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11]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놀이이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해서 논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예수가 태어난 유대아의 종교 · 문화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인물의 언어와 실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인물이 살았던 문화적 전통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부를 수 있는 공간을 열어 준 ‘계약’

▲ ‘증언판을 받는 모세’, 라파엘로의 작품(1518년)
유대교의 발생은 기원전 1250년경 이집트 탈출이라는 일대 역사를 일으키는 모세와 하느님이 계약을 맺었다는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노아와의 계약(창세 9,1,9-17)과 아브라함과의 계약(창세 15,18-19)이 먼저 있었던 것으로 성서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모세와의 계약(탈출 3,7-10; 24,1-8)이 있은 후, 그 사실에 준해서 과거의 전설들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모세와 하느님이 맺었다는 계약의 핵심은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인간이 자각하고, 그 사실에 입각하여 살겠다는 약속이다. 탈출기의 “나 너와 함께 있다”(3,12)는 말씀과 하느님이 알려 주었다는 하느님의 이름 “야훼”도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충실함이나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사는 사람의 사회적 · 윤리적 변화를 그 시대 언어로 기록한 것이다.

이 계약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원리가 아니다. 이 세상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에 대해 인식하고, 그분을 부르게 된 것이 아니다. 계약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부를 수 있게 만들었다. 계약을 근거로 하느님을 부른다는 말은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셔서 히브리 사람들과 교섭에 들어가셨다는 말이다. 인간이 세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하느님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 하지만〔제일 원인(原因) 혹은 절대적 관념(觀念) 등〕, 계약은 그 사실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계약은 하느님을 부르도록 하나의 공간을 열어 주었다. 계약이 말하는 것은 이 계약의 관계가 생기기 전에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객관적으로 확인해보고 아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도 객관적 관찰의 과정을 거쳐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친구가 되는 것은 그런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친구가 알려주는 것을 들으며 함께 사는 데에 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5,15). 친구는 친구가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함께 사는 것이다.

계약, 그 안에 들어 있는 권리를 실천하여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는 실천적 행업

이스라엘은 자기의 기원과 특수성에 대해 기록할 때, 하느님과의 계약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활력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문화 · 사회 · 정치 · 윤리적 구조가 그 계약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법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이런 의식을 배경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부른다.

계약은 사회-윤리적 행위, 곧 놀이를 수반하는 하나의 관계를 표현하고, 그 관계가 성공하면, 약속된 미래가 온다는 약속이다. 계약은 세계관도 아니고 추리의 원리도 아니다. 계약은 히브리 백성이 그 계약 안에 들어 있는 권리를 실천하여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는 실천적 행업이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놀이 안에 살아계신다. 따라서 얼굴 없는 하느님의 이름들은 묘사적이거나 개념적이 아니고, 계약을 바탕으로 한 놀이를 발생시키는 역사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다. 바위(창세 49,24), 반석(시편 18,3), 목자(시편 23,1) 등.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 달라는 모세에게 하느님은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탈출 33,19)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분이고, 그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놀이를 하는 사람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람이며, 그 사람들은 하느님의 “뒷모습”(33,23)이기도 하다.

