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7

“복되어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 (마태 5,9)

복된 선언 목록에서 그 대상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보아 최고조에 이른 선언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성서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타난다. 같은 뜻을 가진 동사는 잠언 10,10과 콜로새서 1,20에 보인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평화롭게 하는 사람을 동시에 나타내는 단어다. 공통년(서기) 70년 유다전쟁 후 ‘평화’(샬롬)는 유다인들에게 매일 나누는 인사가 되었다. 평화롭게 하는 사람에게 의로움의 열매로서 평화가 약속된다(야고 3,18).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왕, 의로운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된 ‘하느님의 아들’은 마태오와 신명기에서 계약신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신명 14,1; 32,19). 하느님은 인간에게 평화를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인간은 지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하느님께 약속하였다는 뜻이다.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메시아의 방식이기도 하다(이사 9,6). 평화를 알리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사 52,7)은 메시아를 가리키며 예수 시대에도 같은 뜻으로 여겨졌다. 유다교 문학에서 메시아는 평화를 가져오는 분이다. 솔로몬 왕은 평화의 중재자로 칭송되었다(1역대 22,9).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 예수는 평화의 왕이라 불렸다(마태 21,1). 로마 황제도 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Eirenopoios).

▲ ‘산상 설교’(부분), 프라 안젤리코, 1437~1445년

오늘의 구절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Eirenopoios)은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과 연결되는 것이다(마태 5,44-48). 거기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약속된다(마태 5,45).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다. 마태오는 예수 공동체 내부뿐 아니라 공동체 너머를 의식한 것 같다. 마태오가 전쟁 문제까지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평화는 성서적 이해에서 구원의 총체이고, 그래서 오직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평화를 제자들은 예수의 부탁에 의해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의 구절에 나타나는 평화는 인간이 애써야 할 평화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룩하시는 평화와 똑같지는 않다.

평화를 이루라는 말은 지혜문학과 유다교 문헌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가족과 공동체와 이웃 사이에서 평화를 이루라는 말씀이다. 또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평화와 연결되었다. 평화는 인간에게 평화를 선사하시고 평화의 길로 이끄는 하느님의 방식이다. 인간 사이에서 평화를 위해 애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방식에 참여하는 셈이다.

마태오가 전쟁 문제까지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평화를 군사적 균형으로 보는 전략가의 말이겠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평화는 전쟁 없음뿐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정의 없이 평화는 없다는 것이다. 로마 황제가 주는 평화와 예수가 주는 평화는 그래서 같지 않다. 오늘 구절뿐 아니라 복된 선언 모두가 허황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어찌 성서 말씀은 그렇지 않겠는가. 힘, 돈, 명예가 평화, 정의, 사랑보다 더 매력적으로 통용되는 우리 시대니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복된 선언의 실천 가능성 여부를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의 복된 선언에 대해 비웃는 움직임은 정작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미사나 예배 등 교회 전례(성례전) 성서에서 복된 선언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복된 선언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추어 복된 선언에 대한 신학 서적은 또한 너무나 빈약하다.

그리스도교의 보잘 것 없는 정신 수준을 보여주는 한 예라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하다. 마태오와 루카에 있어서 복된 선언은 주의 기도를 위한 서곡이다. 그러니 복된 선언을 모르면 주의 기도를 모르는 셈이다. 복된 선언도 모르면서 우리는 매일 주의 기도를 바친다.

평화를 말하는 오늘의 구절은 십자가와 부활의 뜻을 깨달은 사람이 현실에서 취하는 삶의 자세다. 십자가와 부활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예수의 복된 선언은 허무맹랑한 소리겠다. 십자가와 부활의 뜻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라야 잘못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맞선다. 올바른 저항정신은 십자가와 부활의 뜻을 깨달은 사람에게서 온다. 희생하는 저항이라야 참된 저항이다. 그러한 참된 희생정신을 예수는 보여주었다. 그런 희생이라야 참된 평화를 가져오는 행동이다.

희생하지 않는 정치, 희생 없는 종교가 판치는 우리 사회는 대체 무엇인가. 한국 사회의 2대 모순은 희생 없는 정치, 희생 없는 종교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종교인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덧 특권층이 되었다. 종교를 이용하는 정치, 종교인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신자, 철없는 종교인 탓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예수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시골 성당과 교회의 목사나 신부도 흔히 누리는 그 안락함과 호사를 예수, 베드로, 바울이 단 하루라도 맛본 적 있나.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소브리노(Sobrino)로부터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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