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주일과 사회교리 주간

사회교리의 역사 -①

2014-12-19     편집부

인권주일이 33회를 맞이했다. 인권주일 설정은 광주항쟁으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구속되고,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해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구속된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내린 중대한 결정이었다. 1982년 10월에 열린 한국 천주교 추계 주교회의는 매년 대림 제2주일을 인권주일로 정하고 인권운동을 교회 차원에서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그해 12월 5일,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첫 번째 인권주일 담화문을 통해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이 담화문은 먼저 국가보안법 남용을 지적했다.

“국가보안법의 적용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유신시대에 긴급조치와 반공법이 정치보복과 탄압의 수단으로 악용된 사례를 지켜보아 왔습니다. 국가보안법의 무차별 적용과 처단으로 국사범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혼동을 가져오게 하고 관제 공산주의자가 생기는 것을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신앙공동체의 활동이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처벌되는 사례를 보고,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교회의는 “인간의 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명령에 의하여 정의와 진실을 외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거나 자신의 일터와 배움터에서 추방당한 모든 사람들의 석방과 복직과 복학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광주항쟁 관련자, 5.17 사태와 관련한 정치범,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수의 양심수들의 석방과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가족들을 위로하자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는 인권과 사회정의에 있어서도 희망의 표적과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가톨릭교회의 이처럼 열화 같은 반발 때문에 이듬해인 1983년 8월 12일 광복절 특사로 최기식 신부를 석방했으며, 김현장과 문부식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이게 바로 인권주일의 역사적 힘이며 실제적 의미다. 인권주일은 단순히 연중행사의 하나로 ‘한번쯤’ 인권의 존엄성을 기억해보자고 마련한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는
인권과 사회정의에 있어서도
희망의 표적과 원천이 되어야 한다.”

▲ 4대강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천주교 사제들과 수도자, 신자들은 "강은 흘러야 한다"고 노래하며 매일미사를 봉헌했다.

사회교리 주간은 이명박 정부가 무리하게 4대강 공사를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의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이 대대적으로 반대하는 가운데, 2011년 추계 주교회의에서 인권주일 다음 한 주일을 ‘사회교리 주간’으로 설정했다. 교황청에서 발간한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으며, 역대 교황들이 지난 120년 동안 줄곧 사회회칙을 발표해 왔지만, 한국 교회에서 그동안 잊혔던 사회교리를 다시 읽어보고 사회정치적 판단과 실천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게 한국교회 주교들의 요청이다.
사회교리는 현대세계를 살아가는 교회와 신자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연대성, 보조성의 원리에 입각해 행동하도록 촉구하고 있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한다. 시민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교회는 정치질서의 복음적 변화에 대한 관심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이라면서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사회교리

1968년 군사정부 시절에 서울대교구장이 된 김수환 추기경은 1970년대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고비 때마다 국민들에게는 ‘교회만은’ 하는 바람이 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교구장 착좌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사목표어를 내세웠다. 이는 교회의 관심이 단순히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모든 고통받고 신음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중남미의 주교들도 1968년 메데인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민중을 불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양심의 의무”라고 천명하였다. 1969년에는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3선개헌을 강행하고, 유신체제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1971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위수령과 휴업령을 내리고,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례조치법’을 통과시키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12월 정기총회를 마치면서, 1972년을 ‘정의평화의 해’로 선포하고, 전국 각 교구와 본당에서 사회정의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주교회의 안에 ‘사회정의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김수환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2월 25일 성탄절 메시지를 통하여 “이 법은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라고 박정희 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지학순 주교와 정의구현사제단

유신정권과 교회의 대립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다.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을 도와주고, <양심선언>을 통해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선언하여 감옥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등장한 것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