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살고자, 배움

[기획-삶의 도움닫기, 배움]

2015-06-25     김은경

대학을 갓 졸업하고 제주도 중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업적 필요성과 재봉에 대한 호기심으로 홈패션 학원을 등록하였다. 서귀포까지 나가서 두 시간 정도 공업용 재봉틀 다루기와 소품 만들기를 배웠다. 손가락이 바늘에 찍히는 고통이 빈번하였지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배웠다. 홈패션 기술을 익히는데 학벌 같은 것이 무슨 의미이랴. 그저 오랜 시간 숙련된 선생님의 기술과 요령을 눈썰미 있게 모방해 가며 열심히 바느질을 하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점차로 제 눈에 들어오고 제 손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설픈 솜씨였지만 노련함이 더해지면서 기계에 대한 호기심도 해결되었고 작품도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만든 소품을 고향으로, 친구에게로 나누었다.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던가, 배워서 남 준다는 것이! 기능은 조금씩 발전해 티셔츠와 바지, 생활한복을 만들기까지 행복한 배움의 연속이었다.

실용적인 기술의 배움만큼 흥미로운 배움의 세계는 책을 통하여 만나는 사람과 세상이다. 배움의 코뮌을 일군 고전 평론가 고미숙은 “책을 통한 배움이란 내가 다른 세계와 접속하는 힘이며 아주 이질적인 우주를 눈앞에 펼쳐주는 것”이라 했다. 우리 신앙 선조들 역시 ‘책’이라는 도구를 통해 ‘서학’이라는 배움에 접속하였다.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양반층에게 제한된 지적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당시 엄격하였던 신분 차이를 넘어 사람답게 살고 싶은 인간적인 갈망과 서양 세계에 대한 지적호기심으로 이질적 우주를 펼친 것이었다. 이 접속은 만인을 반상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형제자매로 삼을 수 있다는 교리에 기초하여 ‘천주교’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 폴류네이케스의 주검을 거두어주는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Marie Spartali Stillman, <안티고네(Antigone)>.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배움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다, 책꽂이에서 한 권의 책을 찾았다.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노베르트 그라이나흐의 <사람답게 살고자>라는 소책이다. 이 책에는 기원전 440년경에 소포클레스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그의 작품 <안티고네> 가운데 읊었던 인간에 대한 찬가가 소개되어있다. 이 찬가에 대하여 왈터 옌스는 “인간이 야누스 신의 앞뒤 얼굴을 가진 점을 완벽하게 해설해 주고 있다.”라며 인간의 이면성에 대하여 언급했다. 저자 역시 인간이 인간을 무참하게 학살한 폴란드의 강제 수용소 이야기,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민간인을 향해 원자폭탄을 투하한 인간의 잔악함, 군사독재 등을 나열한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로마7.19)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인간의 이중성을 재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함을 갈망하면서, 동시에 종교적 제도와 권력의 집착 속에 신을 가두어 놓기도 했다. 저승의 복락을 약속하며 이승의 고통을 잠재우기 바라는 종교를 두고 마르크스는 “인민의 아편”이라 했다. 니체 역시 부조리한 종교를 향하여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배움이란, 앞서 말한 물리적 기술의 숙련된 익힘도 있지만, 지금여기에서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사회구조 속 낯선 세상과 시선 속에 자신을 던져 넣음이다. 그렇게 만나고 느끼게 되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질감을 마주치는 일이다. 그러한 가운데 ‘사람답게 살아감’이 무엇인지 되물어보는 명징한 시선이자 질문이기도 하다. 엠마오로 가는 저 제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예수를 알아보았던 것처럼, 나와 네가 인격적 신뢰를 나누며 나아가야 할 바른 길 찾음의 연속일 것이다. 주변과 현장의 안타까운 처지를 살피는 연민어린 시선 속에서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연대의 실천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끊임없는 모순과 불의의 이면을 재발견하고, 그에 대한 저항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여 자신을 넘어 세상의 한 부분을 책임지는 다른 존재로 나아가는 변모와 변화로의 탈주일 것이다.


김은경
/ 안동교구 모전성당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