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 - 30]

눈길 가는 데마다 일이 보인다. 밭에 무성한 풀은 물론이요, 밀린 이불 빨래, 어수선한 부엌까지 할 일은 많은데 뭐 하나 시원하게 해치울 수가 없다. 어쩌다가 다랑이가 누워서 노는 틈에 이 일 찔끔 저 일 찔끔 건드리기는 하지만,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지 못하고 아이에게 달려가야 한다. 가끔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풀을 매고 밥 준비를 하기도 한다. 다랑이는 일찌감치 손을 탄지라 그냥 아예 나와 한 몸이라고 여기고 늘 품에 안고 사는 거다. 밭에서 풀을 매며 땀을 흘리는 짜릿한 기쁨이 몹시 그립지만 지금은 아이에게 집중해야 할 때이니 애써 마음을 접는다.

그런 내게 눈병이 찾아왔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서 시작되어 다울이에게로, 다울이에게서 내게로 눈병이 옮겨왔다. 다울이는 눈곱만 끼는 정도로 끝났는데 나는 눈알이 빨갛게 되고 근질근질하면서 답답하기까지 해서 몹시 괴로웠다. 눈병에 좋다 해서 죽염수며 산딸기 잎 생즙, 물푸레나무 잎사귀 달인 물 등을 눈에 넣었지만, 낳을 듯 도지고 낳을 듯 도지며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내게 신랑이 특명을 내렸다.

“점심 먹고 같이 밭으로 갑시다. 다울이랑 둘이서 감자나 캐요.”

뜨거운 한낮에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 눈병이 빨리 떨어질 거라며 신랑이 특별히 내린 처방이었다. 내가 다랑이가 울고 보챌 게 분명한데 어떻게 일을 하느냐고 하자 내가 감자를 캘 동안 자기가 다랑이를 안고 있겠다며 안심을 시켰다. 솔직히 신랑이 다랑이를 맡을 수 있을까 마음이 푹 놓이지는 않았지만 믿고 맡겨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밭으로 출동!

▲ 자주감자는 그 생명력이 대단하다. 한 포기에 크고 작은 감자알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정청라

신랑이 다랑이를 안고 있는 동안 다울이와 내가 감자를 캤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호미와의 데이트, 마음 푹 놓고 일만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다울이도 나도 잔뜩 들떠서 감자 줄기를 뽑고 손으로 감자알을 파내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감자를 캘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감자 캐기는 보물찾기나 다름이 없다. 몇 알이나 달려있을까? 어떤 모양일까? 감자알을 후벼 파는 손길에 긴장감이 감돈다. 그러다가 호미로 감자알에 상처라도 나게 되면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다. 마치 어여쁜 보석에 금이라도 가게 한 듯이 말이다. 때문에 그야말로 아기 다루듯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감자알을 파내고 마침내 감자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 어여쁜 모습에 감동하며 포대에 담는다.

특히 자주감자를 캘 때는 그 기쁨이 더하다. 하얀 감자는 엇비슷하게 생긴 감자알이 서너 개씩 일정하게 달리는데 반해 자주감자는 포기마다 올망졸망 귀여운 감자알이 무지 많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꼭 사이좋은 흥부네 식구들 같다.

“우와! 이거 진짜 귀엽다. 머리에 혹도 달려 있어.”
“이건 엉덩이 모양 같지? 웃기게 생겼다.”
“이것 봐. 감자알이 엄청 많이 달려 있어!”

다울이와 나는 함께 감자를 캐면서 쉴 새 없이 소리치며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다울이가 빈 껍질만 남은 씨감자를 발견하고는 내게 물었다.

“엄마, 이 감자는 왜 껍질밖에 없어?”
“그건 씨감자야. 아기 감자들을 키우느라 자기 몸을 밥으로 주어 그렇게 된 거야. 봐, 씨감자 덕분에 아기 감자들이 많이 달렸지?”
“아, 이게 엄마 감자구나.”

다울이는 씨감자에 대한 내 설명을 제법 어른스럽게 이해했다. 맞다. 새 생명을 위해 제 몸을 다 내주고 빈 껍질만 남은 씨감자, 그게 바로 엄마로구나. 다울이의 말 속에서 나는 또 엄마를 배웠다. 요즘 엄마로서 내 삶을 새롭게 만나게 되어서인지 씨감자의 삶까지도 아주 뭉클하게 다가온다. 고맙다, 감자야!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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