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왜 밤을 걷게 되었을까. 그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한때는 사람이었다. 흡혈귀에게 목덜미를 물려 영원히 늙지 않고 죽기도 어려운 흡혈귀가 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120년 전에는 사람이었다. 세상의 온갖 고뇌를 짊어진 채 음석골 고택에 틀어박힌 그는 그냥 흡혈귀도 아니다. 무거운 책무를 지고 있다. 왕조를 쥐고 흔드는 나쁜 흡혈귀인 ‘귀’와 싸워 이겨 세상을 구하라는 임무를 띠고 흡혈귀가 된 뒤로, 120년간 홀로 도를 닦아야 했다. 그의 이름은 김성열(이준기 분).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MBC 새 수목극 ‘밤을 걷는 선비’의 주인공이다.음란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잘 지어내는 정현 세자(이현우 분)는 이런 야한 서책을 계속 써내며 음란서생이라고 자처한다. 죽마고우인 김성열에게 서평을 좀 해달라고 졸라대기도 한다. 그러나 곧 세자가 이런 ‘음란서적’을 써 댄 이유가 밝혀진다. 성열은 음서를 가장해, 궁궐의 비밀을 세상에 알리려 한 세자의 의도를 알게 된다.
성열은 세자의 후궁들이 연이어 죽어 나가는 끔찍한 비극 앞에서 결국 이 왕조의 음습한 200년의 비밀과 마주하게 된다. 악한 흡혈귀인 귀(이수혁 분)에게 ‘피’를 바치고 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다는 굴종의 맹세 끝에,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운 것이었다. 부정한 힘에 의지해, 수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쥔 것이었다. 문제는 ‘귀’가 끊임없이 인간의 피를 먹어야 생존이 가능하기에, 피를 한없이 갖다 바쳐야 된다는 점이었다. 귀는 자신의 권세를 확인하기 위해 왕손들의 여자를 종종 일부러 피의 제물로 삼아 왔다고 했다. 세자가 보는 앞에서 후궁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일을 즐기고, 말을 듣지 않으면 왕이든 세자든 없애버렸다. 방법은 많았다. 궐 안의 권세 있는 자들은 다 귀의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말이다.결국 귀를 처단할 방법을 찾아 이 악한 저주에서 세상을 구하려 발버둥 치던 정현 세자는 ‘역모’로 몰려 참수 당하고 만다. 김성열의 아버지 또한 이 역모의 음모에 연루돼 저자거리에 목이 내걸리는 효수형을 당한다. 김성열은 세자가 유언처럼 남긴 말, 자신이 쓴 비망록을 찾아 귀를 없애라는 명을 받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오랫동안 사랑해 온 이명희(김소은 분)와의 혼인을 사흘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사랑하고 지키려던 이들은 모두 귀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그는 귀와 싸워 온 ‘착한 흡혈귀’인 해서(양익준 분)에게 물려 뱀파이어로 변한다. 해서가 죽어 가면서 귀와 싸울 힘을 전수한 셈이다.성열은 끔찍하게 아름답고 요사스러운 ‘귀’ 앞에서 “이 나라가 정녕 네 발 아래 있다고 여기는 것이냐?”라고 호통 치나 그것도 잠시, 그의 정혼자 명희는 귀의 인질로 잡혀 온다. 결국 “부디 살아 주세요. 살아서 뜻을 이루세요.”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죽어 간다. 명희는 스스로 칼에 찔린다. 귀의 칼에 상처입고 쓰러진 성열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었다. 흡혈귀로 변하여 제일 먼저 맛본 피가 약혼녀의 것이라니! 그 순간의 비참함과 피 토하는 심정이라니!
이후 120년을 뱀파이어로 세상을 떠돌아야 했던 성열의 고뇌와 운명의 굴레는, 정현 세자의 비책을 드디어 마주한 순간 다시 새 국면을 맞는다. 귀의 지배 아래 신음하며 도탄에 빠진 세상, 사람의 목숨이 파리만도 못한 세상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했던 그. 죽어가는 사람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도 구하지 못했던 그는, 세자가 남긴 필생의 비책을 마주하고 귀와의 일전을 준비한다. 정현 세자가 평소에 늘 입버릇처럼 하던 신념인 “사람이 희망인 세상 안에서. 음란서생”이라는 글이 첫 장에 적혀 있는 책이었다. 가장 음란한 방식의 남녀상열지사 속에 들어 있는 더 음란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였다.‘사람이 희망인 세상’이라는 말 앞에서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사람이 희망이어야 한다는데, ‘사람’은 드물다. 모두 예전에 죽었거나 죽었어야 했던 존재들이다. 120년 전, 아니 그 이전의 200년까지 합쳐 320년 전의 ‘죽은’ 것들과 싸워야 하는 설정이 극중 ‘당대인’들의 운명이다. 주요 인물들은 모두 흡혈귀 뱀파이어들이다. 악한 쪽도 선한 쪽도 결국 귀신들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뱀파이어 혹은 좀비들의 이야기를 하도 본 터라, 이젠 이런 이야기도 꽤 당연해 보일 지경이다. 살아 있는 인간들은 ‘살아 있는 시체’ 같은 형태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언제 불시에 뱀파이어들에게 습격당해 죽을지도 알 수 없다. 죽어서 뱀파이어가 되어도 (피를)먹고 살아갈 일이 더 막막해지니 여전히 먹고 사는 일이 천 근 만 근의 노역이다. 사랑을 해도 뱀파이어와 하게 되고, 이루어져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가슴 아프기는 매한가지다. 이게 우리의 현실인식인 것인가. 전 세계 젊은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뱀파이어 이야기에 열광한다는 것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결국 흡혈귀 스토리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 내는 이 상황이 더없이 야릇할 뿐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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