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주민 등 수백 명 “탈핵”, “송전탑 반대”

▲ 밀양 주민 한옥순 씨와 김영자 씨. 그들은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함께해 달라”고 외쳤다. ⓒ문양효숙 기자

“싸움하기 전에는 감자 나면 감자 캐서 이웃이랑 나눠먹고, 고구마 캐면 겨울에 모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그랬습니더.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어떻습니꺼. 머릿속이 송전탑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더. 고추를 따면서도 마음속으로 구호를 외칩니더. 전에는 우리가 고립돼서 싸웠지만 이치우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로는 이렇게 전국에서 저희를 지켜봐주시는 분들도 많으니까예. 저희들이 못 싸울 이유가 없겠지예? 앞으로 열심히 한번 싸워 보입시더! 반드시 이길 겁니더. 화이팅!”

빗방울이 흩날리던 서울광장에 경북 밀양시 상동면 주민 김영자 씨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7일 오후 5시부터 열린 탈핵 문화제 ‘우리가 밀양이다’에는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밀양 주민 400여 명과 청도 주민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민들이 함께했다. 이번 문화제는 40일간의 전문가협의체 활동 기간이 끝남에 따라 탈핵과 송전탑 건설 반대의 목소리를 한자리에 모으기 위해 마련됐다.

8일 자정으로 활동을 마무리하는 전문가협의체는 기간 내 활동한 최종보고서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산업통산자원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9일 통상 · 에너지소위원회를 열어 대안을 논의하고, 11일 전체 위원들이 전문가협의체와 한전 · 주민 측 의견을 듣는 간담회를 열 예정이다.

▲ 김준한 신부가 전문가협의체 활동을 보고하고 있다. 그는 한전 측 전문가들의 무성의한 태도를 비판하며 “초등학교 반장 선거보다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문양효숙 기자

그러나 전문가협의체는 5일 소집된 마지막 회의에서 보고서를 채택하지 못했다. 5일 회의를 참관한 밀양765㎸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공동대표 김준한 신부는 “초등학교 반장 선거보다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며 분노했다.

“오후 2시부터 오후 7시까지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서 논쟁한 자리였다. 하지만 한전 측 전문가들은 아무런 연구를 하지 않은 채, 예전 한전 측 자료를 그대로 베껴왔다. 이를 추궁했을 때 그들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40일간 놀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전문가 입장에서 자기 의견이 없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들에게서는 ‘한전을 믿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 신부는 “주민들이 8년간 목숨 걸고 싸워 어렵게 마련된 자리에 결국 ‘믿어 달라’는 한 마디로 끝난다는 게 어이없었다”며 절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 신부는 “우리가 밀양에서 싸움에 임하는 어르신들의 기구한 삶의 현실, 그분들이 지키고자 하는 생명의 가치를 믿어 달라 했을 때 한전 측은 늘 기술적인 문제를 거론했다. 그런데 이제 기술적인 이야기를 검토하자고 하니 한전을 ‘믿어 달라’고만 말한다”며 한전 측의 무성의한 태도를 비판했다.

이어 김 신부는 “일명 비전문가의 밀양 보고서”라며 그들에게 밀양 어르신들의 투쟁 현장을 찍은 장영식 작가의 사진과 ‘나눔문화’가 제작한 소책자를 그들에게 나눠주었다고 전하며, “전문가들의 카르텔이 너무나 무섭다. 그들은 보지 않고도 언제든 사람을 죽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 400여 명의 밀양 주민들이 집회에 참가해 송전탑 건설 반대를 외쳤다. ⓒ문양효숙 기자

한편, 전문가협의체 활동이 파행으로 치닫자 백수현 위원장(동국대 교수)은 지난 6일 국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위원들에게 ‘이메일 투표’를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책위는 백 위원장이 “협의체 활동 종료 시한을 앞두고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 낼 보고서를 만들자”며 A4용지 한 장 분량의 이메일 표결을 밀어붙였다고 전했다. 대책위 측은 “8년을 목숨 걸고 싸워 얻어낸 협의체인데 결국 OX로 답하는 한 장 종이로 결론지으려 한다”며 분노를 드러냈다.

김 신부는 “밀양이 무너지면 다른 지방도 하나둘 무너질 테고 결국 서울도 고립될 것”이라며 “이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갈 것이다. 부디 함께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윤여림 어르신이 어느 날 ‘한전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다. 박사도 수백 명이다. 그들은 바둑을 두면 천 수, 만 수를 보며 둔다. 이미 벌어질 일들을 다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오로지 한 수 밖에 없다. 막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게 어르신들의 자세다. 이 넓은 서울 곳곳에 이런 밀양이 기운이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있다. 밀양을 기억해 달라. 국회의원실에 여러분의 의견을 전달해 달라. 큰 힘이 될 것이다.”

