농민운동을 해온 그의 말에서 하느님께서 농부로 살라는 소명을 주셨다는 확신이 묻어난다. 농민운동을 하게 된 동기를 묻자 그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눈빛이 되어 대답한다.
“박정희 정권 당시에 농민운동 하는 사람들을 다 빨갱이라고 몰아붙였잖아요.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막 나무라셨어요. 왜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여럿 힘들게 하느냐고요. 저희 아버지가 무척 엄한 분이셨어요. 한 번도 아버지 말씀에 대꾸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아버지, 천주님의 자녀로 예수님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늘 가르치셨잖아요. 만약 이 땅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부를 제자로 삼지 않으시고 아버지 같은 농부를 제자로 삼으셨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따르며 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 말씀을 안 하셨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그 뒤에 아버지께서 농민회 회원이 되셨더라고요.”
그가 어릴 적 거제도에는 공소만 있었다. 일 년에 겨우 두 번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목수이기도 했던 그의 부친은 집을 아예 성당으로 쓸 수 있게 방문을 전부 미닫이로 해서 지었다. 6.25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 때문에 농사짓던 땅을 다 빼앗기고 나서 부친은 배타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때 어부의 노임은 돈이 아니라 찌꺼기 생선이었다.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 보리쌀로 바꿔 와야 양식이 생겼다. 아버지는 평생 올바르게 살고, 열심히 일하신 분이었다. 그런데 왜 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또 왜 아무 이유도 없이 공무원이나 관에서 나오는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드는지? 농민운동은 아버지 같은 농민들을 위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농민들도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는 일이지요. 제게 농민운동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스스로 선택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학교 다니면서 의식화,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하던데요. 저는 그런 의식이 없었지요. 오히려 농민운동을 통해 의식화되었다고 할까요?”
여성농민, 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회... 그리고 농부가 된 여자
"밭에서 나는 것은 다시 밭으로 되돌려 줘야"
임봉재 선생은 자신이 여성농민운동에서 시작하여 농민운동으로 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농촌에서 ‘여성’의 존재를 일깨우는 일이 먼저였던 것이다. 가사와 육아와 농사에까지 온몸으로 일하지만 농촌에서 여성은 미미한 존재였을 뿐이다. 한마디로 ‘사람’ 축에도 넣어주지 않는 ‘쳐주지 않는 존재’였다. 그는 시골마을을 다니면서 ‘조직’에 나섰다.
“그때는 참 주경야독했어요. 낮에는 엄마들 찾아다니며 조직을 하고 밤에는 교수님들 찾아가서 농업문제가 무엇인가, 농업과 정치적인 관계에 대한 공부를 했지요.”
여성농민, 가톨릭 농민회, 전국 농민회... 이름과 직책이 약간씩 달라졌을 뿐 농촌과 농민을 위한 활동이 그의 평생을 관통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늘 한 가지 생각이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서 이 바쁜 일들을 해놓고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것이었지요. 주변에서 농민운동 하면서 언행일치가 안 되어 비난받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었어요. 저는 제가 하는 말을 실천하고자 한 거죠. 그리고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농사이기도 하고요!”
1995년에 충북 괴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집도 직접 지어 살았다. 먹거리는 물론 옷도 지어입고 머리도 직접 자르는 자급자족 생활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욕심을 부려서 아예 전기도 없는 마을에서 살고 싶었단다. 그러다가 산청에 옮겨 들어온 게 2000년부터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농민회에서 생명농업을 하는데 그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교구회장으로 4년간 일하면서 진작부터 마음에 두었던 생명농업 부분에 그는 전심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그가 주장하는 생명농업은 지금 그의 밭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우선 무경운 농법이다. 즉, 결코 경운기로 밭을 갈아엎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땅속에 사는 지렁이와 온갖 생명들을 다치게 하면서 농사를 짓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 살아있는 것들과 서로 양보하면서 살기위해 손으로 살살 밭을 갈고 흙을 일군다.
“돌을 캐내다가 곡괭이를 부러뜨려 버렸어요. 옆집에서 답답하다고 기계로 밭을 갈아준다는 것을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어요.”
