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지난 주 속풀이를 읽다보면,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이 마치 40이란 날수를 채우기 위해 마련된 전례처럼 보입니다. 달력을 앞에 두고,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전야까지(일요일만 빼고) 차분히 세 보신 분들은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하실 겁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면, 사순 기간 40일 때문에, 그 기간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이 생겼고, 그 덕에 “기름진 화요일(mardi gras)”이나 “사육제(carnival)” 같은 축제도 생겨났다고 하겠습니다. 극기와 보속을 해야 할 때를 앞두고, 욕구를 발산할 시기가 대조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순 시기에도 일요일은 (부활) 축제의 의미를 가지며, 그러므로 일요일을 이용하여 좀 더 마음 편히 먹고 마실 수 있을 텐데 굳이 그런 의식들이 왜 필요할까 고개를 갸우뚱해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끊어 노는 거랑 몰아서 노는 건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유명한 사육제인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은 재의 수요일을 바로 앞둔 나흘, 즉 토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진행된다고 합니다. 아무 때나 가도 이 축제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분들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축제가 생겨난 전례적 맥락을 알아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재의 수요일을 기준으로, 그 전날까지 인간이 욕망을 (거의 동물 수준까지) 발산하고, 수요일 아침에 머리에 재를 얹고 하느님 앞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사람다운 모습(흙으로 돌아갈 것을 아는 존재의 겸손함)으로 복귀하는 아주 극렬한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40일 동안 단식하셨을까요? 뭐가 그리 중요해서? 그건 정확치 않지만, 40이란 숫자는 성경을 통해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한 숫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단식하신 40일은 모세가 계약을 받으러 시나이 산에서 보낸 밤낮 40일을 떠올리도록 합니다(탈출 24,18). 모세가 처음으로 시나이 산에 올라간 사이 그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합니다. 이 잘못에 대해 백성을 용서하시길 청하며 모세는 하느님 앞에서 40일을 엎드려 기도했습니다(신명 9,25).

또, 엘리야 예언자는 밤낮 40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합니다(1열왕 19,8). 그는 거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익살맞은 예언자 요나는 니네베라는 큰 성읍이 40일 후에 멸망할 것이라 외쳤고(요나 3,4), 이에 니네베 사람들은 머리에 재를 얹고 단식에 돌입하여 재앙을 면합니다. 더 먼 이야기로서, 노아의 홍수는 40일 밤낮으로 비가 쏟아진 결과였습니다(창세 7,12). 어마어마한 물청소가 이뤄진 것이죠. 이처럼, 40일은 하느님과 만나는 준비기간이나 회개, 정화의 기간을 보여줍니다.

한편, 40년이라는 훨씬 긴 기간도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등장합니다. 우선,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사람들이 광야에서 헤맨 시간이 40년입니다(민수 14,33). 히브리인들을 이끌었던 영도자 모세는 40년을 기준으로 생의 중대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즉, 그가 태어나 이집트를 떠나기 전까지 40년, 이집트를 도망쳐 나와서 미디안이라는 곳에서 가정을 이뤄 지낸 40년, 그리고 이집트로 돌아가 히브리 사람들을 탈출시켜서 광야를 헤맨 40년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사도 7,23-36). 모세는 120세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되는 데, 40년마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마흔 해는 한 집단으로서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이집트의 노예근성을 버리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 벌인 사투의 기간인 동시에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반면에 개인으로서 모세에게는 자신에게 부여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시간이었고요. 저도 백스무 살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마흔까지는 예수회원이 되어 사제로 소명을 받는 기간이었고, 여든까지는 사제이자 수도자로 청소년사목에 투신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자, 여러분에게 40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잠시 일을 멈추고 의미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