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

강우일 주교에게 길을 묻다

2014-12-19     강우일 주교

1. 교회의 존재 이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이어받아 추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구원이란 정신적, 영적인 구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인간 전체에 대한 구원입니다. 구원이 정신적, 영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인 ‘강생의 신비’는 인간과 그의 세상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구원을 전제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계시의 출발점은 이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 높은 곳에 좌정하고 계신 추상적인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에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갖고 다가오시며 개입해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울부짖는 이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고통을 속속들이 아시고, 그들을 그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그곳으로 파견하시는 분’이십니다.(탈출 3, 7-15 참조)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찾아오시어 개입하시고 정의로 구원을 실현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속의 구체적인 인간살이와 무관하고 초월적인 절대자 하느님이란 인간이 자기 이성이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철학적 또는 신화적인 신(神)이지 계시를 통하여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살아계신 하느님이 결코 아닙니다.

▲ 강우일 주교
그리스도인이 믿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과는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고 초연하게 산야에 묻혀서 명상과 기도와 영신적인 수련에만 몰두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면서, 그 시대의 세상이 차별하고 억압하고 외면하였던 보잘것없는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온 몸으로 느끼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 분입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탐욕과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지고 억압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정의로운 세상으로, 압제자의 왕국에서 ‘하느님의 왕국’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며 도전하시다가 반대자들의 음모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내 개인의 마음의 평화,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에 포함된 불의와 고통, 슬픔과 연민, 다툼과 평화를 다 함께 끌어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함께 고민하고, 예수님과 함께 참된 의를 실천하고, 예수님과 함께 연민과 수난의 길을 걷는 고달픈 여정입니다. 물론 그 고달픈 여정을 걸으면서도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에 신뢰하며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심으로써 세상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참 평화를 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사실 거저 얻어진 평화가 아니라 수난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신 다음에야 얻으신 평화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영육으로 안락하거나 편안한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피곤하고 고달픈 삶을 선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의 현실이 과연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야할 올바른 길에 부합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도전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피곤함과 도전을 마다하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생각이나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는 인생 ‘동아리’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수많은 종교 단체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진실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혼자만의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을 향하여 폭넓은 시야와 관심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의 가장 구석진 곳, 잊혀 진 사람들까지 관심과 연민으로 다가가시고 그들을 보살피고 치유하는데 모든 노력과 시간을 쏟으셨던 것처럼 그분의 제자 공동체도 서로 서로 이런 삶을 살기 위하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된 모든 이는 세상을 향하여 세심한 관심과 배려와 연민으로 다가가고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비록 오염되고 타락하고 폭력의 도가니라고 해도 이를 도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한복판에서 씨름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태생적으로 처음부터 세상 속에서 사회적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상봉

2.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나?

교회는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 32-35)

“세월이 흐르고 교회가 더 널리 퍼져 나가면서 사랑의 실천은 성사 집전과 말씀 선포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인 영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과부와 고아, 죄수, 병자들과 온갖 궁핍 속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성사 집전과 복음 선포만큼 교회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성사와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듯이 사랑의 실천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시다> 22항)

복음에 감화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귀족과 노예의 사회적 신분 격차를 넘어서서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복음의 힘으로 여러 세기 동안 수도자들은 땅을 경작했으며, 수사들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병원, 보호 시설 그리고 자선 협회를 세웠으며, 여러 계층의 남녀들은, ‘너희는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3,40)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경건한 원의로 남아 있으면 안 되고 오히려 구체적 생활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궁핍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에 투신했습니다.”(<백주년> 57항) 중세에 탄생한 교육기관, 의료 시설, 복지 시설 등은 모두 교회가 세상에 관심을 갖고 대처해 나간 열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의 과정을 거치면서 19세기의 세계는 전혀 새로운 사태를 맞게 되었습니다. 소비재 생산을 위한 새로운 사회 구조, 사회와 국가와 권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 그리고 노동과 소유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함에 따라 세계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을 직면하면서 반목과 불의와 갈등이 증폭되어갔습니다. 자산을 가지고 새로운 산업을 일으킨 자본가들의 부(富)는 급속도로 축적되었으나, 산업의 저변에서 일하는 무산 계층의 노동자들은 말할 수없는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경제적, 사회적 모순과 잘못된 사회 구조에 대하여 더 이상 간과하거나 침묵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현대 가톨릭교회의 첫 사회교서인 <새로운 사태>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레오 13세 교황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은 점차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인정머리 없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되어 왔습니다. 교회가 수차례 엄중히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고리 대금업은 여전히 성행하고 파렴치한 모리배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형태로 그러한 불의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산과 상업이 소수에 의해 독점 장악되어 극소수의 탐욕스런 부자들이 가난하고도 무수한 노동자 대중들에게 노예의 처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멍에를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새로운 사태> 1항)

이러한 경제 사회적 불의를 치유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재화를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때 사회악을 근절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과 반목을 극대화하였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폭력을 가져오고 있었기에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의 사회적 가르침을 통하여 합리적이고 복음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 중에서 가장 잘못된 견해는 한 사회 계층이 다른 계층과 본성상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은 성격상 상호간에 끝없이 투쟁하기 마련이라고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이성과 참된 진리에 완전히 상반됩니다. ... 교회가 해석하고 수호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게 정의가 당당히 요구하는 의무들에서 출발하여 그들에게 그들 상호간의 의무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서로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강한 힘을 지닙니다.” (<새로운 사태> 13항)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진리 안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교황들은 무려 20여 편의 교황교서를 발표하며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와 관련하여 복음의 진리와 정의에 입각한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를 선포하여 왔습니다. 이 모든 사회교리가 집대성되어 2004년 <간추린 사회교리>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복합적인 사건들에 대한 ‘도덕적 사목적 식별의 도구’로서 제시됩니다. 곧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모든 사람이 더 큰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태도를 가지고 선택을 하게 하는 지침서이며, 그리스도 공동체들은 이 문서의 도움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영원불변한 복음의 말씀에 비추어 이를 해석하며, 성찰원리와 판단기준과 행동지침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글은 <강우일 주교와 함께 걷는 세상>(바오로딸, 2013)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강우일 주교/ 제주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