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 김선익]

내가 아주 어릴 때 마을 뒷산 솔밭에서 할머니와 놀고 있었다. 아주 뜨거운 여름날이었는데 그 산골 동네에도 아이스케키 장사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치마 안쪽 바지 작은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주시며 아이스케키를 사먹으라고 하셨다. 보리 한 자루를 들고 가서 능금 한 자루와 바꿔오고 아주 망가져서 쓸 수 없는 양은 냄비로 엿을 바꿔 먹기도 했던 시절, 할머니는 동전 하나를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고 계시다가 손자를 위해 내놓으신 것이다. 지금 천 원이면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을 수 있으니 50년 전에 할머니께서 주신 동전 하나는 지금의 천 원 정도 가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50년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이젠 어머니께서 팔순을 앞둔 할머니가 되셨다. 어머니는 당신 스스로 택시를 타신 적이 없다. 족히 30여 분이나 걸리는 지하철역까지 겨울에도 걸어 다니신다. 지금도 어머니는 드시고 싶은 것이 있어도 꾹꾹 참고 사신다. 자식들 키우시느라고 절약이 몸에 밴 어머니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버는 자랑 하지 말고, 쓰는 자랑해야 된다”고 하신다. 무슨 돈이든 어머니 수중에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른다. 그 덕에 우리 자식들이 먹고 자랐으리라.

▲ 예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셨다. 그런데 교회는 부자의 주머니가 더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한상봉 기자

어느 날 어머니의 주일 헌금 액수가 무척 궁금해졌다. “어머니, 주일헌금 얼마씩 하세요?” 하고 여쭈었더니 “나는 오천 원씩 하고, 아버지는 이천 원씩 하신다.” 그러면서 헌금을 많이 못하므로 교회 안에서 김장이나 청소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봉사를 많이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헌금 액수에 조금 놀랐다. 어머니에게 오천 원은 무척 큰돈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 본당은 강북 서민 아파트단지 한가운데 있다. 젊은이들은 자꾸 줄어들고 노인 신자 비율이 높아져 가는 것은 우리 본당도 예외가 아니어서 미사 시간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신자가 고령화되는 것에 비례해서 헌금 액수도 줄어든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마땅한 소득이 없는 노인 분들이 많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본당은 몇 년 전 교육관을 짓는데 40억 원 이상 들였다. 많은 신자들이 동참해서 건축헌금을 모았고 교육관이 완공된 후 몇 년에 걸쳐서 건축비를 갚아나갔다. 워낙 건축비가 많이 들었으므로 건축헌금 이외에 쌀이나 농산물도 팔고 주일에 음식도 만들어 팔아서 남은 이익금을 보탰다. 교회의 건축에 너무 많은 돈을 쓴다는 생각에 나는 항상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많은 신자들이 힘을 모아서 건축비를 갚아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한 내가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교육관 건축비를 다 갚아 나갈 즈음 이번에는 본당 일부를 증축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교회의 외형을 그럴싸하게 고치는데 또 10억 원 가까이 들게 되었다. 매주 주보 뒷면에는 건축헌금을 신립한 신자의 이름과 돈 액수가 인쇄되어 나왔다. 누구는 얼마를 냈고 누구는 그것밖에 내지 않았냐는 수군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주보에 이름과 금액이 인쇄되어 나오니 체면상 적게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단체장들은 비슷한 금액을 내는 듯 했다. 오천만 원을 낸 신자도 있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고 보니 몇 만 원을 냈다가는 이름이 주보에 나오는 것이 오히려 겸연쩍게 되었다. 이름이 주보에 나오는 것이 싫다고 하면서 외부 다른 단체에 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건축비로 수억, 수십억 원씩 쓰면서 정작 지역사회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쓸 돈이 부족해서 또 2차 헌금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이다. 신자가 고령화되면서 헌금이 줄어든다면 지출을 줄여야 한다. 불요불급한 건축이 아니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장기계획으로 추진해야 한다.

‘천주교’는 ‘천 원짜리’ 헌금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특히 미사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음이 너무도 불편하다. 어떤 이에게 천 원짜리 몇 장은 지갑만 두툼하게 만드는 돈일 수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목숨과 같은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할머니 중에는 용돈을 조금씩 아껴서 건축헌금을 내고 싶은 분이 많을 것이다. 정성으로 벽돌 한 장 금액을 바치고 싶으나 수십, 수백만 원씩 낸 사람들의 이름이 죽 나와 있는 주보에 몇 천원을 냈다고 이름을 올릴 용기가 안 나서 망설이고 계신 할머니도 많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보에 나온 사람 중에 몇 만 원 정도의 금액을 낸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도 지하철역까지 걸어 다니시면서 아껴둔 천 원짜리 몇 장을 봉헌금으로 내시는 나의 어머니는 지금 우리가 교회 안에서 만나는 모든 할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분들의 헌금을 소중하게 받아들이려면 교회는 더 낮아지고 작아져야 한다. 오천 원을 봉투에 넣으시는 어머니의 거칠고 주름진 손을 보면서 50여 년 전 여름날 솔밭에서 아이스케키 사먹으라고 내 작은 손에 동전을 쥐어주시던 할머니의 가늘고 주름진 손을 떠올려 본다.
 

김선익 (필명, 서울대교구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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