아들과 함께 문화제에 참석한 대전교구 이경미 씨(목동성당)는 “밀양이 제대로 싸움을 해내야 핵발전소 없는 사회로 가는 주춧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여기서 어떻게 어르신들이 더 기운을 내실까 싶어 기운내시라는 응원조차 죄스럽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 씨의 아들 충현 군은 송전탑 건설에 대해 “도시 사람들 편하게 하려고 밀양에 송전탑을 세워 결국 밀양 사람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며 “어르신들을 직접 뵈니 마음이 찡하고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문화제 내내 뒷자리에서 자리를 지키던 밀양 주민 백영민 씨는 “어차피 예상했던 결과”라며 담담한 목소리로 “목숨 걸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들 눈, 귀, 입 다 막고 공사를 강행하겠다는 것 밖에 없다. 우리는 아무 관계없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끝까지 갈 것이다.”

이날 문화제에는 가수 시와, 지현, 밀양 주민 합창단, 성미산 마을 공동체 합창단이 무대에 올랐고, 송경동 · 심보선 · 진은영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 ‘민중’을 낭송했다. 에너지정의공동행동, 녹색당, 성미산 공동체, 공동육아, YWCA, 그린캔버스, 나눔문화 등의 단체도 함께해 탈핵을 향한 목소리를 높였다.

▲ (왼쪽부터) 심보선 · 진은영 · 송경동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민중’을 낭송했다. ⓒ문양효숙 기자

▲ 탈핵 문화제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송전탑은 싫어요’라는 메시지를 적어놓았다. ⓒ문양효숙 기자

▲ 밀양과 청도뿐 아니라 전국에서 모인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탈핵’과 ‘송전탑 반대’를 외쳤다. ⓒ문양효숙 기자

▲ 그린캔버스 윤호섭 작가가 참자가들의 옷에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탈핵희망문화제 ‘우리가 밀양이다’ 선언문
 
지난 5월 29일, 밀양송전탑 전문가협의체가 구성되었습니다. 주민추천 3인, 한전추천 3인, 여당, 야당 1인씩에 위원장까지 총 9명이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8년을 싸워 얻어낸 40일이었습니다. 그 40일도 그냥 얻은 것이 아닙니다. 밀양 어르신 20여명이 뙤약볕 아래 쓰러지고 다치면서 얻어낸 금쪽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7월 2일, 한전에서 추천한 전문가들이 ‘한전자료’를 그대로 복사해 보고서 초안을 제출했습니다. 전문가로서의 최소한의 상식과 양심을 져버린 짓입니다. 애초에 ‘한전’편을 들기로 했을 뿐, ‘협의’하고 ‘대안’을 모색할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밀양주민들에게 협의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익을 위해 한전에 협조하는 전문가들을 보면서 시민들은 ‘분노’를 넘어 ‘허탈’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사회의 불의와 억울함을 성토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희망과 연대를 노래합니다. 지난 8년 동안 밀양주민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불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강권해서도 안 되고, 내 삶이 편하자고 다른 사람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미래 세대를 위해 지킬 것은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민들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전기를 생산하고 소비한다는 것’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전기에도 핵전기, 석탄전기, 가스전기, 태양전기, 바람전기가 있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원한다면 핵전기는 써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편하게 전기를 쓰기까지 그 전기가 산 넘고, 강을 넘고, 마을을 넘어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765kV 송전탑을 따라 얼나마 큰 고통과 눈물이 흐르는지를 알고 나니 도시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이 땅의 폭력적인 전기 생산체제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정부와 한전에 요구합니다.
진정성을 갖고 밀양문제를 함께 풀어야 합니다. 이미 신뢰를 상실한 전문가협의체입니다. 정부는 더 이상 한전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반영한 보고서 채택 노력을 중단해야 한다. 나아가 송전선의 기술적 대안만을 논의하는 협의체가 아니라 송전탑의 영향, 과정의 공정성, 대안을 폭넓게 논의하는 사회적 공론화 작업을 진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둘째, 대통령과 산업부에 요구합니다.

원전을 중심으로 한 대량생산 대량송전 방식의 에너지 체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현재 수립과정 중인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의 방향을 수요관리와 지역형 분산형 에너지 체제로 전환해 주십시오. 지역의 희생을 전제로 한 대형 원전 건설계획은 모두 백지화 되어야 합니다. 수명 만료된 원전은 폐쇄해야 합니다. 에너지 수요관리를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재생가능에너지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셋째, 전기요금에 제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산업계를 중심으로 한 원가 이하의 전기요금은 우리사회를 ‘전기 소비 중독 사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지역별차등요금제를 비롯해 전기요금에 대한 제값을 지불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도시 소비자들도 전기를 소중히 잘 사용하고, 에너지를 생산하는 농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직접 생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주십시오. 시민들도 함께 하겠습니다.
 
우리는 밀양만이 아니라 도시의 삶을 떠받치기 위해 전기와 자원을 생산해 보내주는 모든 지역에 감사를 표하며,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약속합니다. 우리는 한반도의 땅과 공기를 공유하는 한 동네 사람입니다. 밀양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입니다. 이제 우리는 방관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밀양의 평화를, 생명을, 농사를 염원하는 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돈과 이득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오늘을 축하하기 위해 노래하고, 춤추며, 시를 낭송하고,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꽃을 피울 것입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는 우리를 더욱 더 단단하게 이어줄 겁입니다. 우리는 더 자주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2013년 7월 7일
탈핵희망문화제 ‘우리가 밀양이다’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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