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어디에 써먹을까?
[기획-삶의 도움닫기, 배움]
언젠가 한 편의 일본영화를 보았다. 배경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철포를 쓰기 시작한 번(藩)에 칼과 말로만 맞서 ‘무데뽀(無鐵砲)’라는 말이 나왔던 막부 시절 말기. 왕년에 잘나가던 사무라이는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살며 딸을 열심히 가르친다. 딸이 공부를 꼭 해야 하냐고 묻자, 아버지는 공부를 해야 네가 스스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이렇게 딸에게 배움이 갖는 중요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확실히 자신의 삶을 우뚝 세우기 위함이다. 자신의 삶을 우뚝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 배움은 마치 빛과 같다. 빛은 무엇인가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길을 밝혀주는 것이다. <페다고지>의 저자 파울로 프레이리가 ‘저축식 교육’을 비판하고 ‘문제제기식 교육’을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겠다.
나는 예수살이공동체의 벗들과 강학회를 통해 자신과 공동체를 세우는 공부를 한다. 강학(講學)은 ‘학문을 닦고 연구함’을 의미한다. 선조들은 천주교를 배움의 일환으로 받아들였기에 처음엔 천주학이라고 불렀다. 천주교 교리서를 같이 공부하면서 열띤 토론을 했을 테고, 그 와중에 믿음도 싹터 올라왔을 터다. 강학회를 통해 낯선 그리스도교를 우리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강학은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전례 없는 전통을 가졌다는 평가의 한 증거가 될 법하다.
공동체의 강학회도 큰 맥락에서 선조들의 강학회와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공동체의 다른 교육, 배동교육과 제자교육이 속성입문의 과정이라면, 강학회는 좀 더 정기적이고 장기적으로 입문과정에서 틔운 싹을 성장시키는 역할에 해당한다. 공동체는 강학회를 통해 ‘교육의 일상화’를 모색한다. 공동체 강학회의 배움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와 치열하게 맞닿아 있다.
강학회를 통해 공동체를 만났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십여 년 전 서영남 선생이 민들레국수집을 연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강학회에 오셔서, 작은 것이 왜 아름다운지 잘 일러주셨다. 전 정토회 사무국장 박석동 선생이 강학회에서 해주신 “당신들의 기도 수준이 당신들이 따르는 분의 수준을 결정한다.”라는 말씀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린다. 예수살이공동체의 강학회를 한 예로 들었는데, 우리 주위에는 진정한 배움의 공간이 많다. 홀로 공부하는 것도 좋겠지만 여러 도반과 같이 공부하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지금 세상은 누가 봐도 형편없이 일그러졌고 추악해졌다. 사태가 악화되도록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이 상황이 세상 겨울의 서막일지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 저주 받은 시대를 버티라는 거짓 예언자 같은 멘토가 판을 친다. 이런 멘토가 잠시 동안 진통제 역할을 할지 모르지만 갈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허약해진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배움이 필요하다. 세상이 힘들다고 말랑말랑한 말에 현혹되어 잠시 잊거나 도피하지 말고 일단 세상을 온전히 직시하는 배움이 필요하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배움이 정말로 필요한 것인가? 그걸 어디에 써먹는가?” 파블로 네루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모든 꽃을 꺾어버릴 수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배움을 포기하면 결국 봄조차 빼앗길 것이다. 서서히 좀비가 되어가고 노예의 삶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삶을 지켜내고 잘 살아가기 위해 공부하자. 이왕이면 같이 하자. 잘 찾아보면 세상에는 참된 배움을 이끌어주는 좋은 책과 길 안내자들이 많다. 지금은 배움을 통해 희망을 찾아야 하는 시절이다.
김지환 / 출판사 편집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