인간의 놀이를 발생시키는 하느님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곧 그들과도 함께 계셨던 하느님이다. 그분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로운 삶으로 인도한 하느님이며, 모세의 하느님이고, 신약에 오면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일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하느님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체험은 계약의 실천이라는 놀이에 그 근거가 있다. 선택, 권리 부여, 약속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일방성은 그 백성의 체험에, 하느님의 모순된 두 면을 보여 준다. 두려움의 대상인 하느님과 충실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언어 안에는 이 두 면을 종합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은 먼저 두려운 분이다. 계약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만, 하느님과는 협상이 없다. 하느님은 계약 조문을 주고, 백성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말씀하신 대로 따를 것을 약속한다(탈출 24,1-11). 하느님은 용모가 없다. 그분의 소리는 대변자의 것이다. 계약으로 주어진 공생(共生)이라는 관계 안에서 그분의 행동은 예기치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예기치 못하는 행동을 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은 두려운 대상으로 인식되고, 그 두려움이 표출되어 성서 안에 그 흔적으로 남긴 텍스트들이 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백성을 구할 사명을 준 직후, 그를 공격하고 그를 죽이려 하신다(탈출 4,24-26). 그런 이상한 자세를 다른 데서도 볼 수 있다. 이사악의 제사 요구(창세 22), 야곱과의 싸움(창세 32,25-33), 파라오의 고집(탈출 10,20), 엘리의 아들들을 죽게 하는 일(1사무 2,25) 등이다. 하느님에 대한 그런 두려운 체험의 흔적들은 예언서들 안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사자처럼 되고 표범처럼 길에서 숨어 기다리리라. 나는 새끼 잃은 곰처럼 그들을 덮쳐 그들의 가슴을 찢어발기리라. 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그들을 뜯어 먹고 들짐승이 그들을 찢어 먹게 하리라. (호세 13,7-8)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하며 이렇게 말하여라. ‘칼이다! 잘 갈아 날이 선 칼이다. 마구 죽이라고 간 칼이요 번개 치듯 내리치라고 날을 세운 칼이다. 날을 세워 손에 쥐라고 그것을 내어 놓았다. 그것은 살해자의 손에 넘기려고 잘 간 칼이요 날을 세운 칼이다. 사람의 아들아, 울부짖어라, 슬피 울어라. 그 칼이 내 백성을 겨누고 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제후를 겨누고 있다. 그들은 내 백성과 함께 칼에 넘겨지고 말았다. 그러니 가슴을 쳐라. 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손바닥을 쳐라. 그 칼은 두 번 세 번 휘둘리리라. 그것은 살생의 칼, 큰 살생의 칼, 그들 둘레를 빙빙 도는 칼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떨리고 많은 이가 비틀거리리라. 나는 그들의 성문마다 살육의 칼을 세웠다. 아, 그것은 번개 치듯 내리치라고 만든 칼, 마구 죽이라고 날을 세운 칼이다. 칼아, 뒤로 돌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돌아라. 네 날이 향하는 곳 어디로든 돌아라. 나도 손바닥을 치며 내 화를 가라앉히리라. 나 주님이 말하였다.’” (에제 21,14-22)

이런 체험은 종교 체험의 원시 형태라고 말할 수도 있고, 반성의 부족에서 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체험이 어떤 역설적(逆說的)인 면을 가졌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역설적 체험들이 언어로 나타난 것이 위의 텍스트들이다.

하느님의 또 다른 얼굴, 백성에 대한 자비와 사랑

충실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다른 한 면이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충실하시고 자비롭고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체험이다. 예언자들은 이 면을 강하게 표현한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호세 11,8)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수치스러워하지 마라. 네가 창피를 당하지 않으리라. 네 젊은 시절의 부끄러움을 잊고 네 과부 시절의 치욕을 네가 다시는 회상하지 않으리라.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너의 구원자 그분께서는 온 땅의 하느님이라 불리신다. 정녕 주님께서는 너를 소박맞아 마음 아파하는 아내인 양,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 네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사 54,4-8)

하느님은 계약에 충실하려 하지만, 백성은 이웃을 착취하여 계약에 들어 있는 공생의 규정을 계속 어긴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주님께서 야곱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셨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때문에 땅이 뒤흔들리고 온 주민이 통곡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나일 강처럼 불어 오르고 이집트의 나일 강처럼 부풀었다가 잦아들지 않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아모 8,4-9)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거룩하시다”. 그러나 백성은 죄인으로 행동한다. 계약 체결자들 사이의 행실의 차이를 예언자들은 계속 상기시킨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스라엘 민족을 그들이 흩어져 사는 민족들에게서 모아 올 때, 나는 겨레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 안에 내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집안은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집을 짓고 포도밭을 가꾸며 그 땅에서 평안히 살 것이다. 사방에서 그들을 비웃는 모든 민족들에게 내가 벌을 내리면, 그들은 평안히 살 것이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 그들의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제 28,25-26)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이름 지어 부르는 것은 세상의 근본에 대해 반성하고, 철학적으로 추리한 결과가 아니다. 얼굴 없는 계약 상대와 공생한다는 역설적인 체험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에 대해 이중적 해석을 하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추리하거나 종합하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하느님의 어떤 모상(模像)도 만들지 말라는 금명이 있고, 하느님은 얼굴 없는 상대이며 그분의 말씀도 인간이 대변할 뿐, 그분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분에 대한 이스라엘의 체험에는 망설임이 있다. 예언자들이 사라지고 율법이 가장 중요한 말씀이 되었을 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의 체험은 가중되었다. 과거의 경험에서 볼 때, 그분의 행동은 예기할 수 없는 것이고, 그분의 침묵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들을 두렵게 하였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보이는 사랑이 조건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느님과의 거리를 폐기하지는 못한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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