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 한수진]

“제 이름은 익명으로 해주세요.” 교회의 현실을 다루는 기사를 준비하면서 만나는 취재원들은 익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수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규칙에 따라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평신도와 사제들은 스스로 이름을 지우고 무리 속에 자신을 감춘다. 본당 신자나 교회 윗사람에게 자신의 말과 생각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신입 기자였을 때, 처음으로 “A교구 B사제”라는 명칭을 기사에 넣으면서 ‘뭐 좀 하는 것 같다’고 느꼈던 풋풋한 순간이 떠오른다. ‘취재원이 익명 보장을 조건으로 기자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두 사람은 거대 권력의 음모와 협박에 맞선다’는 흔한 미스터리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에 30초 정도 빠졌었다.

상상 속에서 권력의 핵심을 뒤흔들 엄청난 진실의 폭로가 현실에선 그저 모두가 알고 있는, 혹은 짐작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취재원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한 것뿐이라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문제는, 교회에 적(籍)을 두고 있는 취재원들은 교회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조차 조심하고 또 조심하더란 얘기다.

이전에 인터뷰를 했던 한 신부는 인터뷰가 끝나자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익명으로 내달라고 부탁했다. 기사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신부의 직함과 이름이 필요했지만, 그가 익명을 요구한 이유를 들으니 더 이상 그를 곤란하게 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몇 개월 전 외부에서 개최한 토론회에 발제자로 나간 뒤 교회 어른에게 불려가 한 소리를 들었다는 거였다. 내가 알기로는 발제 내용이 ‘천주교는 이렇게 잘 하고 있다’였는데, 어느 부분이 어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기사에 언급된 부서의 담당자 신부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면서, 관련 내용을 인터뷰한 취재원의 신뢰성을 의심했다. 진정성을 갖고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신부는 교구 프로그램 참가자 명단에서 기사에 나온 취재원의 이름을 검색하고, 취재원의 본당에도 전화를 해봤다고 했다.

안 그래도 해당 취재원과 인터뷰를 하면서 실명 공개 여부를 확인했었다. 혹시라도 기사가 나간 뒤에 본당이나 교구에서 작든 크든 취재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취재원은 쿨하게 실명을 밝히라고 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동료 기자들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들었던 터라, 취재원보다 기자가 더 새가슴이 된 거였다.

다른 신문에서 정부 부처나 기업 직원의 인터뷰를 “~ 관계자에 따르면” 혹은 “사정에 밝은 내부 인사에 따르면”이라고 익명 처리한 기사를 볼 때마다, 그런 조직과 교회가 과연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요즘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미국의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의 소식을 들으면서도 그렇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도청과 해킹을 통해 일반 시민부터 동맹국 대사관과 유엔 사무실까지 전 지구적인 감시활동을 벌였다고 폭로한 스노든은 미국 정부의 체포를 피해 여러 국가에 망명 신청을 하고 십여 일째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 환승 구역에 머물고 있다. 미국과 스노든의 상황이 수천억을 들여 만든 할리우드 영화처럼 스케일이 커서 멀게 느껴지긴 하지만, 구성원들의 입에 예민하게 반응해온 교회를 떠올려보면 교회가 자신의 스노든을 마주했을 때에도 미국 정부와 비슷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걱정된다.

건강한 사람은 병에 걸려도 빨리 낫는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보다 자기치유능력이 뛰어난 덕분이다. 작은 병에 휘둘리지 않고 회복도 빠르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조직은 아픔을 느끼면 스스로 치유하고 변화하지만, 그렇지 못한 조직은 어딘가 삐거덕거려도 상처가 곪을 때까지 모른 체하고 감추기 바쁘다. 이렇게 자기치유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치료의 노력이 구조적 한계에 부딪혔을 때는 공론화라는 약을 써야 한다. 자신의 병을 주변에 알려 치료법을 구하고 병원에 찾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근시안적으로는 조직의 실상이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고 화가 나기도 할 거다. 괘씸한 마음에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찾아내고 싶고, 다시는 말하지 못하게 타일러야겠다는 마음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연못의 물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갈대 같은 사람들이다. 갈대가 마음에 들지 않고 거슬린다고 뽑아버렸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 물이 썩고 연못에 놀던 물고기들도 사라지게 될 거다.
 

한수진 (비비안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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