‘밭에서 나는 것은 다시 밭으로 되돌려 줘야 한다.’라는 소신을 가지고 거름으로 퇴비를 직접 만들어 쓰는 일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비닐도 쓰지 않는다. 비닐을 덮어야 할 일이 있으면 잡초를 베어가다 그 위에 덮어둔다. 그 효과가 월등하다고 그는 자랑한다. 밤사이 고구마 밭을 다 뒤집어 놓고 가는 멧돼지나 씨앗으로 뿌려둔 콩을 낱낱이 먹어버리는 새들도 그는 미워하지 않는다.
“나눠 먹어야지요. 어느 정도 먹다보면 남기는 것도 있어요. 그중에 살아남은 것들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데 그게 더 실하고 맛있어요!”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이 농사
"종자가 없으면 생명농업도 어렵다"
그가 농사짓는 모습은 천의무봉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완전히 자연의 손으로 자연을 가꾸는 일, 그게 바로 농사라는 것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이는 일이 또 있다. 우리 종자 지키는 일이다.
“지난 몇 년간 씨앗을 번식시키는 일을 해오는 중이지요. 종자가 없으면 생명농업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서 쓰는 종자의 유전자 조작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거든요. 화학농법 안한다고 해서 생명농업이라고 할 수 없어요. 유기순환적인 농법이라야 유기농입니다. 사실 지금 유기농이라고 해도 퇴비를 사서 쓰는 것이면 다시 살펴 봐야합니다. 우리 가축들을 먹이는 사료의 원료가 어디에서 옵니까? 외국에서 사들여 온 것인데 그렇게 만든 것을 생명농업이라고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는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종자, 흙, 농민을 꼽는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이 농사인데 생명농업을 제대로 하려면 이 셋을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농촌에서는 셋 중에 어느 것 하나 넉넉한 게 없는 실정이다.
“그래도 씨만 있으면 가능해요. 하지만 내 손 안에 종자가 없으면 농사는 불가능합니다. 몬산토가 지금도 농간을 부리고 있는데, 두고 보세요. 앞으로 5년 안에 종자대란이 일어날 거예요. 종자에 관한한 농민들이 선택권이 없어요. 매년 구매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았잖아요. 종자를 팔기위해서 그들은 계속 개량하고 씨앗을 불임상태로 만들어서 내놓잖아요. 나중에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을 수도 있어요. 농업에서 본질적 기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요. 농민들도 농사를 돈으로 보기 때문이지요. 이 작물이 돈이 될 것인지에만 주목하고 있는 편이지요.”
밭에서 그가 키운 작물의 씨를 받아서 주변에 널리 나눠 주는 일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더 많은 농부들이 우리 땅에서 더 많은 우리 작물을 키워내는 일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는 종자를 굳이 토종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작물의 환경도 바뀌어가니 토종의 개념도 맞춰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온 고추를 심어 보았는데 아주 잘 자란다고 자랑했다. 다른 나라에서 대대로 오던 것을 받아서 우리 종자화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소비자의 의식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토종 열매들이 주로 때깔이 덜나지요. 소비자들이 크고 흠 없는 것만 찾지 말고 토종 작물에 눈을 돌려 줘야합니다. 소비자들이 찾아주면 농사는 짓게 되거든요! 소비자 의식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농업의 본질은 여성성
농업에서 여성성은 무슨 의미인지 물었더니 그가 큰 소리로 대답한다.
“농업의 본질이 여성성이지요! 어머니가 자식을 출산하고 키우는 것과 같아요. 종자만 해도 지금까지 우리 종자를 지키는 분들이 다 농촌의 할머니들이에요. 농부는 엄마! 엄마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는 농사를 지어보면 하느님의 은총을 저절로 알게 된다고 고백한다.
“저는 그냥 밭에 가서 조금만 손을 댔을 뿐인데 얼마나 풍성하게 주시는지 몰라요. 이번에 매실을 많이 땄어요. 봄에 날씨가 추워 꽃이 얼어서 포기했었거든요. 또 새들이 들깨 씨앗을 다 먹어 치운 줄 알았는데 남은 씨앗에서 포기가 막 올라와요! 얼마나 신기하고 고마운지! 하느님은 언제나 일한 것 보다 더 많이 주시지요. 거저 얻는 거지요!”
그의 밭을 보며 유기순환 농사, 생명농법이야말로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농사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떤 존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잠시 땅을 빌려 쓰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모습이 보인다. 훗날 그의 땅을 이어받아 농사를 지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름답게 흙을 만진 이 밭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