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6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마태 5,8)

‘깨끗한 마음’은 공동성서(구약성서) 시편의 영성에서 비롯된 유다교적 어법이다(시편 73,1). ‘마음’은 유다교에서 인간 의지, 생각, 느낌의 중심을 가리킨다. 고전적인 예로 창세기 20장 1절에 등장하는 아비멜렉 왕이 거론된다. 시편 24장은 깨끗한 마음이 예루살렘 성전의 입장 조건이라 말한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전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시편 24,3-4)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남을 모함하지 않는 사람, 이웃을 해치지 않고……”(시편 15,2-3).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태도이다.

마태오가 제의적 행위와 대립되는 것으로 자비를 이해한 것처럼(마태 9,13; 12,7) 유다교에서도 깨끗한 마음을 외적 · 제의적 행위와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제의적 · 의전적 행위에 대립하여 마음의 할례를 요구한다(신명 10,16; 예레 4,4).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종교행위의 위험성을 유다교는 잘 알고 있고 계속 경고하고 있다.

‘하느님을 보다’는 하느님이 사는 성전에 들어서는 것과 같은 뜻이다(시편 42,3; 이사 1,12). 인간의 궁극적 축복으로서 ‘하느님을 보다’는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공통의 희망이었다(1코린 13,12; 1요한 3,2; 묵시 22,4).

▲ ‘산상 설교’(부분), 프라 안젤리코, 1437~1445년

오늘의 구절은 다른 복된 선언보다 고대 그리스 어법에 훨씬 가까운 덕분에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에서 집중적인 해석 대상이 되었다. 고대에는 깨끗한 마음에 대한 은둔적 · 초월적 해석이 유행하였다. ‘하느님을 보다’는 ‘깨끗한 마음’보다도 더 연구 대상이었다. 영원한 삶은 하느님을 뵙는 데 있다(Schleiermacher)는 표현은 모든 시대에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존재의 근본적 의미는 신을 보는 데서 실현된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뿌리를 둔 덕분이다.

‘깨끗한 마음’과 ‘하느님을 뵙다’는 표현이 현실을 외면하거나 종교적으로 특출한 사람들의 개인적 영성으로 오해되면 안 되겠다. 그런 빗나간 사례가 역사에 무수히 많았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삶을 통해 미래에 하느님을 보는 희망을 보아야 하겠다.

그리스도교는 현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현실을 외면하는 영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느님을 뵈러 자꾸 하늘을 바라보지만, 정작 하느님은 땅위의 인간과 현실을 염려하신다. 가난한 사람, 역사의 희생자에서 고통 받는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도 못 알아보는 처지에 어디 감히 하느님을 뵈러 덤빌까.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남을 알려 애쓸까.

‘복된 선언’에 나타나는 다음 성서 구절에서 어느 것이 예수와 그리스도교를 더 잘 나타낼까.

1.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마태 5,8).
2. “복되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루카 6,21).

둘 다 예수 메시지의 핵심에 속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 메시지의 핵심은 1번보다는 좀 더 2번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2번을 더 강조하셨지만 그리스도교 역사는 1번을 더 강조해왔다. 예수는 마음 공부보다 역사비판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가 마음 공부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 문화권 지역으로 주로 전파되면서 예수 메시지의 강조점에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가르침에서 역사는 뒤로 물러나고 철학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을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표현했다면, 그리스도교는 곧 ‘예수 망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될 ‘역사 빈곤, 철학 과잉’의 기나긴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그리스 신학자들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 삼위일체 등 존재론에 몰두하고 ‘하느님 나라, 가난한 사람’ 등 예수 메시지를 대부분 망각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자기 편지에서 역사의 예수를 삭제해버린 바울이 그 선두에 있다. 바울보다 후대에 쓰인 4복음서가 예수 역사를 강조했지만, 줄곧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과의 대화에 더 열중하게 되었다. 4복음서 중에도 예수 역사와 일정한 거리를 둔 요한 복음이 그리스 신학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복음이 되었다.

예수 역사는 그 후 18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교 신자 대부분 ‘신앙의 그리스도’에 몰입할 뿐 ‘역사의 예수’는 배경음악 정도로 여긴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한마디로 예수 망각의 역사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는 신앙의 그리스도만 기억하고 역사의 예수를 망각해 왔다. 특히 직업 종교인들(성직자, 목회자, 수도자)에서 그런 경향이 더 뚜렷하다.

철학이 그리스도교의 실세로 오래 군림하더니 최근에는 심리학이 철학을 제치고 신학의 새로운 실세로 등장하는 모양이다. 영성이니 치유니 힐링이니 하며, 마치 활력 잃은 그리스도교를 구출할, 방황하는 현대인을 위로할 새로운 구원 투수로 나서는 모양이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와 멀어도 한참 먼 방식이다. 오늘 그리스도교는 힐링 운운할 것이 아니라 먼저 역사의 예수를 회복해야 한다. 심리학에 심취된 종교인들은 신학의 본토인 성서로, 역사의 현장인 가난한 사람에게 어서 복귀하시라.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소브리노(Sobrino)로부터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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