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원을 찾는 수행자, 시인 구상(具常) - 1

우리신학연구소와 신앙인아카데미가 공동주관하는 평신도 영성 강좌에서 지난 7월 3일 한상봉 편집국장이 발표한 글을 수정 · 보완해 연재합니다. ―편집자

강신주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 2010)이라는 책을 통해 “지금까지 저는 수많은 유리병 편지를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스피노자, 장자, 나가르주나, 원효 등과 같은 철학자였습니다. 매번 편지를 받아 펼쳐볼 때마다 저의 고독과 외로움은 경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 과연 어떤 사람이 저의 유리병 편지를 꺼내 볼까요? 그 사람도 저와 마찬가지로 들뜬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보게 될까요?”라고 물었다.

▲ 구상 시인 (사진 출처 / 구상문학관 홈페이지)
강신주는 ‘철학’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였지만, 구상(具常, 요한, 1919~2004, 본명 구상준)은 ‘종교’가 필요한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제도 종교’라기보다, 오강남 교수가 늘 외던 ‘심층종교’의 핵심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구상은 시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어들은 문학적 탁월함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비의를 밝힌다는 면에서 탁월하다.

그는 ‘나의 시’에서, “달마대사는 벽을 마주하기 9년 만에 도를 깨우쳤다는데…… 옛 어느 성악가는 3년간 폭포가에 나아가 목청을 뽑아댔더니 그만 명창이 되었다는데……” 하고 탄식하며 자신의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나의 거짓 사연에 그대들은 속지 말라”고 이른다. “그리고 정녕 깊은 사연은 아직 한 번도 내지 못하였음을 이제사 그대들에게 고백하노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눈과 손에 신령한 힘이 깃들고 내려서 실재의 안팎을 고대로 그려낼 그날은 언제일까?” 자문한다.

구상이 시를 수행의 방편이며 동시에 수행의 수준을 드러내는 표지로 여겼다면, 도종환 시인은 <해인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집에서 ‘내 안의 시인’이란 시편을 통해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 시인을 찾아내는 게, 회복하는 게 수행이라 했다. 그는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빛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의롭지 않은 이가 내미는 손은 잡지 않고 산과 들 서리에 덮여도 향기를 잃지 않는 산국처럼 살던 곧은 시인 몰라라 하고 나는 오늘 어떤 이들과 한길을 가고 있는가” 물으며 “내 안에 시인이 사라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승혜 수녀는 ‘한국 그리스도인의 수행’(<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수행>, 바오로딸, 2005)이라는 글에서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 놓은 예수의 행복선언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수행자”라고 말했다. 이 가운데 교회제도 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준된 수도회에 입회하여 가난 · 정결 · 순명의 세 가지 서원을 발하고 살아가는 남녀 수도자들이 ‘공적 수행자’라면, 공식 서원이 없이 예수처럼 소박하게 살면서 베푸는 이들은 ‘평신도 수행자’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예수의 삶이야말로 명확한 표준이 되는데, “한마디로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수행의 근거가 되는 영원한 수행의 이상”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 구상을 평신도 수행자라고 불러도 좋다. 구상은 ‘나자렛 예수’라는 시에서 예수를 두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요?”라고 묻고 있지만, 그가 갈망한 만큼 예수를 납득하고 있다.

나자렛 예수!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굿간 구유에서 태어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며,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우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일을 하다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하느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라고
엄청난 소리를 한 당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문둥이를 말짱히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스스로의 말대로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다가
마침내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볼꼴 없이 죽어간 철저한 실패자.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때로는 멀리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주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사회 혁신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과 말을 뒤엎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고통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시요,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 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이고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하였다.

구상이 예수를 깊이 묵상하였지마는, 세상과 교회 현실은 그분이 갈망했던 것과 다름을 깨닫는다. 그래서 성탄절이 더 고통스럽다. 구상의 시 ‘성탄절 고음(苦吟)’에서는 “구유 위에서 당신을 첫 조배하던 목동들의 순박한 기쁨과 그 외양간의 단란함마저 깨진 교회당”을 보면서 “당신 왕국의 건설을 두려워하는 헤로데와 그 군사들이 이 밤도 당신의 새순을 자르기에 눈 뒤집혀 지새우는 크리스마스, 복음을 쇼윈도의 구슬옷처럼 조명에 따라 변색시키는 당신의 제자들과 그 열광의 무리와 바리사이파들에게 오늘도 에워싸인 당신”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래서 “자케오처럼 나무에 올라 한 마리 까마귀 영혼이 우짖는다”고 썼다. 여기서 까마귀란 시인 자신이며 ‘슬픔에 겨운’ 예언자이기도 하겠다. 구상은 자신과 까마귀를 동일시한다.

나는 비탈산, 거친 들판을 헤매면서
썩은 고기와 죽은 벌레로 배를 채우며
종신서원의 고행수도를 하는 새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너희는, 영혼의 갈구와 체읍으로
영영 잠겨버린 나의 목소리가
불길을 몰아온다고 오해하지 말라.
오직 나는 영통한 내 심안에 비친
너희의 불의가 빚어내는 재앙을
미리 알리고 일깨워 줄 따름이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오늘도 나는 북악 허리 고목 가지에 앉아
너희의 뒤집힌 세상살이를 굽어보며
저 요르단 강변 세례자 요한의 그 예지와 진노를 빌려서 우짖노니
(구상, ‘까마귀’ 부분)

* 체읍(涕泣) :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욺

이 시의 후반부에서 구상은 세상이 뒤틀리는 탓을 ‘시인’에게서 찾는다. “오늘날 시인들의 불명(不明)이 이 시대를 이처럼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죄업을 시만이 소멸할 수 있다고 말하는 구상은, ‘시(詩)’와 ‘경(經)’이 다르지 않고, ‘시’와 ‘자비’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 시에서 오대산 중턱 늙은 까마귀중이 서울 여의도 아파트숲 까마귀에게 귀띔한 진짜 시는 이런 것이다. “왜 있지 않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가,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라든가!”

시인 유치환은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중)고 하였다. 그러나 구상은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별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말이다(구상, ‘그분이 홀로서 가듯’ 참조). 구상은 시를 통해 뒤집힌 세상 한가운데로 질러가는 수행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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