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김대현]

비가 온다. 습하다. 연구실을 오르는 계단 앞이 감나무잎과 등나무 덩굴로 무성하다. 그 너머 시유지로 방치된 벗겨진 세간들과 가구들이 무성한 등나무꽃을 머리에 이고 있다. 땀이 많은 계절이라 무얼 부쩍부쩍 먹어도 살이 바로 오르지 않는다. 아침저녁 길어진 해로 일찍 일어나고 쾌적히 잠든다. 무엇을 살리고자 하는 열기들이 도처에 그득한 날들이다. 반나절이면 쉬는 국솥 안의 곰팡이들 또한 그러하다.

내 심리상태를 묘사하는 데 뉘보다 자신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계절은 그런 시절이 언제 있었냐는 듯 외면하기에 적합하다. 베어내면 비온 뒤 뭉텅이로 자라있는 잡초처럼 내 삶의 화려들도 이내 그리 자라날 것이다. 후덥고 자신만만한 시절에 회고풍의 문장은 맞지 않다. 인생의 여름이다. 30대, 나는 이제 나를 그리 끔찍히 세필하지 않고도 너끈히 행복할 수 있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잘 살아왔다고, 내심 생각해본다.

자신하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 자신을 무참히 헤집는 경험이 따라붙는 것도 이젠 반복되어 무던한 일이 되어버렸고, 마음의 힘이 넘치다가도 또다시 아무 힘을 잃은 듯 영락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돌아올 것이란 짐작이 있다. 주위가 예상대로 돌아가는 게 두렵기보다 짐짓 다행스러워져 가는 것. 모든 그렇게 저에 맞춤한 주위를 거느린 후라 굳이 제 내면을 토해내지 않아도 살 수 있고 그게 딴은 20대에 이은 진보 같기도 한 기분. 그게 감사하기도 하지만 좀 더 정확히는 감사하기 이전에 신기하도록 원래 그 자리에 고여 있는 앉은뱅이 웃음으로 선선히 다가오는 나날들이다.

그러니 이전 같은 폭발력들은 덜하고, 저잣거리의 노래들도 어릴 적의 그것과는 달리 “사랑이라는 게 지겨울 때가 있다”는 정도로나 적당히 넘겨 다루는, 입 다문 평안함의 나날이 또한 지금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내 붓으로 과도하게 나를 반성한들 아무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다.

ⓒ김대현

나름대로 겪은 바에 따라 이런저런 말을 뱉는다. 어차피 난 내 인생의 일로밖에 미루어 짐작하지 못한다는 말을 관용구처럼 붙인다. 말하려는 욕망이 듣고자 하는 욕망을 부쩍부쩍 이긴다. 경험과 수사를 꾸미기 위한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말에 너무 무게지우지 않기 위해 평소에 배워준 잡기들로 대화 사이의 공백을 메꾼다. 적당히 섞여 떠들 수 있는 능력이 너무도 부러운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그게 언제 적 일이냐는 듯이 사람 사이에서 몽롱해지는 순간순간이 과히 나쁘지 않다. 돌아와 이불 속에 들어갔을 때 조금 더 부끄러워지는 것 외에는.

예전에는 뱃속으로 치받치는 온갖 타래진 감정을 뚫고 단 하나의 교훈을 거머쥐는 게 그리 힘들었다면, 지금은 도처에 난무하는 교훈체를 뚫고 자기와 직면할 단 하나의 감정을 마주하는 게 그리도 힘들다. 나에겐 이미 많은 삶의 이유들이 있고, 매번 생각할 수 있는 핑계들은 하나같이 그럴싸해서, 무언가 반성하는 순간조차 지나친 허우대가 깃들어 잘난 말로만 굳어버리게 된다.

나에겐 언제나 너무 많은 깨달음과 일과 사람과 약속들이 있다. 이를테면 바쁘다는 건 너무도 당연해서 꺼내어 말할 꺼리조차 못 된다. 바쁘다보면 뉘에게 애정을 쏟는 게 제 딴에는 대단한 벼슬 같아 보이기도 하고, 하물며 제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어느 날 내 속을 들이파는 이야기가 신선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내가 평소에 자기를 파는 일을 워낙에 안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말처럼 무장한 이 더위가 가시고 추운 계절이 오면 나는 언 발을 모으고 일생의 흥망을 복습할 것이다. 30대부터 시간이 액셀 밟은 듯 간다는 말이 용하게 맞는 말이다. 도가 틘 듯한 머리 좋은 교훈들은 한때 푸르렀던 낙엽과 함께 노변을 뒹굴 것이다.

나는 기억력이 짧아서, 일주일이 더우면 그 다음 일주일도 더울 것만 같다고 여긴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계절이 낯설지 않은 해가 없었듯이, 그 많던 똑똑한 말을 밟고 나는 또 끓여둔 국을 쉬어뜨릴 것이다. 그리곤 거기서 내 염보다 빨리 삭아버린 내 얼굴을 비춰볼 것이다. 나를 과장하지 않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던 일상을 지나 조심히 깍둑 썰린 쉰 야챗거리를 버리면서, 마음을 여는 데 그리 까다로웠건만 한데 놔두니 반나절 만에 상해버리는 제 마음을 생각할 것이다.

 

오랜만에 펜촉에 나를 맡겨보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비가 잠시 멎었다 다시 쏟아진다. 오늘은 덥다고 손도 안 댔던 부엌에 가 오랜만에 밥을 안쳐야겠다. 바깥 밥만 사먹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김대현 (베드로)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있으며, 노래하고 사진찍고 잡지 표지디자인 만지는 일을 좋아한다. 각 세대의 상식을 다른 세대에 번역해주고 이해의 끈을 잇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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